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업실로 찾아온 인연
"안녕하세요, 보험계약대출을 신청하고 싶은데요."
고양시 일산동구의 모 부동산 앞. 갑자기 카드값이 빠졌나? 상가 임대인 아저씨에게 보내드릴 보증금이 모자랐다. 급하게 보험계약대출을 받아 송금하고 나서야 손에 쥐어진 열쇠 한 벌. 첫 베이킹 스튜디오가 생기는 순간이었다.
5년을 다닌 회사일은 거의 정리된 시기였다. 대기업 보험사에서 VIP 고객들을 만나 재무설계를 제공하고 보험 및 펀드, 증권상품을 판매하는 일. 의사, 변호사, 미술관장, 고위공무원, 대기업 임원, 예술가, 교수 등 다양한 직업군의 사람들을 만나 그들의 상황에 맞춤한 플랜을 제시하며 희열을 느낀 날도 많았다. 그러나 조직이 끊임없이 분화되고 통합되기를 반복하면서 우리 지점은 어느 날 사라져 버렸다.
알아서 새로운 지점을 찾고 다른 결의 사람들을 만나 경쟁적인 금융 환경에 적응해야 했다. 성과에 대한 보수와 책임은 요동치는 시장에서 매년 더 불리한 조건으로 갱신되었다. 늘어나는 서류만큼 불확실성과 불신이 큰 사회. 누군가의 돈과 인생을 정해진 틀에 넣고 설득하는 일이 점점 억지스레 느껴졌다.
원룸도 정리가 필요했다. 작업실로 사용할 수 있는 곳들의 보증금과 월세는 원룸의 2~3배 이상이어서 동시에 유지하는 것은 앞으로의 소득을 예상할 때 어려운 일이었다. 당분간 작업실에서 숫제 먹고 자며 지내다가 근처에 살 곳을 천천히 마련하기로 마음먹었다.
회사와 집을 정리하고 개인 스튜디오를 꾸미던 날들은 행복하고도 고생스러웠다.
새로 산 물건보다 시간의 흔적, 손때 묻은 물건을 좋아해서 마음에 드는 중고 의자부터 사 모았다. 작업실에 오는 사람이 골라 앉을 수 있도록. 직거래한 의자를 들고 지하철로 이동하면서 힘들면 의자에 앉아 쉬었다가, 괜찮아지면 일어나 다시 의자를 들고 걸었다. 흔들의자, 빈티지 의자, 앤틱 의자, 리폼한 의자 등이 작업실에 하나씩 늘어갔다. 뒷면에 '입 닥쳐!(TA GUEULE!)'라는 낙서가 있는 프랑스 학교의 오래된 의자는 지금도 매장에서 사용하고 있다.
클래스를 진행할 큰 테이블은 중고 마켓에서 오랜 시간을 들여 구했는데 그걸 옮기는 용달비가 상당하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오븐은 하나로 부족할 것 같아 엄마 것까지 빌리고, 거치대도 중고로 구했다. 큰 수납장도 필요했는데 마침 누군가 무료로 나눔하는 것이 있어 지인의 탑차를 빌려 가져오기도 했다. 뭐니 뭐니 해도 작업실 인근 치킨집에서 스테인리스 조리대를 가져온 일을 잊을 수 없다. 잘 알지도 못하는 상가 1층 도시락 가게에 부탁해 L자 카트를 빌린 다음 조리대를 싣고 가져오는데, 길에서 달그락 탈탈탈 울려 퍼지는 카트 소리가 어찌나 시끄럽던지.
계약할 때 주인 아저씨께 부탁드린 큰 싱크대가 설치되고 마지막으로 공간 분리 용도의 커튼, D.I.Y. 선반 몇 개, 옷걸이, 도어록을 달았다. 식품영업신고와 통신판매업 신고, 사업자등록을 모두 마치고 조명과 테이블 매트 등의 소품을 놓으니 구색이 갖춰졌다. 모든 물건은 직접 골라 거기에 놓인 내밀한 사연을 가지고 있었고 누구의 간섭 없이 온전한 개인의 취향이 존재하는 공간이었다.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작업할 때면 시간은 그곳에 멈춰있었다.
본격적인 베이킹 클래스를 열기 전, 재충전의 기간을 가졌다. 보고 싶은 전시를 찾아 서울에 다녀오거나 자연으로 떠나 에너지를 얻기도 했다. 24시간을 마음대로 써도 좋은 자유의 황금기였고 그런 스스로를 책임질 시간 또한 많았다. 주말뿐만 아니라 주중에도 플리마켓을 다니며 짬짬이 생활비를 벌었다.
작업실의 분리된 공간에서 옷을 갈아입거나 잠을 잘 수도 있었지만 '씻기'가 불가능했다. 몸은 사우나 또는 찜질방, 세탁물은 빨래방을 이용하고 종종 엄마 집에 가면 두 가지를 한 번에 해결했다. 겨울이라 매일 씻지 않아도 버틸 만했다. 하지만 난로와 전기매트, 텐트와 침낭까지 모두 동원해도 밤에 차가운 바닥과 건물벽 전체에서 몰려드는 한기는 해결하기 어려웠다. 불이 꺼지면 아무도 없는 상가 한편에서 겪는 두려움도. 가끔은 술에 취한 누군가 소리를 지르거나, 건물 내 가게들의 문을 쾅쾅 걷어차며 다니기도 했다.
