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빵을 추억하며

어쩌다가 베이킹을 하게 됐을까?

by Yujin


말랑한 우윳빛 반죽이 마호가니 색으로 서서히 물들며 부풀어 오르고, 고소한 향이 코를 찌른다. 숫자 '0'위에 표시된 작은 점으로 타이머의 다이얼이 돌아오며 울리는 다급한 신호음. 미리 두 켤레씩 겹쳐놓은 목장갑을 양 손에 끼고 오븐을 열자 열기가 와락 끼친다. 조심스럽게 나의 '첫 빵'을 꺼냈다.




부산시 동래구 안락동. 초등학교를 다닌 동네다. 덕트(duct) 기술자였던 아버지가 안락동에 차린 공업사의 작업장 한쪽에는, 우리 가족이 생활하는 방이 있었다.

깡깡 깡깡 깡깡 깡-!

학교를 다녀오면 항상 들리는 리드미컬한 망치질과 기계 소리. 날카로운 함석의 모서리, 튀는 불꽃들을 피해 발끝을 세우고 조심조심 방으로 들어간다. 부산스러운 하루 일과를 마치고 무거운 수동 셔터를 끌어내리면 그곳은 돌연 고요하고 아늑한 보금자리로 바뀌었다. 젊고 낭만이 넘쳤던 엄마와 아빠는 그 무렵 자주 영화를 보러 가거나 밤낚시를 다녔다.


공업사, 간판가게, 자동차 정비소 등이 도로 양쪽으로 줄지은 우리 동네와 달리 바로 옆 동네인 명장동은 새로 들어선 대단지 아파트를 중심으로 여유로운 분위기가 흘렀다. 심부름을 다니던 <부산은행>, 예쁜 필기구와 필통을 고르던 대형 팬시점 <모닝글로리>, 오빠와 다닌 피아노 학원, 외식의 명소인 피자 매장... 그리고 동네 초입의 <파리 제과>.

엄마는 그 빵집에서 바게트나 슈크림, 소보로 등을 자주 사 오셨다. 특히 기다란 막대처럼 생긴 프랑스식 빵인 바게트는 얇고 바삭한 크러스트를 엄지와 검지로 지그시 눌러 보드라운 속살과 함께 생크림에 찍어먹곤 했는데, 어이딸이 매우 좋아하는 일 중 하나였다.


취미와 유행에서 앞선 감각을 지닌 엄마는 언제부턴가 아찔한 버터향의 쿠키를 굽는가 싶더니 나중에는 온 가족을 불러 앉혀 카스텔라를 만들었다. 빵을 만들어 먹는 집이 흔치 않은 시절이었다. 먼저 각종 재료를 계량하고, 달걀을 열두 개쯤 깨뜨려 흰자와 노른자를 분리해 각각 담는다. 살짝 거품만 내는 노른자와 달리 달걀 흰자에는 설탕을 넣으며 빠르게 휘저어서 단단하게 뭉쳐진 구름같은 머랭을 만드는데, 카스텔라를 만들 때 가장 힘들고 중요한 과정이었다.

아빠가 먼저 힘차게 내리치듯 거품을 일으키기 시작하면 오빠가 바통을 이어받아 거품을 내고, 나와 엄마는 중간중간 휘핑을 도우며 팔이 빠질 것 같다고 앓는 소리를 한다. 모두의 팔 근육이 뻐근하다 못해 딱딱해질 때쯤 오빠가 머리 위로 볼을 뒤집어 보였는데, 머랭이 아래로 흘러내리지 않고 볼의 바닥에 딱 붙어있으면?성공이었다.


엄마의 오븐은 둥글고 납작한 생김새에 뚜껑을 아래에서 위로 들어 올리는 방식이었다. 거대한 밥솥 같은 오븐이 열리며 두툼한 카스텔라가 달콤하고 매혹적인 향을 뿜어내면 가족들은 엄마를 재촉했다. 한 김 식혀야 말끔히 자를 수 있어 고통스러운 10여분을 더 기다려야 했지만.

밖에서 땀흘려 일하는 삼촌과 아저씨들, 가까이 사시던 외할머니, 아빠와 엄마 그리고 오빠의 몫까지 부채꼴로 썬 다음 내 손에 쥐어지던 따끈한 카스텔라 한쪽. 진갈색 껍질의 감칠맛이 혀에 닿기 시작해 순식간에 입안에서 사라질때까지의 환상적인 기억은 지금까지도 생생하다.

얼마 후에는 작은 제빵기도 생겨서 아침마다 갓 나온 식빵 냄새로 하루를 시작했다. 소풍날에는 김밥 대신 샌드위치를, 특별한 날이면 집에서 만든 피자를 먹던 학창 시절.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먼 곳으로 대학교를 가면서부터 빵을 더 자주 사 먹었다. 친구들과 밥을 먹을 때를 빼고 평균 두세 끼는 빵으로 해결했지만, 베이킹을 직접 하겠다는 생각을 한 것은 훨씬 나중의 일이었다.


