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1012 플랫폼 엘에서 열린 카렐 마르턴스 개인전의 작가 토크
네덜란드 디자인의 거장 카렐 마르턴스의 개인전이 플랫폼 엘 컨템퍼러리 아트 센터에서 열렸다. 전시 디자인을 슬기와 민이 맡았고... 여러모로 주목받았던 전시였던 듯하다.
카렐 마르턴스라는 이름은 네덜란드 디자인에 대해서 관심이 있다면 한 번이라도 들어봤을 이름이다. 00년대 중후반부터 네덜란드 디자인에 대한 관심이 커졌고, 나의 경우에는 우리나라에는 앞서 말한 디자인 듀오 슬기와 민이 쓴 책, '불공평하고 불완전한 네덜란드 디자인 여행'이라는 책에서부터 카럴 마르턴스의 디자인을 보게 된 것을 계기로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다. 사실 그전부터 그의 작업 중 형광색 잉크로 여러 가지 원형이나, 아이템들을 찍어 만든 모노그래프들은 그 책을 보기도 전에 일찍이 내가 어디선가에서 보게 된 작업이었다. 그 정도로 카렐 마르턴스의 작업은 디자인계에서 큰 영향을 끼치고 있었으리라.
앞서 말한 '... 네덜란드 디자인 여행'이라는 책을 읽다 보면 책의 서술자인 슬기와 민의 최성민 디자이너가 카렐 마르턴스의 작품집으로 유명한 'Printed Matter'(책의 본문에는 '인쇄물'이라는 이름으로 직역해 놓았다)를 처음 접하게 된 순간과 잃어버리고 다시 얻게 되는 일화가 나오는데, 여기서 이 최성민 디자이너가 그 책을 그 당시 얼마나 애지중지 하게 여겼는지 절절한 감성을 느낄 수 있을 정도의 자세한 서술이 되어있다. 그리고 뒤이어 나오는 내용이 카럴 마르턴스라는 디자이너에 대한 소개와 그의 작품들이 무심한 듯 나열되기 시작하는데, 이 부분에 다다르면 앞서 글쓴이가 왜 그렇게 그의 작품집에 감정적이었는지 충분히 이해될 정도의 디자인 세계가 펼쳐진다.
천연 색색의 화려한 색상, 대범한 그래픽, 그리고 모더니즘의 규칙성과 정갈함이 보이면서도 역동성을 잃지 않는 타이포그래피.
그렇게 대학시절 책으로, 이미지로 접했던 카럴 마르턴스의 개인전이 한국에서 열린다니. 당연히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질만했다. 서울 학동역 근처의 아트센터 플랫폼 엘이라는 곳에서 기획한 이 전시는 18년 10월 11일 오프닝 리셉션을 갖고, 그다음 날 12일에 카렐 마르턴스의 아티스트 토크 행사가 있었다. 마침 금요일 휴가를 쓰게 되어서 시간을 내 학동역까지 가게 되었다. 아티스트 토크는 플랫폼 엘의 지하에 위치한 강당 같은 곳에서 이뤄졌다. 느지막이 들어가 앉아 기다리다 보니 멀대같이 큰 키의 느릿느릿한 걸음의 할아버지께서 등장하셨다. 카렐 마르텐스. 이름으로 검색했을 때 사진이 나오는 경우도 잘 없었어서 나는 얼굴도 모르고 있었고, 그날 처음 보게 된 것이다. 아티스트 토크가 시작되고, 토크는 초대된 게스트들이 전시와 디자인 작업에 관한 질문을 하면, 카렐 할아버지께서 답변을 하시는 형태로 진행이 되었다. 카렐의 첫 답변을 할 때가 유독 기억이 나는데, 정말 저분이 그렇게 멋진 디자인을 하실 수 있는 분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79세의 노장 디자이너는 보청기를 끼고 있었고, 노안 때문에 안경을 썼다, 벗었다를 반복했다. 무엇보다 말씀을 하실 때 목소리 떨림이나 더듬거림이 심하셨다. 다행히 토크가 진행되고, 디자인에 관한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놀라운 집중력과 유창한 말솜씨,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한 애정을 여과 없이 드러내 주셨다.