혼자 지낸다는 것은 편하지만 외로운 일이다. 고향을 떠나 스무 살부터 독립해 10여 년간 다양한 경험을 쌓고, 혼자 해외여행을 다녀오면서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은 있었다. 많은 사람을 만났지만 그럴수록 다수의 피상적인 관계보다는 우주적으로 통하는 한 사람이 그리웠다. 일찍부터 사랑을 갈구했지만 정신적이고 영적인 유대를 가질 수 있는 사람은 나타나지 않았다. 시대를 잘못 타고났나? 공간 선택이 잘못됐나? 내가 찾는 그 사람이 동시대에 살고 있기는 한지 의문이었다.
서로 한 발짝 떨어져 존중하면서도 연모하고, 강요하지 않으면서도 편하게 함께할 수 있는 사람. 떨어져 있어도 당신과 연결되고 당신을 통해 세상과 연결되며, 세상과 연결될 때는 자연히 당신이 생각나는 그런 사람이.
그대여 그대여 그대여 그대여 그대여
오늘은 우리 같이 걸어요 이 거리를
밤에 들려오는 자장노래 어떤가요 (oh yeah)
몰랐던 그대와 단 둘이 손 잡고
알 수 없는 이 떨림과 둘이 걸어요
어느덧 4월이 되고 매년 들려오는 <벚꽃 엔딩>이라는 노래가 곳곳에 퍼지던 주말. 서울에서 도시 농부와 푸드트럭, 먹거리 셀러들이 모이는 축제가 열렸다. 준비해 간 상품들을 테이블에 진열하고 처음 보는 푸드트럭들을 구경했다. 각자의 취향대로 개조하고 디자인한 낯선 모습의 트럭들이 모인 광경은 국내에서 보기 힘든 때였다.
따가운 햇볕이 테이블 위를 뜨겁게 달구는 플리마켓 존과 달리 푸드트럭 존은 트럭들이 서로 만들어낸 시원한 그늘이 자연스레 형성되어 있었다. 눈에 띄었던 진한 코발트블루 색상의 푸드트럭에 다가가 얼그레이 한 잔을 주문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다 마시면 리필을 해주시겠다고 했다. 음료를 다 마시고 자몽에이드 한 잔을 다시 받아와 자리에 놓았다. 그리고 잠시 화장실을 다녀왔는데...
자리로 돌아오니 음료는 사라지고 테이블 아래 땅은 흠뻑 젖어있었다. 햇빛을 가리려고 잼 위에 펼쳤던 양산도 옆으로 치워져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쏟아진 음료의 내용물은 보이지 않고 테이블 주변도 깨끗했다.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옆에 있던 셀러분이 말씀해 주셨다.
"(양산이) 바람에 움직이면서 다 쏟아졌는데 저분이 치워주고 가셨어요."
아까 갔던 푸드트럭의 사장님이 음료가 쏟아지는 걸 보시고는 와서 자리를 치우고, 닦아주신 것이었다. 처음 만난 사람의 부주의함을 목격하고 그런 일까지 해주셨다니 어찌나 민망하던지. 일부러 리필해주신 음료도 아까웠고 죄송해서 몸 둘 바를 몰랐다. 배려심 깊은 그 셰프님께 감사 인사를 하러가면서 그렇게 우리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셰프님은 그 날 내가 만든 잼들을 맛보더니 소스 개발을 도와주시면 좋겠다고 했다. 평소에는 여의도에서 장사를 하고 드라마나 영화 촬영지에 푸드 케이터링도 다닌다면서. 다음날부터 우리는 연락을 주고받았고, 셰프님은 직접 만든 홍송紅松 액자를 선물로 가지고 일산까지 왔다. 나무로 소품과 가구를 만드는 것이 그의 취미였다.
주로 일을 마친 저녁에 만나 밥을 먹거나 맥주를 마시며 긴 대화를 주고받았다. 그는 돌고래 모양으로 직접 깎은 나무 도마, 보조 배터리, 과일 등 필요해보이는 것들을 전해준다며 작업실 근처로 매일 찾아왔다.
화장실에 갈 때면 어느새 화장실 앞을 지키고 서 있고, 헤어지면 거의 분 단위로 연락을 해서 처음엔 매우 의아했다. 대부분의 사람은 누군가에게 관심이 있어도 서로의 거리와 위치를 재며 조금씩 다가가는데, 그는 나를 제외한 모든 것에 무심한 듯 한달음에 훅, 훅 다가왔다. 떨어져 있어도 바로 옆에 있는 것처럼 계속 연락하니 밤이 무섭거나 힘들 틈이 없었다. 오히려 조금은 피곤하게 느껴질만큼 태어나서 처음 보는 타입의 남자였다. 자신의 100%를 내어주는 사람. 어떻게 그런 마음을 줄 수 있었는지 아직도 궁금할 따름이다.
작업실에 처음으로 그를 초대한 날. 함께 누워있다가 깜빡 잠이 들었는지 깨어보니 그는 자는 내 얼굴을 애정 어린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까지 단단하게 엉켜있던 실타래, 사랑에 대한 의심과 체념이 한꺼번에 스르르 풀려버렸다. 이후 우리의 관계는 급속도로 발전했다. 작업실에서 지내는 내가 불안했던 그는 나를 예고 없이 집에 데려갔다. 그의 부모님은 깜짝 놀랐지만 처음 보는 아들의 모습에 나를 받아들여주셨다.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식'은 굳이 하지 않아도 좋았던 우리는 양가의 조촐한 식사로 결혼식을 갈음했다. 대신 현지의 사진작가를 미리 섭외해서 지중해의 베네치아와 몰타로 가는 비행기 티켓을 끊었다.
당분간 남편 그리고 시부모님과 함께 지내기로 하면서, 혼자 꾸린 작업실은 아쉽지만 서울로 옮기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인생의 2막에는 새로운 등장인물들과 공간이 필요했고 여주인공은 남주와 긴 여행을 떠날 참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