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몬커드와 장미잼, 그리고 플리마켓
둥그스름한 타원형으로 양쪽 끝에 볼록한 돌기를 가진 노란 과일. 작고, 귀여운 외모를 가졌지만 껍질을 까서 그냥 먹기는 힘든 불친절한 과일. 바로 레몬이다.
어느 주말 아침, 빵과 함께 먹을 만한 것을 찾다가 냉장고 속의 레몬 한 알을 발견했다.
'이걸로 간단하고 멋지게 만들 수 있는 요리 없나?'
인터넷 검색을 하다보니 처음 보는 단어가 눈에 들어왔다.
'죽기 전에 꼭 먹어야 할', '요리의 예술'이라는 표현에 구미가 당겼다. 빵에 곁들이면 맛있겠는데?
당시까지 레몬커드를 맛본 적은 물론, 누군가의 레몬커드 레시피나 판매하는 가게를 본 적도 없었다. 궁금증이 생겨 대충 옷을 걸치고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왔다. 어느 영국인이 쓴 그 책에는 잼과 처트니*, 콩포트**, 커드*** 등 다양한 홈메이드 스프레드를 만드는 방법들이 담겨 있었다.
*처트니(Chutney): 과일이나 채소에 향신료를 넣어 만든 인도식 소스
**콩포트(Compote) : 과일을 통째로 설탕 조림한 것
***커드(Curd) : 우유가 응고된 것
레몬커드의 재료는 레몬, 달걀, 버터와 설탕이다. 먼저 레몬을 끓는 물에 데쳐 굵은소금으로 문지르면, 표면의 옴폭한 부분들이 구석구석 닦이면서 상큼하고 기분 좋은 향이 폴폴 올라왔다. 씻어낸 껍질을 얇게 벗겨서 잘게 다지고*, 과육은 반을 갈라서 힘껏 즙을 짠다. 다른 재료들과 함께 냄비에 모두 넣고 가스불을 켠 다음 버터와 설탕이 녹을 때까지 기다리다가, 보일 듯 말 듯한 약불로 줄여 재료들이 하나로 엉길 때까지 계속 저어주어야 한다. **
* 껍질을 벗겨 다지지 않고 제스트(그레이터 등으로 겉껍질을 간 것)를 넣으면 크리미한 타입으로 완성된다.
** 자칫 달걀이 먼저 익으면 하얀 달걀 덩어리들이 생기기 때문에, 불꽃의 크기를 최소화한 채 냄비를 바닥에 내렸다가 가스불에 올렸다가를 반복하며 열을 조절하는 것이 포인트. 이 점 때문에 숙련되기까지는 레몬커드를 제대로 만들기가 쉽지 않다.
마침내 완성된 뜨거운 레몬커드를 조금 덜어 맛보았을 때, 머릿속에서 핑 하고 폭죽이 터졌다. 처음 느껴보는 극도로 상큼하고 황홀한 맛. 부드럽고 달콤하게 끌어당기는 풍미는 물론, 레몬 껍질의 발랄한 향과 오돌토돌한 식감도 살아있었다. 이런 거였어?
지인들에게 맛 보여주니 "이거 뭐야, 팔아도 되겠는데?"'라는 고무적인 반응이 돌아왔다.
스윙댄스를 한창 배우던 때라 우선 스윙댄서들의 온라인 커뮤니티에 재미 삼아 레몬커드 판매글을 올렸다. 신나는 스윙 재즈의 리듬에 춤추며 자유로움과 위트를 발산하는 댄서들의 반응은 기대 이상이었다. 처음에는 호기심, 나중에는 맛있다는 댓글들에 힘입어 한 달 동안 약 300만 원어치의 레몬 커드가 팔렸다. 회사를 다니며 레몬커드를 만들고, 배달하고, 택배를 보내면서 밤을 지새우기도 했지만 피곤하지 않았다.
그 무렵 자주 보던 <냉장고를 부탁해>라는 TV 프로그램. 하루는 가수 양희은 씨의 냉장고 안에서 '장미잼'이 나왔다.
