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20대를 함께했던 디자인.
2019년의 해가 밝았다. 어느덧 나에게도 스물아홉이라는, 서른이라는 나이에서 고작 한해 모자란 때가 오고야 말았다. 스물일곱, 여덟 까지는 괜찮았던 것 같은데. 아홉이라는 숫자는 정말 아득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설 명절 즈음해서 나를 돌아보는 시간을 좀 가지게 되었다. 나의 20대는 어떠하였는가.
아프고 괴롭고 방황하던 시절이 10대에 이어서 시작되었지만, 정말 많은 여러 가지를 배울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고 생각한다. 나에게 고통을 주던 이들까지 오롯이 인정하고 용서하기는 아직까지도 힘들다. 그것에 대한 어떤 보상이 있어야겠다고 생각한 적도 있어서, 그들을 저주하거나, 왜 나는 이렇게 됐느냐고 주변 사람들을 붙잡고 고함을 치기도 했지만. 그런 태도는 미래를 준비하기에, 현재를 살아나가기에 적절하지 못한 태도였다는 것 한 가지는 확실히 인지할 수 있었다. 결국 시간에 맡기고, 그만큼 흘러가는 시간에 충실하면 되는 것이었다. 다행히 20대 초반의 어려움은 그렇게 극복 가능한 듯했다.
그리고 그 이후, 지금은 많이 희미해진 '디자인'에 참 많은 비중을 두고 살았다. 23살 때. 유망한 그래픽 디자이너였던 그의 수업을 듣고 이끌리듯이, 넘치는 자신감을 가지고 혼자 습작을 만들어나갔다. 잘 되지 않았던 시기가 길었으나, 소소한(정말로 소소한) 수상 실적들을 얻으며, 나름 크게 감동했고. 그러다 졸업 즈음에 와서는 어느덧 체념하게 되었다. 떠오르는 스타 디자이너가 되고 싶었으나, 그 운은 나에게 닿지 않음을 인정해야 하는 순간이 있었다.
그래서 졸업전시회를 마무리하는 동시에 취업을 하며 자연스럽게 그래픽 디자인에 대해 느꼈던 재미와 열정은 희미해져 버렸다. 그때가 스물일곱. 그 한해 졸업전시회 때부터 살풀이하듯 '하고 싶은 것은 다 해봤다'라는 자세를 취하며 타협을 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그다음 해에는 지금 회사에 취업. '적당히'의 시작이었다. 적당한 장식 위주의 디자인에 익숙해졌고, 적당한 때에 적당히 들어오는 월급도 참 좋았다. 어디에선가 잘 나가는 디자이너들의 눈이 번쩍 뜨이는 작업이나, 이름만 들으면 알정도의 기업에서 자신의 역할을 훌륭히 수행하는 어떤 디자이너들의 이야기 같은 것들을 조금씩 들려오긴 했지만. 적당히 일하고 적당히 받던 나에게 그들처럼 뭔가 대단한 것을 움켜쥐어보겠다는 가슴속 벅찬 무엇은 이미 많이 사라진 상태였다.
그러다 퍼뜩 정신 차려보니. 스물아홉. 29라는 숫자가 이리도 아프게 다가오는 것은 앞선 권태로움 때문인가.
고민을 했다. 이제 정말 과거에 쫒던 것들은 지금의 나에게 아무 상관없는 것인가? 졸업전시회 때처럼 '도전이라도 실컷 해봤으니 됐다'라는 넋두리로 쉬이 정리되는 것이었는가.
그러다 최근에 의외의 제안과 사건들이 있었고. 그제야 어쩌면 이제 디자인을 취미 정도로 밖에 못할 수 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에는 이제는 취미여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또 적당히 흘러가는 줄 알았다. 그러다 문득, 디자인이 아닌 일에 대해 듣고, 이해하고, 준비를 하던 참에서야 디자인이 아닌 일은 정말 재미없구나, 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제야 업으로서 디자인을 그만둔다는 것에 대해 제대로 된 실감이 나는 것이다.
결국 최근의 흐름은 나를 원점으로 돌아오게 만들었다.
최근에는 나가던 독서모임에서 버킷리스트를 작성해보는 활동을 했다. 그때는 지각을 해서 제대로 성찰할 시간도 없었고, 급히 대충 써야 해서 다른 참여자들의 버킷리스트를 듣는데 집중을 했다. 각각의 개개인들의 소원, 꿈 따위를 듣다 보니, 나도 제대로 써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20대에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던 것들을 모두 적어봐야겠다. 내가 정녕 하고 싶던 것은 무엇이었는지.
누군가는 다 '때'가 있다고 하던데. 그 '때'를 놓치기 전에 서둘러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