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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꿀 Sep 06. 2018

인쇄소

항상 겁나 죽을 것 같은 인쇄소.

대학 시절, 항상 인쇄소는 뭐랄까, 미지의 세계와 같은 곳이었다. 이 말이 무슨 말인지 디자인학도였다면 누구나 다 알 것이다. 디자이너인 내가 설계도를 잘 짜 놓으면 그대로 제작을 해주는 곳이 인쇄소인데.... 학생 시절 적당한 인쇄소 찾으러 엄한 곳도 가보고, 가봤던 인쇄소에서 모른다고 타박도 들어가며 깨달았던 것은 디자인 외적으로도 배워야 할 것이 많다는 것이었다. 그런 던전 같은 느낌이 나는 곳이 을지로/충무로의 인쇄소였다.


처음 그래픽 디자인 수업을 들으며, 과제 때문에 처음으로 갔던 인쇄소는 참 친절하지 못한 곳이었다. 여느 인쇄소 사장님, 직원들이 그렇듯 특유의 툭툭 던지는 말투는 몇 년이 지난 지금 가보아도 똑같을 것이다. 인쇄를 해야 할 과제를 내주시던 교수님께서도 인쇄소 갈 땐 한 손에 음료수라도 좀 들고 가서 여러 가지 잘 들어보라고 하셨던 기억이 난다. 물론 음료수를 건네는 등의 방식을 요즘 들어서 하는 사람은 잘 없을 것이다. 그때 그 수업을 가르치시던 교수님께서 나이가 좀 있으셨던 것으로 기억을 하고 있다.


왜 갑자기 인쇄소가 어쩌고 하며 이야기를 꺼냈느냐면, 오늘 회사에 소속된 디자이너로 처음으로 혼자 인쇄소에 갔다 온 날이기 때문이다. 내 성격상(...), 소심한 나는 뭔가 하던 일이 아닌 다른 종류의 일을 다루게 되면 상당히 긴장을 하는 편이다. 인쇄소 찾아가기 전, 내가 이야기하고 체크해야 할 사항으로 무엇이 있는지 정확히 몇 번이나 되뇌면서 확인을 하고, 그다음, 종류별로 부수가 정리되어있는 이메일의 내용을 추려서 인쇄한 것(이것도 여분으로 몇 부는 더 출력해 갔다)을 챙겨서 비장한 마음으로 아래층의 인쇄소로 내려갔다. 다행히 내가 마주한 인쇄소 직원은 비교적 친절한 분이셨고, 나는 내가 유에스비에 담아온 파일들을 보며 일일이 설명하고, 정해진 부수를 알려주고, 종이 두께와 후가공을 알려드리고, 견적을 요청하고(사실 인쇄 시작도 안 했고, 단순히 견적 떼러 간 것이었다), 내 연락처를 알려주고 나왔다. 이 일련의 과정들 동안, 나를 상대하는 직원의 옆의 직원이 뭐 저리 하나하나 구구절절이 조바심이 나서 설명하나 싶었는지 피식하고 웃는 게 보였다. 그러나 어쩌랴. 내 성격이 이런 걸. 뭔가 디자인이나, 인쇄소와 이야기하는 과정 중에 오해가 생겨 사고로 비용을 다 날리느니, 몇 번이든 신중하게 자세히 설명하고 체크하는 겁쟁이가 차라리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음. 지금 그때 열심히 설명하던 나를 떠올려봐도 좀 쪽팔리고 웃긴 내 모습이 떠오르는 것 같지만, 분명히 사고가 나는 것보다는 낫겠다는 생각은 변함이 없다.


그렇게 잘 알려주고 나온 뒤에, 한 시간도 체 안돼서 메일로 금방 견적을 받아 볼 수 있었다. 그 이후 견적서 내용을 꼼꼼히 체크했다. 내가 설명했던 것들 중에 빠진 사항은 없어 보였다. 이번에 처음으로 도무송(복잡한 칼선)을 해볼 수 있어서 뭔가 또 새로운 시도가 되지 않을까 싶다. 학생 때는 이런 것들을 다 조율하는 것도 디자이너가 하는 줄 알았는데... 나중에 알게 된 사실로는, 인쇄소들끼리도 중간 업체가 있고, 대량생산과 복잡한 후가공을 전문으로 하는 큰 인쇄소가 따로 있는 것이었다. 중간 업체들은 주로 출력을 직접 하는 편이라, 대학생 과제나, 디자인을 잘 모르는 사람 또는 나 같은 인쇄 잘 모르는 디자이너들에게 일을 받아 단순 인쇄뿐 아니라, 제작 요구사항을 다 듣고 결과물을 잘 컨트롤하는 것이 중간업체 위치의 인쇄소가 하는 일이었던 것이다. 학생 때는 잘 몰라서, 무조건 제작비를 아껴야 하니, 어엿한 디자이너가 되려면 복잡한 인쇄과정을 빨리 다 배워야겠다는 막연한 초조함이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취업을 해보니 웬걸. 어차피 내가 소속된 회사에서 비용을 다 치르게 되므로, 좀 비용이 나가더라도 안전하게 중간 인쇄소에 전체적인 제작 감독 일을 맡기고 나면 디자이너의 일은 끝이 나는 것이었다. 뭐랄까, 김이 빠지긴 했지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디자이너가 다른 분야의 일들을 잘 알면 굉장히 좋겠지만, 디자인 분야만 잘하면 굳이 다른 것들이야 상관이 있나... 하는.


아무튼 오늘은 인쇄소에서 쩔쩔매던 나의 모습을 오래간만에 다시 발견할 수 있었던 날이다. 덕분에 아주 오랜만에 그 시절 풋풋했던 기억들이 생각나서 좋았다. 물론, 너무 쫄보스러운 나의 성격은 좀.. 차차 고쳐보자는 다짐은 한다. 그게 힘들다면 최소한 '인쇄 공포증'은 반드시 탈출해야겠다. 인쇄소 갈 때마다 이렇게 진이 다 빠지면 곤란하니까. 그래도 오늘은 주어진 일을 대부분 깔끔하게 끝낸 편이었다. 일찍 자고, 내일 또 열심히 일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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