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이 나시려나요. 아주 오래전 일이에요. 따님이 한 다섯 살쯤 되었으려나. 따님은 한 겨울에 굳이 맨발에 분홍색 젤리 슈즈를 신고 유치원엘 가겠다고 고집을 피웠어요. 그 해 여름에도 두꺼운 타이즈를 입겠다고 고집을 피웠고요. 저는 좀처럼 따님의 고집을 꺾을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따님은 원하는 차림을 하고 젤리슈즈를 신고 등원을 했습니다. 따님을 맞이하는 유치원 선생님께 민망했지만, 선생님은 다 이해한다는 듯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시더라고요. 그 미소에 저는 살짝 비굴한 웃음으로 답했던 기억이 있어요. 좀 난감했는데 생각해 보니 그때가 패션에 대한 따님의 철학(?)이 움트기 시작한 시점인 것 같아요. 그 후로도 따님은 종종 옷 입는 문제로 저와 실랑이를 벌였지요. 그러다가 둘이 적절한 선에서 타협을 봤어요. 최소한 어른들이 많이 모이는 장소에 갈 때는 단정하게 입기로요. 그 이후로 따님의 옷차림에 대해 잔소리는 안 했어요. 아니라고요? 서로 다른 기억을 갖고 있군요.
젤리슈즈
옷차림 혹은 패션은 세대 간의 충돌이 가장 격렬하게 일어나는 영역인 것 같아요. 그래서 이 글을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고민했어요. 옷에 대한 따님의 고집이 생겨나는 시점에서 글을 시작한 이유는 그 시점이 아름다움에 대한 개념도 함께 생겨나기 시작한 시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무엇을 어떻게 입어야 내가 아름다워 보이나. 다섯 살 무렵의 따님에게는 그 답이 젤리슈즈이고 타이즈였겠지요. 시간이 흐르면서 젤리슈즈와 타이즈는 몸을 꽉 조이는 스키니 청바지로, 어깨가 훤히 드러나는 오프숄더 블라우스로 변화를 거듭했어요. 머리 색도 때마다 달라지더군요. 때로는 신기하게 때로는 못마땅하게 지켜만 보았습니다. 아니라고요? 잔소리라뇨. 역시 다른 기억을 갖고 있군요. 얼마 전 따님이 옷 정리를 한다면서 한 보따리나 되는 옷을 재활용 가게에 보냈다는 말을 듣고 속이 시원했던 걸 보면 제가 따님의 패션 스타일을 별로 좋아하진 않았나 봐요. 사실, 자식의 옷차림을 좋아하고 존중하는 부모는 흔치 않아요. 할머니는 아직도 저에게 옷을 단정하게 입으라는 잔소리를 하십니다. 옷차림에 대한 세대별 의견 차이는 결코 좁혀지지 않을 거예요. 좁혀야 할 이유도 없고요. 저는 오늘 따님의 패션을 이해하려고 노력한다거나, 이런 옷차림이 따님에게 어울린다거나 하는 섣부른 조언을 하려는 것이 아니에요. 오히려 그 반대의 이야기를 하려고 해요. 모종의 부탁이랄까.
언젠가 따님이 제 옷차림을 보고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어요. '나이 든 사람이 억지로 젊어 보이려고 하는 것 같아'. 따님의 말에 마음의 상처를 입었지만, 옷을 고르고 입을 때 가끔 그 말을 떠올려요. 자연스럽지 않은 옷차림이라는 뜻이잖아요. 어딘지 모르게 어색한 차림. 제가 따님의 젤리슈즈와, 타이즈와, 몸에 꽉 끼는 스키니 청바지와, 어깨를 드러내는 블라우스가 못마땅했던 것처럼 따님도 저의 차림새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거죠. 한 번씩 주고받았으니 퉁치기기로 해요. 그런데 말이에요. 나이가 드니까 좀 경쾌하고 가볍게 입고 싶은 마음이 생겨요. 이건 젊어 보이고 싶어 하는 것과는 좀 달라요. 뭐랄까 나이가 들면 사회적 권위와 지위와 그와 관련된 기타 등등을 모두 내려놓고 가벼운 삶을 삶아야 한다는 저의 삶의 철학으로부터 나온 뭐 그런 일관성 있는 패션 철학이랄까(뭐라고 떠드는 거지?). 나이가 들수록 고상하고 우아한 스타일을 선호하는 친구들도 있지만, 저는 좀 가벼워지고 싶어요. 고상하고 우아하면서 가볍고 경쾌할 수 있다면 그보다 더 좋은 것은 없을 테고요.
그래서 따님.
진지하게 부탁합니다. 저의 패션 카운슬러가 되어 주세요. 화이트-블랙-그레이-블루-카키 정장 일색이던 옷장에 살랑살랑한 시폰 원피스와 와이드 팬츠를 걸어두고 싶어요. 옷에 큰 관심이 없던 제가 이런 말을 하니까 친구가 늙었다는 증거라고 하더군요. 부정하지는 않겠지만, 아니 오히려 그 말이 진실이어서 옷을 더 멋있게 입고 싶어요(단정한 것 말고요). 제가 내면이 좀 멋있는 사람이잖아요(농담으로 듣는 건 아니죠?). 내면의 멋짐을 옷차림으로도 잘 표현하고 싶어요. 그런데 한 가지 걱정되는 것은, 옷장에 걸어두고 싶은 시폰 원피스와 와이드 팬츠가 오래전 따님의 젤리슈즈와 타이즈에 해당하는 것이면 어쩌나, 하는 것이에요. 더구나 저에게는 제가 어떤 차림을 하든 다 이해하고 자애로운 미소를 보여줄 선생님이 안 계시잖아요. 무슨 말인지 이해하시죠?
저는 따님의 고집을 꺾을 수 없어서 한 겨울에 젤리슈즈를 신고, 한 여름에 타이즈를 입도록 내버려 두었지만, 저는 그런 고집 따윈 피우지 않을 거예요. 저는 기꺼이 따님의 조언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답니다. 그러니 저에게, 패션너블하고 아름답고 에지있게 옷을 입는 방법을 가르쳐 주세요. 종종 젊은 친구들이 입는 옷도 어울리게 소화할 수 있는 팁을 주세요. 패션은 도전이고, 저는 도전정신이 투철한 사람이니까요. 내면의 아름다움 뿐만 아니라 겉으로 보이는 아름다움도 포기할 수 없는 사람이니까요. 부탁해요 따님.
옷 좀 얌전히 입으라는 잔소리를 예상했는데 반대로 청을 드려서 당황했나요? 제가 이렇게 반전이 있는 사람입니다. 아방가르드한 패션도 잘 소화할 것 같지 않나요? 아, 그런데 제가 젤리슈즈와 타이즈에 빗대어 말한, 계절에 상관없는 그 언밸런스한 패션이 이 시대의 새로운 패션인가요? 그렇지 않으면 대체 여름에 부츠는 왜 신으시는 거죠? 겨울에 왜 스타킹도 신지 않고 맨발에 힐을 신는 거죠? 아, 갈 길이 멀다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