아티스트 토크는 통역사 한분이 옆에서 도와주셨는데, 게스트 선생님들께서 우리말로 질문을 하면 영어로 카렐에게 통역해주고, 카렐이 영어로 답변을 하면 통역사분이 우리말로 또 통역해주시는 모양새였다. 질문을 하면 답변을 듣게 되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들었고, 때문에 많은 질문을 하기가 어려운 상황이었으나, 전시기획자 및 게스트 선생님들의 빠른 정리와 대처로 많지 않은 질문에서 많은 이야기들을 들을 수가 있었다.
다음은 그 날 아티스트 토크에서 나온 질문과 답변의 요약이다.
(토크와 통역 과정에서 매끄럽지 않은 맥락을 제가 임의로 빼거나 덧붙인 부분이 있습니다. )
전시장 가장 처음 접하게 되는 것이 째깍 거리는 시계의 소리였다. 카렐 마르턴스의 작업실에서 마주칠 수 있는 광경이기도 했는데?
시간과 시계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 시계의 부품을 빼서 다른 파트들을 붙여서 아예 다른 것으로 만드는 걸 좋아한다. 내가 그냥 좋아하는 것인데... 그런 시계 비슷한 것들이 많아서 째깍거리는 소리가 굉장히 크다. 작업실에 찾아온 사람들 다들 시계 소리가 이렇게 큰데 작업이 가능한지 많이 물어본다. 다행인지 나는 보청기를 껴야 소리가 들리는데, 작업 중엔 끼지 않기 때문에 소음이 없는 상태에서 작업을 계속할 수 있다. 전시의 인트로로서 나쁘지 않은 시작이라 생각을 했고, 음향전문가에게 부탁해서 영상과 함께 시계 소리를 키워달라고 부탁하여 전시의 인트로로서 틀게 되었다.
한국의 많은 사람들이 카렐을 알게 된 계기가 오아서 OASE(카렐 마르턴스가 오랫동안 디자인해온 네덜란드의 건축 잡지)일 듯하다. 수많은 오아서들 중에 한 권만으로도 오랫동안 이야기가 가능할 듯 하지만. 시간 관계상 가장 긴박한 질문을 가져왔다. 48호 이후 이슈들부터 제자들과 협업을 하게 되었는데, 가장 즐거웠던 점이 있었는지 궁금하다.
오아서는 오랫동안 괜찮은 퀄리티를 유지해올 수 있었기 때문에 나에게도 중요한 작업이다. 커미션을 받기 전에 오아서는 그저 A4 사이즈의 책자였는데, 내가 커미션을 받은 이후에는 로고도 쓰지 않고 반복되는 규칙을 정해놓지 않았다. 당시에는 모더니즘의 디자인이 유행했다. 단일성, 통일성이 중요하곤 했다. 내가 커미션을 받은 이후부터는 로고도, 레이아웃도 같은 것은 쓰지 않았다. 새로운 호가 나올 때마다 내용과 관련된 다른 디자인을 했다. 그 과정에서 학생들과 같이, 건축가들과 같이 이야기하던 대화가 즐거웠다. 거기서부터 그래픽 디자인을 만들어내던 경험이 중요했다. 여전히 내가 살았던 시대에 중요하다고 여기던 가치들이 그들에게도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이 좋았다. 그들과 같이 퀄리티에 대한 고민을 나누던 것이 즐거웠다. 당시에 같이 일했던 사람들과 지금까지도 꾸준히 관계를 유지하고 계속해서 작업할 수 있다는 것이 좋다.
구체적으로 어떤 방식으로 작업을 전담하게 되는지?