'장미로 잼을 만든다고?'
맛이 궁금했지만 외국에서 사 왔다는 제보들 외에 판매하는 곳을 찾기가 어려워 직접 만들어보기로 마음먹었다. 알고 보니 장미는 병충해에 약해 농약을 많이 쳐야 하는 식물이라 무농약 식용 장미를 찾는 일부터 쉽지 않았다. 보통 장식용으로 쓰는 미니 식용 장미가 아닌, 송이가 큰 식용 장미는 특히 귀해서 재배하는 국내 농장을 찾는 데 시간이 걸렸다. 전화로 사정을 설명하며 부탁드리자 다행히 장미를 보내주셨다.
또 다른 문제가 있었다. 세포를 결합시키는 '펙틴'이라는 성분이 자연 함유되어 끓이면 쉽게 잼이 되는 과일과 달리, 장미는 잼처럼 젤리화할 수 있는 성분을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지 않았다. 펙틴을 구해서 넣었더니 강한 약품 맛이 나면서 물에 풀어지지 않았다. 관련 논문을 찾아가며 적정 온도에서 정량을 넣는 방법을 찾아야 했다. 실패한 수십 냄비를 싱크대에 버리고 나서야 만족스러운 장미잼이 탄생했다. 따뜻한 물에 풀어 넣으면 장미차로도 즐길 수 있으며 오묘한 맛과 향을 가진 건강 잼*이었다.
* 장미에는 에스트로겐이 석류의 8배, 비타민C가 레몬의 20배, 비타민A는 토마토의 20배가 들어있다.
시중에 없는 레몬커드와 장미잼을 직접 만들고 나니 웬만한 잼의 원리는 대강 알 수 있었다. 복숭아바닐라잼, 망고 처트니 등을 더 만들면서 본격적으로 잼을 판매해보고 싶었다. '플리마켓'의 존재를 알게 된 건 그때쯤이다.
플리마켓(Flea Market)은 본래 안 쓰는 물건 등을 판매하는 벼룩시장을 의미하지만, 개인이 만든 작은 물건이나 먹거리까지 판매하는 구경거리 가득한 놀이터로 발전하고 있었다. 참여를 원하는 날짜와 판매할 품목에 대한 소개를 주최 측에 보내고 셀러(작가라고도 한다)로 선정되면, 참가비를 내고 테이블 하나 정도의 공간에서 판매를 할 수 있었다. 처음 참여한 플리마켓은 2015년 9월 4일, DDP(동대문 디자인플라자)에서 열렸다.
구경 나온 시민들도 있었지만 까칠한 중국인 손님들에게 당황했던 플리마켓 첫날의 매출은 8만 6천 원으로 기억된다. 그다음부터는 셀러들의 후기나 예상 방문객을 생각하며 참여 신청서를 냈고 장소에 따라 하루 40~50만 원의 수익이 생기기도 했다.
아직도 생각나는 손님이 있다. 시식조차 주저하는 사람들과 달리 적극적으로 맛을 보고 "여기 있는 거 다 주세요."라며 테이블을 다 비워간 세련된 남성분. 그런 말을 지금껏 어디 가서 해보지 못했는데, 왠지 그에게 지고(?) 있는 기분이다.
날씨가 궂거나 방문객이 적은 날은 작가들과 서로 물물 교환을 하고 마켓 정보를 주고받으며 노는 재미가 있었다. 하루에 1000만 원을 벌어도 스트레스로 자주 병원에 드나들던 때보다는 좋아하는 일로 마음 편한 10만 원을 버는 쪽이 내겐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이득이었다.
주말마다 플리마켓에 참여하면서 모은 돈으로는 베이킹에 필요한 각종 재료와 도구들을 샀다. 플라워케이크를 복습하고, 트렌디한 베이킹 서적을 사서 쉬워 보이는 것부터 완성해나갔다. 특히 가족이나 절친의 생일, 기념일은 절호의 찬스였다.
도전하고 싶은 새로운 케이크를 만들어 선물할 수 있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