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작은 종말
2.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다시 읽음)
3. 아무튼, 게스트하우스
4. 선방일기
1. 작은 종말 - 정보라
- 자신들이 잘 모르고 알고 싶지 않은 일은 전부 죄악이라 외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앞을 가로막는다.
- 시간에는 이전과 이후만 있을 뿐 일직선상의 일방향적 흐름은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강을 만나기 이전의 모든 시간에 존재하고 또한 강을 만난 모든 사건에 존재한다. 강을 만난 이후는 없다. 나에게 미래는 존재하지 않는다.
- 여성 선수들은 긴 머리를 하나로 묶어 등 뒤로 늘어뜨렸고, 호리호리하고 단단하고 인정사정없이 아름답고 사나웠다. '보통'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성별 이분법에 의거한 성역할이란 납작하기 짝이 없다.
- 장애인권 활동가들은 세상에서 가장 강하고 멋지다. 나는 마음속으로 혼자서만 그들을 동지로 여긴다.
- 무성애. 무연정 스펙트럼 안에도 수많은 정체성이 있다. 연애감정을 느끼지 않는 에이로맨틱, 타인에게 성적 끌림을 느끼지 않는 에이섹슈얼, 깊은 감정적 유대감을 가져야만 성적 끌림 혹은 연애감정을 느끼는 데미섹슈얼/데미로맨틱, 반대로 잘 모르는 사람에게만 성적 끌림 혹은 연애감정을 느끼는 프레이섹슈얼/프레이로맨틱, 그리고 유성애와 무성애 사이에 있는 그레이섹슈얼/그레이로맨틱, 지향성이 변동하는 에이스플럭스 등등. 에이스플럭스는 무성애 스펙트럼 안에서 변동을 경험할 수도 있고 끌림 자체의 유무가 변동할 수도 있다. 무성애는 해탈한 돌덩이가 아니다. 무성애는 다이내믹하다.
- 만약 정말로 신이 있다면, 인간이 모든 색채를 가지고 모든 방향으로 향할 수 있는 존재로 만들어진 것이야말로 신의 뜻일 것이다.
- 상은 피를 쏟고 살을 자르면서까지 건조한 하나의 번호나 하나의 색깔이나 초라한 한 단어로 규정되는 법적이고 행정적인 어느 한 분류에 자신을 밀어 넣고 싶지 않았다. 상은 자르고 맞추고 꿰매어 만들 수 있는 재료나 물건이 아니라 인간이었다. 인간이고 싶었다. 그 어디에도 속할 수 없는 고립된 인간이라도 좋으니 자기 자신으로서 인간이고 싶었다.
2.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 신형철 (이어서 다시 읽음)
- 오르페우스가 뒤를 돌아보는 순간이 영감의 순간이라고 주장한다. 그의 특이한 점은 '영감'이라는 말을, 오히려 우리가 영감이라 부르는 것이 고갈된 상태를 뜻하는 말로 사용한다는 데 있다. 흔히 영감이라 오해되는 진부한 것들을 주워 모아 이것저것 써내는 데 늘 '성공'하는 시인은 가짜라는 것. 우리가 글을 쓰면서 도달하게 되는 불모의 상태, 그로 인해 도달하게 되는, 작품의 근원에 대한 사유, 그 막막함이야말로 진정한 영감이며, 그 덕분에 끊임없이 '실패'하는 시인만이 진짜라는 것. 오르페우스는 에우리디케를 이승으로 데려오는 데 실패했으나, 바로 그 실패 때문에 그는 시인으로서 성공했다는 것이다. (중략)
오르페우스 신화가 비극적인 것은 이것이 사랑하는 연인을 제 손으로 한 번 더 죽인 사람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 상실과 과실이 함께 있다. 반드시 이 둘이 함께 있어야만 '회한'이라는 감정이 만들어진다. 그리고 나는 회한이야말로 문학의 근본 감정 중 하나가 아닐까 생각한다. 내 사랑은 두 번 죽는다. 한 번은 운명에 의해서, 또 한 번은 나에 의해서. 사랑했던 사람을 두 번 죽여본 사람은 시인이 될 수 있다. 마이나스들에게 온몸 찢어져 그 회한까지 찢기기 전에는 그만둘 수 없을 것이다.