미팅을 할 때 편집자들과 이야기를 많이 하고, 협업을 하는 학생들에 대해서 오랫동안 알고 지낸 상황에서 이번 호수에 대한 질문을 시작한다. 오랫동안 알아왔던 학생들이기 때문에, 그들을 존중하고 그들과 같이 배워가는 과정 자체를 서로에게 배우는 과정으로서 즐긴다. 당연히 내가 별로 좋아하지 않는 학생의 아이디어나 맘에 들지 않는 일이 있을 수도 있지만, 그들의 동기와 같은 것들을 따져보기도 한다. 전체적으로 학생들의 아이디어를 존중하면서 좋은 작업을 내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오아서의 경우도 그렇고 다른 작업들에서도 그렇고, 모노 타입 그로테스크, 악치덴츠 그로테스크, 젠슨 등, 타입 페이스에 대한 취향이 명확하고 구체적인 것 같다. 서체를 선택할 때의 기준이 있다면?
Clumsy. 완벽하지 않은 점을 좋아한다. 완벽한 크기, 밸런스를 가진 유니버스와 같은 서체를 볼 때 흥미를 느끼진 않는 편이다. 나의 개인적인 성향인 것 같다. 타입 페이스는 글자의 얼굴과 표정이다. 성격이 표현된다.
디자인의 완성도를 끌어올리면서도 완벽하지 않은 요소들로 긴장과 이완을 끌어올리는 방식이 보인다. 언제부터 우리는 완벽하고 언제부터 불완전함을 느낄까? 완벽함과 불완전함의 기준을 정한다면?
하나의 수업으로 오랫동안 다룰 수 있는 주제이기도 한 것 같다. 완벽함의 경계선이 있다고 생각한다. 완벽함을 추구하다 보면 어느 정도 일정 선을 넘어갔을 때 완벽함과 디테일을 추구하더라도 원하는 바를 얻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어디에 선가는 멈춰야 한다. 영원히 끝까지 갈 수가 없다. 이런 부분을, 완벽함을 추구한다면, 디자이너로서 생각해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처음 만든 책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다.
내가 살았던 시대에는 그래픽 디자인이라는 분야의 확립이 되지 않았었다. 처음 책을 만들게 된 계기는... 출판에 대한 일에 초대를 받게 되었다. 학교를 졸업하고 군대에 갔다 와서 책을 만들게 되었다. 공방에 들어가 보니, 여러 가지 도구들과 종이 샘플들, 그리고 원고가 있었다. 바로 작업에 들어가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나를 데려온 그분은 나를 데려다주고 그냥 나가버리더라. 나는 책을 만들어본 적이 없어서 멍하니 있다가... 30분 뒤에 그분에게 책 만드는 법을 좀 알려달라고 요청했다. 그분이 여러 장비를 다루는 법을 알려주시게 되어서 책을 만들게 되었다. 그러면서 많은 편집자들과 연결되었고 일의 시작을 경험할 수 있었다. 운이 좋았다.
오아서를 시작으로 어느 시점부터 디자인 작업에서 엄격한 디자인보다는 자유롭고 느슨해진 모습이 많이 보인다. 그 계기가 궁금하다.
얀 치홀트와 같은 디자이너들의 책을 보면서 나만의 책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타이포그래퍼로서 활동을 하면서도 다른 분야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예를 들어 영화,패션, 건축 등등... 그것들의 지켜야 하는 문법들에게서 도움을 많이 받았다.... 영화의 시퀀스는 책의 연속성과 관련이 깊다고 생각한다.
치홀트와 같은 작업들은 재연하기 힘들었다. 자기만의 목소리를 낼 필요가 있었다. 같은 방식을 반복하는 것은 좋지 않다고 생각했다. 질문은 반복되더라도 답변은 매번 다를 수 있다. 그 점이 중요했고 살리려고 노력했다.
모노그래프 작업은 언제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는지?
