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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on Oct 24. 2021

시작

예비예비신부 10

11년 동안의 여정에 마침표를 찍기 위해 춘천으로 향했다. 지원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메시지나 전화로 알렸어도 됐지만 그렇게 도망치듯 끝내고 싶지 않았다. 내가 꿈꿨던 길, 내가 걸어왔던 길의 끝에 다다랐을 때, 새로운 길로 이어질 그 문을 스스로 열고 싶었다. 그게 내가 가졌던 믿음에 대한 예의이고 그 길을 걸어온 나 자신에게 바치는 존중이라 생각했다.


계절이 바뀌면서 성소국장 신부도 바뀌었다. 초면에 그만두겠다는 말을 하자니 꽤 멋쩍었다. 나의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몇 번씩 읽어봤다던 그는 진심으로 아쉬워했다. 어째서 이런 사람을 계속해서 놓쳐왔던 건지 이해가 안 된다며 짤막한 욕지거리를 하기도 했다. 속은 시원했다. 내가 욕하면 모양새가 좀 그렇지만, 그래도 이 사람은 같은 신부님이니까 괜찮겠지. 놓치기에는 정말 너무나 아깝고 안타깝지만, 그동안 느꼈을 슬픔과 고통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도 못 하기 때문에 잡지는 못하겠다고 한다. 이런 사람을 이제야 만났다는 점에선 아쉽기는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이제 와서 어쩌겠나. 사랑도 타이밍인데 이거라고 별 수 없지. 어떤 선택을 내리든 행복에 다다르길 바란다는 말을 끝으로 마지막 면담이 끝났다.


나의 길은 끝났지만 세상은 끝나지 않았고 전과 같이 바쁘게 돌아가고 있다. 나의 이상은 무너졌지만 교회는 무너지지 않고 여전히 견고했다. 모두 제자리에 있었고 나만 혼자 제자리를 찾아 돌고 돌아가는 중일뿐이었다. 눈물이 나지만 슬프지는 않다. 내 안에 남아있던 미련과 후회 같은 찌꺼기들이 빠져나가는 중인가 보다.


산티아고에서 약 200km 떨어진 곳에는 땅끝마을 '피스테라'가 있다. 순례자들에게 전해지는 관습이 하나 있는데, 땅끝마을에 도착하고 나면 여행을 도운 소지품 중 하나를 태우는 것이다. 그곳은 이름에 걸맞게 파도가 들이치는 바위 위에 커다란 등대가 세워져 있는 세상의 끝이다. 그 끝에서 물건을 태우는 건 여기까지 온 걸 기념하자는 것도 있지만, 끝에서 다시 시작하는 걸 응원하는 의미도 있다. 소지품과 함께 부정적인 것들을 같이 태워 날리고 새롭게 걸어 나가는 것이다. 그래서 산티아고 순례길은 완주 후에야 시작한다. 끝의 끝보다도 더 끝에서 미련과 욕심을 태우고 나서야 새로 시작된다는 점에서 인생도 마찬가지였다.


피스테라까지 함께 했던 사람의 말이 떠오른다. 그는 내게 메고 있는 배낭보다 걱정이 더 무거워 보였다며 럭키가이라고 했다. 그 당시에는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지 못했다. 겨우 그 정도의 시련이라 운이 좋았다고 한 줄 알고 기분이 안 좋기까지 했다. 이제야 알겠다. 그런 뜻이 아니었다. 고통 속에 깊이도 가라앉고 크게도 휘청거리는 동안 단단한 중심이 생기고 있었던 것이다. 10년이 11년으로 늘었지만 이제는 괜찮다. 여전히 이력서에 한 줄 적기 힘든 시간들이지만 어딘가로 사라지지는 않았다. 후회와 자책으로 통째로 도려내고 싶은 시간들이었는데, 이제야 그 모든 것들이 모여서 내가 있을 수 있음을 알았다. 나는 운이 좋았다.


새로운 인생을 살기 시작했다. 그제야 발밑이 보였다. 한참을 제자리에 멈춰 뒤쳐졌다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나는 나비도 매미도 아닌, 비바람을 맞아가며 천천히 뿌리를 내려온 나무였다. 보이지도 않을 만큼 빠르게 멀어져 가는 남들과는 비교할 필요도 없었고 비교할 수도 없었다. 처음부터 삶의 방향도, 종착지도 달랐던 것이다.


하나씩  안의 신학교를 정리하고 있다. 허리를 다치면서 잃어버린 일상이 속상했지만, 혹여나 입학에 걸림돌이 될까 미뤄두었던 국가유공자 등록을 신청했다. 그곳에 지원하기 위해 쳐다보지 않았던 대학을 준비한다. 반강제적으로 선택했던 문과를 버리고, 적성 맞는 이과를 택했다. 입학만을 위해 달리느라 묵살당해온 과거의 나를 위해 심리 상담을 시작했다.


나는 이제 구겨져 있지 않다. 찌걱거리는 소리에 내가 있어도 되는 자리인지 아닌지 생각하느라 속상해하지도 않는다. 여전히 나의 질문들에 대한 답은 모르겠지만 이젠 상관없다. 손에 쥔 것을 놓아보니 그 답을 찾는 건 그다지 중요한 부분은 아니었던 것 같다. 돌아보니 답을 찾는 과정에서 조금씩 배워온 값진 것들이 살아가는 데에 더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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