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되고 싶었던 디자이너. 그리고 지금은.
유명한 디자이너가 되고 싶었던 때가 있었다. 저명한 잡지나 웹진에 이름을 올릴만한 디자이너가 되고 싶었다. 사실 그 마음은 지금도 그렇다. 내 마음 깊은 곳에선 아직도 그런 꿈이 있다. 그 꿈을 이루면 정녕 내가 만족을 하고 행복할 수 있을지 나도 잘 모르겠지만.
맘이 맞는(그렇다고 추측하던) 사람들과 같이 팀을 이뤄서 뭔가 해보겠다고 한 적이 대학 2, 3학년 때, 그리고 휴학했을 때에 좀 있었다. 어중이떠중이들끼리 몇 차례 뭔가 해보려다가 헤어지기를 수차례, 그러고 나서 마지막으로 곰곰이 생각하다가 나의 명함을 만들었던 적이 있다. 마지막으로 혼자 뭔가를 해보고 싶었나 보다. 다 집어치우고, '디자이너 이재헌'으로 정말 되든 안되든 해보자는 생각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결과는 뻔했다. 팀을 이뤄 백방으로 일을 찾던 때처럼 막무가내로 아무 데나 들어가서 이런 일한다고 설명하고 명함 뿌리고, 인맥을 찾고 찾아 일거리 좀 달라고 부탁하고... 그때처럼 오버하는 제스처까지 취해가면서 일거리를 따오고 싶진 않았다. 앞서 팀, 공동체를 이뤄했던 일들에서 그런 식으로 가져온 일들이 좀 있었는데... 들였던 노력에 비해서 우리가 얻는 수익이 너무나 적었다. 당시 나의 디자인 실력이 어떻게 되는 수준 또한 아니었고. 그래서 이번에 명함을 만들어 조금씩 뿌리며 다짐했던 생각은 '적당히'였다. 적당히 폐 끼치지 않는 선에서 명함 드리고 마는 수준에서 그쳤다.
애를 쓰지 않아서 몸이나 마음은 편했지만, 일은 열심히 애쓰던 때보다 확실히 덜 들어왔다. 그러나 그때도 기분 좋은 일은 없었던걸 생각하면 그냥 없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어쩌다 연락처로 알음알음 알게 되어 작은 일이 들어올 때도 있었는데. 밤을 새워 일해야 했던 것에 비하면 페이가 적었다. 전체적인 상황은 변하지 않는 것이다. 열심히 영업하여 디자인일을 따내서 적은 페이라도 일을 하든, 소극적으로 가만히 있다가 거의 아무것도 안 하든, 똑같이 좋은 일/적당한 페이를 받을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대학에 입학해서 꿈꾸던 디자이너들의 모습을 떠올리며 도전하려고 했던 그 시절들을 돌이켜보면, 나의 역량이 많이 부족했다는 걸 지금에서야 깨닫는다. 마지막으로 명함을 만들어 프리랜서의 꿈을 마지막으로 이뤄보려 했던 때는... 마지막으로 했던 공동체에서 어느 정도 개인작업을 통해 나름의 실력이나 포트폴리오 등을 조금이라도 다듬어 놓은 상태였다. 놀랍게도 시간이 지나 그때 했던 개인작업들이 꽤나 괜찮은 수상 소식을 가져오기도 했다. 지금와서는 그 경력 덕분에 지금의 회사에 들어올 수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들고. 수상했던 경험이 나라는 디자이너의 자존감을 세우는 데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그런 수상경력 또한 수주의 경우로 이어지진 않았다. 상을 타면 나아지지 않을까 하고 막연히 추측했는데, 이런 것들 역시 나의 디자이너로서의 독립을 보장해주진 않더라.