나는 그래픽 디자인 교육을 받진 않았다. 예대에서 조각, 회화, 일러스트 등을 배웠다. 그런 것들이 넓은 범위의 교육을 했다고 생각한다. 그런 것들이 서로 좋은 영향을 주었다. 학교에 프린트를 할 수 있는 장비가 있었고, 잉크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3가지 색(CMY)만 있다면 이 세상 모든 색을 만들 수 있다는 개념이 너무 좋았다. 그 흥미로부터 잉크를 묻혀 찍어내는 작업이 시작되었다. 매주 실험을 계속했다. 그런 작업들로 돈을 벌긴 힘들었기 때문에 커미션을 동시에 진행을 하면서 내가 좋아하는 일과 일로 하는 일을 알게 되었다.
지금 젊은 디자이너들은 인쇄에 대한 이해나 경험이 카렐 본인과는 많이 다를 것 같다. 이들이 당신의 작업을 대할 때 보이는 반응은 어떤지? 똑같이 반응하지 않을 것 같다.
인쇄 자체가 상당히 미스터리 한 부분이 있다. 세대가 다르고 세월이 지났지만 CMYK의 작용은 여전하다.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그 지점이 흥미로운 지점이라고 생각한다.
가장 많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했던 디자인 작업이 무엇인지 궁금하다. 그리고 얼마나 많은 수의 이들이 그 디자인을 접했는지도 궁금하다.
네덜란드 전화 카드 디자인이 그렇지 않을까 싶다. 굉장히 많이 생산을 했던걸 꼽는다면. 네덜란드 길거리에서도 심심찮게 보곤 했으니까. 기념주화의 경우에는 기념품이었기 때문에 수집가를 위했을 수는 있어도 전화카드만큼 많이 쓰이진 않았을 것 같다. 유로 화폐 디자인에 참여했던 적이 있는데 공모에서 당선되진 않았다.
시간, 체력 관리는 어떻게 하는가? 하루 또는 계절의 루틴이 있는지 궁금하다.
나는 워커홀릭이다. 인쇄에 대한 실험이 나에게는 명상과도 같다. 그저 기쁘게 일할 뿐이다. 나를 도와주는 가족과 학생들에게도 도움을 많이 받고 있다.
그래픽 디자인이라는 분야가 확립되기도 전에 그래픽 디자이너로 일하면서 들었던 불안감이 있었을 것 같다. 요즘 세대 젊은이들의 불안과 비슷할 것 같다. 어떤 식으로 자신에게 믿음을 가졌는지?
그때 했어야 했는데 하지 못했던 걸 아직도 후회한다. 생각만 하는 것은 그만하고 행동했으면 한다. 일단 저지르는 것이 중요하다. 무엇을 잘하는지, 무엇을 하고 싶은지 고민했으면 한다.
거진 두 시간 가까이 진행되었던 아티스트 토크에 카렐과 게스트 질문자분들, 그리고 객석의 청중들도 꽤나 지쳤기에, 행사는 적당한 때에 마무리되었다. 아티스트 토크가 끝난 이후에도 카렐 마르턴스 할아버지는 자신의 팬들과 사진도 찍고, 그의 작업이 실린 책자를 가져온 디자이너들에게 사인을 해주기도 했다. 그의 대표적인 작품집이었던 Printed Matter(앞서 말한 '인쇄물')를 들고 온 사람들도 많았다.