- 눈물은 눈에서 흐르지만 울음은 목구멍에서 치솟는다. 그래서 울음 참는 일을 '울음을 삼킨다'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3. 아무튼, 게스트하우스 - 장성민
- 모든 것을 자신이 선택하고 책임져야 하는 상황에서는 그 '자신'이라는 존재가 더 자주, 더 강하게 드러나기 마련. 그런 드러남은 상처가 되기도 하고 치료가 되기도 하지만 어떤 경우라도 최소한 자신을 볼 수는 있다. 그리고 진짜 여행은 거기에서 시작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4. 선방일기 - 지허스님
- 참 수행자는 자취를 구하지 않는다. 아니 그보다는 구할 것이 없기 때문에 흔적이 없다고 한 것이 맞을 것이다.
- "몸을 숨긴 것은 본래 종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허공으로 날아간 새의 흔적을 더 이상 찾지 말라."
- 고뇌의 절망적인 상황에 이르러 끝내 좌절하지 않고 고뇌할 때 비로소 기연을 체득하여 해탈하는 것이다. 극악한 고뇌의 절망적인 상황은 틀림없는 평안이다. 왜냐하면, 극악한 고뇌의 절망적인 상황은 두 번 오지 않기 때문이다. 마치 죽음을 이긴 사람에게 죽음이 문제가 되지 않는 것과 같다. 죽음은 결코 두 번 오지 않는다.
- 영원한 것은 하나도 없다. 그러나 모든 것은 영원하다. 물질의 형태에서 보면 영원성은 부정되고 물질의 본성에서 보면 영원성이 긍정된다.
- 법문이 끝나고 차담이 주어지면서 입승스님에 의해 시간표가 게시되었다.
2시 30분 기침(起寢)
3시~6시 참선(入禪및 放禪)
6시~8시 청소, 조공(朝供, 아침공양), 휴게
8시~11시 참선
11시~1시 오공(午供, 점심공양), 휴게
1시~4시 참선
4시~6시 약석(藥石, 저녁공양), 휴게
6시~9시 참선
9시 취침
* 단 망회일(妄晦日)에는 오전에 포살(戒行과 律儀)이 있음.
- 견성이라는 목표를 위해서는 처음도 자아요, 마지막도 자아다. 수단도 자아요, 목적도 자아다. 견성하지 못하고서 대아를 말함은 미망이요, 위선일 뿐이다. 철저한 자기 본위의 생활은 대인관계에 있어서 극히 비정하게 느껴진다. (중략) 진실로 이타적이기 위해서는 진실로 이기적이어야 할 뿐이다. 모순의 극한에는 조화가 있기 때문일까.
- 선객이 일 년에 소비하는 물적인 소요량은 다음과 같다.
주식비 3홉 365일 = 1,095홉(1,095홉 X15원=16,425원) * 1홉=-0.18리터, 되의 1/10
부식 및 잡곡은 자급자족
피복비
승복 광목 20마(20 마 X50원=1000원)
내복(1,500원)
신발 고무신 2족(2족 X120원=240원)
합계 2만 원이면 족하다.
- 현재의 나는 숙명의 객체이지만 운명의 주체이다. 숙명은 자기 부재의 과거가 관장했지만 운명은 자기 실재의 현재가, 그리고 자신이 관장하는 것이어서 운명을 창조하고 개조할 수 있는 소지는 운명殞命 직전까지 무한히 열려 있다.
- 중생이 사는 세상에서 시비란 가릴 수가 없다. 왜냐하면 중생이 바로 시是와 비非로 구성된 양면적인 존재니까.
- 나는 그 간사한 육체가 좋아서 다스리는 게 아니라 육체가 너무 싫어서 육체를 다스리고 있소. 육체는 바라볼 수 있는 게 아니라 느껴야 하기 때문이오. 마치 우리가 세상이 싫어서 세상을 멀리한 것이 아니라 세상이 너무 좋아서, 그래서 세상을 올바로 느끼지도 바라보지도 못할까봐 세상을 멀리 하면서도 세상을 온전히 하기 위해 견성하려고 몸부림치는 것과 같을 뿐이오.
- 부엌에서 팥이 삶아져 가자 큰방에서 좌선하고 있는 스님들의 코끝이 벌름거리더니 이내 조용히 입맛을 다시고 군침을 넘기는 소리가 어간에서나 말석에서나 똑같이 들려왔다.
- 다사多思는 정신을 죽이고 포식은 육체를 죽인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