그 후로 뭔가 체념했달까. 적당히 포기하는 것에 대하여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소집해제를 하고 나서 학교에서의 마지막 한 해를 보내게 되었다. 복학했는데 4학년. 나라는 사람이 주변 후배들과의 친분을 쌓기엔 모자란 시간이었고, 적당히 잘 지내는 정도로 마지막 졸업 때까지 지냈던 것 같다. 그리고 졸업작품은, 당시 내가 가장 관심 있었고, 많이 해보고 싶었던 독서, 책을 주제로 꾸려나갔다. 중고서점 원 없이 찾아다녔고, 원 없이 책을 샀으며, 원 없이 책을 읽었다. 거기에 대한 그래픽 디자인, 편집 디자인도 적당한 선에서 할 수 있는 것을 다양하게 해봤다. 20대가 되고 나서 몇 안 되는 마음이 평화로우면서도 나름 하고 싶은 일들을 통해 재미있게 보냈던 한 해가 바로 2017년 27살의 해였던 것 같다.
그리고 다음 해에 바로 취직. 올해도 꽤나 나쁘지 않은 삶을 살고 있는 것 같다만.
왜 저명한 디자이너가 되고 싶었느냐고 묻는다면 나도 명확히 대답하긴 힘들다. 어릴 때는 명예가 좋다고, 그런 소름 돋는 단어들을 말하기도 했는데. 그냥 내가 있는 분야에서 인정받으면 어느 정도 다들 날 좋아해 줄 거라고 생각했다. 내가 좋아하는 분야의 사람들끼리 같이 어울려 놀고 싶었던 것 같다. 나도 잘난 사람들 곁에서 거들먹거리고 싶었다... 꿈이 있다는 것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왜 그런 꿈에 다가가려고 하는지, 그 꿈을 이루면 정녕 행복한 건지는 그 길을 계속 걸어가면서 끊임없이 고민해보아야 하는 주제이다. 한 번밖에 살지 못하는 삶, 이제와 서야 요령을 터득한 것이 참 안타깝지만. 이 조건은 누구에게나 다 똑같다는 점이 그나마 위안이 된다.
내가 고질적으로 갖고 있던 우울은 사실 앞서 이야기한 팀원/구성원들 간의 불화와 헤어짐에 대한 스트레스가 대부분이었다. 다행히 그 일들이 벌어지고 시간이 길게는 5년에서 짧게는 3년 정도 흘렀다. 아프고 괴로울 때는 어떤 위로의 말을 듣든 다 거짓말 같았는데. 이제 와서 떠올려보니, 사람에 대한 아픔은 많이 가라앉고, 내가 이루지 못한 꿈에 대한 슬픔만 자그마하게 남아있는 것이다.
최근에는 목적화된 행복보다는, 행복 그 자체에 대하여 생각하려는 노력을 많이 한다. 나는 어떨 때 가장 행복한가. 무엇을 할 때 행복한가. 내가 무언가를 했을 때 다른 사람들이 좋아해서 행복해지는 것이 아닌, 내가 행할 때 스스로 진정으로 행복하다고 느끼는 그것들이 무엇인지 찾으려고 노력한다. 이게 말은 쉽지, 이미 외부에서 행복을 찾으려 했던 나의 관성을 극복하기가 좀 힘들었다. 그 노력을 다분히 한 결과, 이제야 내가 무얼 할 때 행복한지 말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나의 디자인을 할 때 행복하다.
버스에 가만히 앉아 적당한 햇살을 맞을 때 행복하다.
분위기에 어울리는 노래를 들을 수 있을 때 행복하다.
오래도록 바라던 맥북을 한 푼 두 푼 모아 사게 되었을 때 행복하다.
좋든 싫든 날 찾아주는 친구들의 연락을 받을 때 행복하다.
긴 통근길을 지나 우리 집 현관문에 도달했을 때 행복하다.
일을 마치고 혼자 맥주 한잔 할 수 있을 때 행복하다.
기계식 키보드를 타건하며 나의 이야기를 글로 남길 때 행복하다.
행복에 대해서 생각할 때 행복하다.
앞으로 점점 더 행복해질 수 있겠다는 희망이 생길 때, 나는 분명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