본전시를 보기 전에 아티스트 토크를 들었던 터라, 토크를 다 듣고 나서 본전시를 보러 전시장으로 향했다. 아티스트 토크에서 듣고 볼 수 있었던 시계 소리들도 있었고, 사람들이 가져왔었던 Printed Matter도 전시 중에서 볼 수 있었다. 전시는 광장의 아이콘 뷰어를 시작으로 1 오아서 - 2 모노그래프 - 3 그의 상업적 프로젝트들 순으로 진행되었다. 의외로 플랫폼 엘은 기대했던 것보다는 크지 않은 갤러리였고. 때문인지, 전체적으로 카렐 마르턴스 디자인의 세계를 심도 있게 다루려고 노력한 흔적은 보였으나 네덜란드에서 건너온 그의 첫 국내 개인전이라는 타이틀에는 조금 못 미치는 전시라는 인상이 있었다. 갤러리의 규모가 조금만 더 크고, 카렐이라는 사람의 디자인 세계를 좀 더 색다르게 전개했더라면 어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물론 나는 전문적인 전시 기획자도 아니고, 해봤자 디자인 전시를 몇 번 보러 다닌 적이 다인 사람이다. 그냥 어렴풋한 느낌을 말하자면 그런 아쉬움이 있었다.
아티스트 토크 또한 동시통역이 아닌 교차 통역이라 시간적인 제약이 굉장히 컸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에게서 그의 디자인에 대한 이야기, 그의 전시에 대한 도슨트를 그에게서 직접 듣는 듯힌 느낌이었어서, 아티스트 토크에 대한 인상은 좋았다. 무엇보다.. 뭐랄까 카렐은 아티스트 토크 도중에도 가만히 앉아서 주어진 질문에 답변하는 작가가 아니었다. 적극적으로 통역사의 말 한마디 한마디를 놓치지 않으려 하고, 질문에 대해 적극적으로, 최대한 정성껏 대답하는 그의 모습이 좋았다. SNS 상에서 많은 사람들이 카렐 마르턴스를 이야기할 때 디자인에 대한 사랑, 박애를 이야기하는지 알 수 있는 모습이었다. 뒤로 비치는 프로젝션의 이미지를 정확히 보려고 일어나서 돌아다니기도 하고... 대답을 하다 안경을 썼다 벗으며, 컴퓨터를 조작하고 원하는 이미지를 띄우고... 곧 80세가 다돼가는 지긋한 어르신께서 그렇게 부산스럽게 움직이시며 디자인을 이야기하는 모습은 멀리 객석에서 지켜보던 나조차도 상당히 고무되는 장면이었다.
마지막 청중들에게 몇 가지 질문을 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을 때, 속으로 할까 말까 했던 질문이 있었다. 눈치를 보다가 결국 질문은 하지 못했다. 다른 사람보다 앞서 손을 들거나, 정말 마지막으로 궁금한 게 있다고 사정사정하거나, 토크가 끝나고 안 되는 영어로도 물어볼 수 있었던 질문이었다. 그런 방법들을 떠올리니 정작 그때 이 질문을 못한 것이 속이 쓰리다. 그때 내 질문을 정리하자면 이런 내용이었을 것이다.
삶에 있어서 오랜 세월을 쉬지 않고 작업해 오셨습니다. 여기에 있는 대다수의 당신보다 젊은 청중들이 당신처럼 오랫동안 이 디자인이란 업을 꾸준히 할 수 있으려면 디자이너로서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까요?
문득 이렇게 질문을 정리하고 보니 질문하지 않기를 잘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당신의 긴 세월을 함부로 가져온 것이 조금 사적이게 느껴질 수 도 있는 것 같고, 또 왠지 질문이 너무 포괄적이고, 어디선가 했을 법하기도 해서 너무나 뻔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왠지 카렐 마르턴스라면 또 그만의 방식으로 그만의 태도를 이야기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 때는, 그저 그런 생각 자체가 들만한 사람의 세계를 엿볼 수 있었다는 사실에 굉장히 만족하게 되는 것이다.
지금 어디에선가... 아마도 네덜란드나 주변 나라에서 자기 작업을 하거나 학생들을 가르치고 계실 것이다. 그런 그가 걸어갔던 길을 바라보며 나는 또 나의 길을 모색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막막한 이 길도 조금 위안받는 느낌이다.
그날의 카렐 마르텐스처럼 나도 즐겁게 디자인을 대할 날이 많아졌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