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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꿀 Jan 05. 2019

다시 초심으로

'어정쩡하게 흉내 내려고 하면 티가 나요.'

그냥 쓱 한번 보고 '이게 되겠냐' 하고 던지고 가는 식의 피드백을 많이 받았던 것 같다. 주변에 친절한 사람들이 별로 없었다. 그러다가 이 정도로 정성을 들인 피드백이라고 해야 할까... 정성보다도, 굉장히 친절한 피드백을 받고 꽤나 놀랐다. 그는 내가 대학생 2학년 시절 같이 했던 전시를 통해 조금이나마 알게 된 사람이었다. 그때 그의 나이도 그리 많은 편은 아니었을 것이다. 아마 많아봤자 지금 내 나이보다 두어 살 어리지 않았을까 싶다. 그러나 어쨌든 지금은 사회경험도 나보다 풍부한... 어떤 회사의 선임 디자이너 정도는 될 것이다. 내 나이가 요번에 해가 바뀌어서 스물아홉. 그분을 처음 뵈었을 때, 그의 나이가 아마 지금 내 나이보다 어렸을 것이다. 참 많은 시간이 흘렀고, 참 많은 시간을 허투루 썼다는 것이 느껴졌다. 이끌어주는 사람 없이 좌충우돌 시행착오란 착오는 다했던 듯하다. 부딪혀가며 겨우겨우 쌓아 올린 어떤 것을 뿌듯해하며 보다가, 어느 순간 다른 이들이 이룬 것이 보이고, 다시 내가 쌓아 올린 것은 정말 거칠고 투박한 어떤 무언가로 밖에 안 보이는 때에 다다랐다고나 할까. 


그분이 현재 재직 중인 어떤 웹 에이전시 회사에 지원을 했다. 대표 분이 여러 디자인 콘퍼런스 등에서 활약하고 계셨고, 그분께 회사에 대한 정보를 얻기 쉬울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분이 다닐만한 회사라면 꽤나 괜찮은 직장이 아닐까 하는 추측도 하긴 했다. 그래서 지원하기 전부터 이 분에게 회사의 여러 가지를 물어봐 놓은 상태였다. 그렇게 알게 된 몇 가지들을 힌트라고 생각하며 새로운 마음으로 포트폴리오를 다시 만들고, 자기소개서도 다시 썼다. 지금에서야 생각해보길, 그리 큰 무언가가 달라지지 않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떨어지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탈락. 


'여러 가지 사정 상 아쉽게도 같이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다른 곳에서 디자이너로서 더 멋진 모습으로 만나길 바라겠습니다.' 정도의 정중한 거절 메일을 몇 번째 받는 것인지. 사실 서류 탈락자에게 이 정도 메일을 꼬박꼬박 보내주는 회사 자체도 정말 몇 없지만 말이다. 내 메일함에 간간이 보이는 따스한 거절의 메시지들을 보며 대충 내가 얼마나 차디찬 바닥에 떨어져 있는지를 현실성 있게 체감할 수 있었다. 당찬 포부를 가지고 시작했던 이직의 꿈은 시도의 횟수만 많아질 뿐 뭔가 뚜렷하게 다가오는 것 없이 그저 반복적으로 '지원하기' 버튼만 눌러대는 느낌이었다. 그러던 와중 이런 말을 듣게 되는 것이다.  


'어정쩡하게 흉내 내려고 하면 티가 나요.'


탈락의 고배를 마신 뒤에 나는 잠시 고민을 하다, 내가 떨어진 회사에 다니는 그분께, 내부적으로 나를 어떻게 평가했는지, 모자란 부분이 무엇이며, 앞으로 어떻게 보완해나가면 좋을 지에 대하여 여쭤보았다. 그러던 와중에 저런 말을 들을 수 있었다. '어정쩡한 흉내'. 여태까지 나의 디자인에 대한 여러 조언들 중, 가장 쉽고 정확하게 나의 문제점을 꿰뚫는 비평이었다. 말로 뼈를 때릴 수 있어서  맞게 된다면 이런 느낌일까. 


... 포트폴리오 패키지의 완성도가 아쉽다... 들여다봤을 때 이 사람이 어떤 작업 성향이나 스타일이 보이는지 명확하게 한가닥이라도 보여야 하는데 그런 것이 약하다... 포트폴리오를 많이 만들고 다듬지 않았다는 느낌이 든다. 더 시행착오를 해야 한다... 포트폴리오의 형식은 안정적인 편이 좋다. 가장 안정적이고 무난한 형식에서 자기 작업이 돋보이는 식으로 가야 한다... 포트폴리오 자체가 대단하고 실험적이면서도 내용물인 작업까지 부각할 수 있을 정도의 경지는 정말 뛰어난 시니어 디자이너 급이 아니면 보여주기 힘들다... 어정쩡하게 흉내 내려고 하면 티가 난다... 시행착오를 많이 해보고 많이 겪어나가길 바란다...


대학을 졸업하고 난 뒤 겨우겨우 제대로 들은, 정확하면서도 굉장히 섬세하달까, 정말 친절한 조언이었다. 다 듣고 난 뒤에 정말 감사하다고 말씀드렸다. 


솔직히 포폴 다 만들어놓고 '멋있다'라고 생각했었는데. 좀 모자라도, '역시 난 잘해'라고 생각했었는데. 단순히 자기만족을 넘어 자만하고 있지 않았을까. '디자인 잘하는 나'에 대한 환상이 어느새 다시 자라나 있었다. 


디자인을 한창 공부할 때, 정말 가지고 있는 능력... 무기라고 할만한 것이 없을 때, 애써 웃으며 '그래도 저는 제 가능성을 믿습니다'라고 없는 허세 쥐어짜며 말했던 것이 생각났다. 왜 그때가 지금 생각났을까. 해묵은 초심 클리셰. 그러나 어김없이 이런 상황에선 강력한 한방을 선사한다. 쓴웃음을 짓다가 결국 다시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마음 가짐과 자세는 차라리 그때가 낫지 않았을까.' 


누군가는 '다 때가 있다'라고 했다. 나의 여러 '때'들. 어떤 한순간이 지나갔고, 어떤 또 다른 순간들이 이제 오고 있는 듯하다. 


그 순간을 다음번에는 멋지게 쟁취할 수 있길 바라며. 다시 갈고닦아야 할 시간이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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