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도의 힘 빼기 기술
가끔은 태어나서 한 번도 상상해 본 적 없는 일이 삶으로 들이닥치곤 한다.
사람은 어쩌면 이렇게 낯선 대상에, 한순간 강력히 끌릴 수 있을까?
어릴 때 이연걸이 나온 영화를 한 번 보았을 뿐, 어떤 무술 또는 비슷한 운동에 전혀 관심이 없던 내가 무려 태극권을 배우게 됐다.
올여름 휴가도 못 갔으니 하루쯤 쉬러 가면 좋지 않을까 하고 집 떠나 명상할 수 있는 숙소를 찾던 중. 문득 서울의 한 선원에서 운영하는 프로그램이 눈에 들어왔다.
영상에서 보이는 한 스님의 차분하며 느리고 유연한 움직임을 보자마자 충격.
‘와. 멋있다. 꼭 해보고 싶어...!'
마침 추석 전날 음식 준비할 생각에 답답했던 나날이라, 차례 지내고 바로 가자고 마음먹고 예약까지 완료.
아니나 다를까, 하루 전 늦은 밤까지 전을 부친 이번 명절은 평소보다 더욱 벅찼다. 다음날 도망치듯 달려간 서울의 홍대입구역-
'이렇게 에너지가 넘치는 곳이었나?‘
어딜 가나 텅텅 비어 보이는 평택과 달리 곳곳에 보이는 사람들이 도시에 생기를 불어넣고 있었다.
명절이어서인지 외국인도 많이 보이고 쉬는 가게가 많아 길이 혼잡하지 않다. 무표정하고 바쁜 사람이 넘쳐나는 도시가 싫어 시골로 이사한 지 3년이 훌쩍 지났는데, 오랜만에 다시 와보니 대도시만의 활기찬 매력에 여행온 듯 마음이 밝아졌다.
1시간 정도 일찍 도착해서 수업 주소지(별관) 근처를 혼자 돌다가 숙소가 있는 본관으로 들어갔다. 티텐더 님께서 선뜻 '차 한 잔 하시겠어요?' 하며 내어주신 보이차. 홀짝홀짝 몇 잔이나 마시던 중 영상에서 본 태극권 스님이 들어오셨고, 떨리는 마음을 숨긴 채 차담을 나누다 별관으로 향했다.
세상에서 이유 없는 만남이 있을까.
태극권이 몸의 전체 신경을 활성화시키고, 고관절에 도움이 되며 나중에는 결가부좌도 할 수 있게 될 거라는 말씀을 하셨다. 약 2년 동안 명상할 때마다 자세의 아쉬움을 떨치지 못하고 있는데, 어쩜 이렇게 꼭 필요한 레슨을 만나게 된 건지 놀라울 따름.
시원한 스트레칭 후 본격적인 기초 연습이 이루어졌다. 기수세(기세+수세)와 운수(雲手).
그날 함께 수업에 참여한 다른 분과 마주 서서 서로를 밀치며 버티는 게임도 했는데, 상대의 공격 의도를 간파하자마자 순식간에 힘을 빼면 오히려 제압할 수 있다는 원리를 담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 내게 욕을 하고 뺨을 때려도 내가 거기에 맞서 똑같이 하지 않고 그것을 흘려보내거나 웃어넘기면, 멋쩍게 되는 건 상대방인 것처럼. 실제로 스님은 아무리 밀어도 밀 수가(?) 없다.
“힘을 빼요!”
1시간 수업은 짧은 것 같았지만 마치고 명상과 차담시간이 더해지니 만찬이었다. 고요한 장소에서 누군가와 함께 명상하는 행복을 누릴 일이 흔하지 않다는 걸 수행자들은 안다. 그것도 하루에 8-10시간씩 참선하는 명상 전문가 스님과 나란히 앉아 눈 감는 기회는. 함께하는 명상은 그 자체만으로 더 큰 에너지를 공유할 수 있어 서로에게 유익하다.
차담 역시 마찬가지. 명상에 관심 있는 이와 차를 마실 기회가 일상에서는 드물다. 본관에 가니 처음 들어갔을 때 차를 내려주신 분과 다른 티텐더님이 계셔서, 그분과 스님 그리고 나 이렇게 셋이서 오래도록 해보고 싶었던 종류의 질문과 대화를 나눴다. K-며느리의 명절 상념으로 막힌 기운은 뻥 뚫리고.
평택으로 돌아오는 길은 거의 3시간이 걸렸지만 오는 길 내내 헤죽거리며 수업을 회상하기 바빴던 날. 곧 다시 가겠구나 하는 기분 좋은 예감과 함께.
* {참조} 스님의 태극권 영상 주소
https://www.instagram.com/p/C5WuTG5BPTb/?igsh=dzJzM29lb3Btd3p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