독립한 성인으로서의 생활은 자유로움과 외로움의 두 얼굴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다. 20대의 나는 소위 스펙이라고 하는 것들을 착실하게 쌓기보다는 정해진 틀을 벗어난 디오니소스적 삶과 사랑을 경험하길 원했다. 여러 아르바이트를 하고 박물관과 도서관에서 사색하기를 좋아했으며, 값비싼 맛집을 찾아다니는 아웃사이더였지만 챙겨주는 동기들 덕분에 다행히 대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다. 취업을 모색하던 때에 갑자기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학자금 대출 상환을 비롯해 스스로 해결할 일은 늘어났고 사랑도 점점 힘들어졌다.


고향을 떠나와서 7년 가까이 살아도 여전히 낯선 얼굴을 한 서울에서 마음 편히 의지할 곳은 없었다. 학원 아르바이트의 경험을 살려 당시 오빠가 운영하던 학원 사업을 도와서 적잖은 수익을 냈고, 그 자신감으로 일한 만큼 보상받는다는 도전적인 직업을 택했다. 그러나 치사스러울 만큼 숫자를 여러 번 따져 작성한 계약서에 서명을 받기 전은 물론 받은 후까지, 보이지 않는 감정 노동과 무한 책임은 보상받는 서류 몇 장보다 훨씬 많아 회의가 들었다.


하얀 케이크 상자를 들고 제과 학원에서 나오는 사람들을 퇴근길에 본 것은 그 무렵이었을까. 직접 만든 케이크를 집으로 가져가는 환한 기쁨이 낯선 사람들의 얼굴에서 빛났고, 호기심이 고개를 들었다. 얼마 후 나는 플라워케이크 디자인과 제과제빵기능사 국비지원과정에 수강을 신청했다.


플라워케이크 디자인 과정의 첫 수업, 내가 만든 4종류의 미니 플라워케이크(2015년).


직접 경험해보니, 플라워케이크 디자인 과정은 거의 공예에 가까웠다. 준비된 제누아즈(케이크 시트)와 버터크림이 미리 주어지면 꽃 모양으로 크림을 짜서 케이크를 장식하는 것에 집중했다. 한편 제과제빵기능사 과정은 강사님의 지시에 따라 같은 조의 사람들과 함께 51가지 품목의 빵과 제누아즈까지 만들 수 있었다. 재료 계량부터 반죽, 발효, 굽기 등의 모든 과정이 생소했지만 갓 나온 빵을 사람들과 맛볼 때면 오랜만에 순수한 행복감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과정을 마치고 '오븐을 살까, 말까?'를 한 달쯤 고민하다가 20리터짜리 가정용 중고 오븐을 샀다. 중고였지만 새것 같았고 반죽과 발효도 가능한. 온도 조절은 물론 오븐 내에서 열을 순환시키는 컨벡션 기능이 있고, 설명서 뒤쪽에는 몇 가지 유럽식 빵의 레시피도 실려 있었다.

재료 계량 -> 자동 반죽 -> 1차 발효 -> 모양 잡기 -> 2차 발효-> 온도 설정 및 예열 -> 타이머 설정 및 굽기.

보기엔 간단한데 잘할 수 있을까?




첫 반죽을 열심히 하고 있는 오븐. 지금도 가지고 있다.


혼자서 빵을 굽던 날. 뱃속의 태아를 보듯 조마조마하면서도 설레는 임신부의 심정으로 오븐 앞을 지키고 서 있었다. 아니, 반죽을 품고 굽는 건 오븐이니까 어쩌면 아빠의 마음일까. 에이, 그냥 부모의 마음이라고 하자.

마침내 구수한 향을 온몸으로 뿜는 투박한 빵 한 덩이가 오븐에서 나왔다. 매끈하지 못한 자국이 군데군데 보이지만 적당히 캐러멜라이징 된 피부와 부드러운 속결을 가진, 생각보다 훌륭한 내 새끼... 아니 첫 빵! 이제 혼자서도 빵 냄새를 맡으며 하루를 시작할 수 있겠구나.


오븐이 생기자 베이킹이 시작되었다. 채 익지 않은 빵이나 까맣게 탄 빵이 나와도 오븐에게는 억지로 미소 지을 필요가 없었고, 서로 오해하고 짐작하며 밀당할 일도 없었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주고 노력의 과정이 고스란한 결과물을 가감 없이 내놓는 속 깊은 친구에게 점점 정을 주게 되는 건 당연했다.

오븐에서 과연 무엇이 나올지 알 수 없는 날들이 이어졌지만, 그러는 사이 유레카를 외치는 순간들이 쌓이기 시작했다. 변화무쌍한 창조물들은 본래 하나였던 거울의 조각들처럼 나를 비추며 자리를 잡아갔다. 나는 그렇게 베이킹에 빠져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