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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on Oct 24. 2021

판단

예비예비신부 9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을 때 제일 좋았던 건, 어느 곳으로든 몇 걸음만 가면 노란 화살표가 보인다는 것이다. 그 노란 화살표는 순례길 위에서의 약속이었다.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 주겠다는 약속. 그래서 흙길이나 도로나, 갈림길이나 골목길이나 항상 앞서간 순례자들이 표식을 남겨놓았다. 일행을 잃어버려 혼자가 되었을 때에도 혼자가 아니라는 안도감이 몇 번이고 날 주저앉지 않게 지켜주었다.


서울로 돌아와 다시 일상을 살아내기 시작하면서 노란 화살표가 정말 그리워졌다. 수없이 길을 잃을 때면 나는 '인생에도 화살표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러다 갑자기 화살표가 내 눈에만 보이면 어떡하지.' 따위의 상상까지 하곤 했으니까. 하지만 그런 일은 생기지 않았고 방향을 몰라도 선택은 해야 했다. 그래서 화살표가 있었다면 어딜 가리킬까 생각하며 선택을 하곤 했다. 나는 한동안 화살표가 있다면 춘천을 가리켰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게 곧 나의 길이 함흥 교구의 사제였다는 말은 아니었다. 마주해보니까 알 것 같았다. 해야만 할 것 같았는데, 꼭 내가 해야만 했던 건 아니었나 보다.


이미 그동안의 나날이 고통의 연속이었지만, 함흥 교구를 준비하면서는 정말로 꽤 힘든 시간을 보냈다. 전년도의 충격적인 탈락은 생각보다 내상을 심하게 남겼다. 성당을 보면 뭔가가 목 끝까지 차올라 말문이 막혔다. 한없이 작아지고 초라해지는 마음에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모두 나를 두고 떠나가는 꿈을 자주 꿨다. 제일 아프게 했던 건, 정말 내 탓일 수도 있었겠다 생각하는 내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런 괴리를 견뎌가며, 그리고 모든 월차를 쏟아부으며 함흥 교구에 소속되기 위해 수차례 춘천으로 향했다. 힘들다거나 숨이 안 쉬어진다는 등의 나약한 소리를 할 수는 없었다. 붙잡지 않으면 사라질 10년을 되찾고 정리할 수 있을 마지막 기회였기 때문에 절실했다. 사제가 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이 길이 맞는지 알아보기 위한 마지막 시간이었던 것이다.


그런 시간을 갖기 위해 찾은 춘천에서는 사무처장과의 면접 이후로 계속해서 난항이었다. 면접 외에도 여러 가지 절차가 있었는데, 합격이 되면 연락을 준다던 성소국에서는 보름이 되어가도 연락이 없었다. 첫 모임의 날짜가 다가와 입술이 바짝바짝 말라서 하루에 한 번 꼴로 연락하니 그제야 한 단계씩 진행되었다. 그러던 차에 코로나가 유행하기 시작했다. 처음 겪어보는 바이러스에 정부는 모든 집합 활동을 금지했고 예신 모임도 예외는 없었다. 첫 모임이었던 2월 이후로 수능 원서를 접수할 때까지 모임은 없었고, 달마다 이번 달에는 모임이 있는지 확인할 때면 '모임은 없고, 연락 주는 걸 깜빡했다. 미안하다.'는 회신을 받았다. 이게 맞는 건가?


고의는 아니었으리라 믿는다. 목마른 자가 우물을 파는 것도 맞다. 최선을 다해 노력했지만 이번에도 일방통행이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철저한 이방인 취급 덕분에 조금 더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어졌다. 사제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훌륭한 삶을 살아낼 수 있고 사제가 아니어도 누군가에게 위로와 안정을 줄 수 있다. 세상의 모든 현상을 이해할 수 없듯 내가 가진 의문도 꼭 답을 찾아야만 하는 건 아닐 수 있다. 시간이 약이라고, 내게도 이 정도의 정리는 되었다. 여태껏 소속되지 못하고 외면받고 실패하기만 했던 곳에서 하나쯤은 뭔가를 이뤄내고 싶었던, 나를 위한 작은 욕심 때문에, 그래도 내게 믿음이라는 게 아직 남아있을 때 교회라는 울타리 안에서 지내보고 싶었던 작은 욕심 때문에 절실했을 뿐이다.


절실함이 시야를 가릴 때 얼마나 맹목적이고 객관적이지 못한 판단을 내리게 되는지 경험으로 알았다. 그래서 절실한 건 절실한 거고 지원자로서 마땅히 가져야 할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성소국에서 나를 사제에 적합한지 판단하는 것처럼, 나도 내가 평생을 바쳐 소속되려는 곳이 나의 지향점과 닿아있는지 판단을 거쳐야 했다. 춘천에서는 그럴 기회가 끝까지 없었다. 코로나가 아니었더라도 크게 다를 부분은 없었으리라 생각했다. 그래서 이 굴레에서 스스로 벗어나기로 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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