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 03]
'솔직히 보고 싶었지 않나요?'
위의 대사는 어떤 영화 속에서 사람들이 뉴스에 보도된 스너프 필름을 보면서 하는 말이다. 오늘날 개인의 성생활과 일상을 영위하는 일은 누군가의 포르노로 폄하되고 있다. 또한 의도적으로 지나치게 연출된 잔인함은 예술성을 말하는 도구로, 실제 살인이나 자살행위에 대한 기사는 기사를 읽는 자들의 알 권리를 충족시키기 위해 마땅히 제공되어야 할 정보로 여겨진다. 성과 폭력은 서로 다른 변명으로 합리화되지만, 이 둘은 결국 호기심에서 비롯된 관음증적 시선이라는 실체를 가지고 있다. 이처럼 성과 폭력을 포장하는 방식과 그에 따른 결과를 김인숙의 <SATURDAY NIGHT>에 적용해 보고자 한다.
타인의 자살이나 피가 낭자한 살인이라는 상황은 흔히 알 권리로 포장된다. 위는 자살을 준비하는 여성과 피투성이가 된 채로 누군가를 살인한 여성의 사진이다. 사진을 본 관람객이나 사진의 기반이 된 기사를 읽은 독자들은 왜 저 여성이 자살을 하는지, 자살을 하고 난 뒤는 어떻게 될지, 살인한 여성은 누구이며 왜, 어떻게 살인을 저질렀는지, 피해자와는 무슨 관계인지를 궁금해할 것이다. 이러한 호기심은 무섭거나 잔인한 범죄를 알아야 하는 시민의 권리로 완곡하게 표현된다. 하지만 권리 속에 존재하는 감정은 '보고 싶었을' 뿐이고 타인의 죽음마저 관음 하려는 금기에 대한 이중적 태도의 발현으로 생각될 수 있다. 또한 죽음이라는 명목으로 전시된 자들이 모두 여성이라는 점은 사회가 특히 여성의 사생활에 관심이 많다는 점을 떠올리게 된다.
타인의 성과 관련된 일은 '잔인함'을 다루는 방식과 달리 알 권리로는 보통 포장되지 않는 편이다. 하지만 연예인에 대한 일은 종종 예외라고 말하는 이도 존재한다. 누군가의 성과 관련된 일상을 엿보는 일은 변명 대신 대상화당한 피해자에게 원인을 부여한다. 위와 같이 보통 일반적으로 여겨지지 않는 사도마조히즘적인 행위를 하는 여성, 그룹 섹스에 참여한 여성의 사생활을 관음 하는 자들은 그들의 성적 욕구와 호기심에서 기인한 폭력적인 시선과 평가를 저지른 후 대상화된 자들의 행위가 무결한 지에 대하여 논의하기를 시도한다. 사도마조히즘적인 욕망과 그룹 섹스가 피해자에게 합당한 일인가? 그것은 애초에 논의할 일이 아니지만 가해자들은 자신의 관음증적 욕망을 인정하기보다 피해자들이 대상화될 수밖에 없던 행동을 저질렀으니 그것을 보는 우리는 인간의 본성에 충실할 뿐이라고 합리화한다. 사생활을 보호받기 위해 호텔에 방문한 여성들은 자신의 내밀한 사정이 침해당한 사실에 불합리함을 주장하기보다 '더럽거나 선정적인' 상황을 유도하였기에 오히려 가해자의 위치로 뒤바뀌어 비난받는다.
이처럼 타인을 관음 하는 일은 거창한 방식으로 포장되는 한편, 인간의 추악한 본성을 대신해서 합리화해주는 다양한 미디어의 출현과 함께 '보고 싶었다'라는 말처럼 인간의 추악한 본성이라고 말하는 의견도 존재하고 있다. 필자는 관음증적 욕망이 인간의 추악한 본성이라는 주장에 대해 동의하는 편이다. 하지만 이 표현은 관음의 시선을 던지는 자들에게 이상 성욕이라는 면죄부를 주는 것에 대한 부정의 의미일 뿐 인간이 모두 가지고 있는 본성으로서 관음을 긍정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누구에게나 마음속에 관음의 욕구는 존재할 수 있기에 경계와 성찰의 과정을 반드시 거쳐야 한다. 본성이라는 근본적이고 당연해 보이는 언어를 사용하여 관음증의 욕망을 합리화하는 미디어가 추구해야 할 방향을 김인숙의 <SATURDAY NIGHT>에서 우리가 느껴야 할 수치심과 연관 지어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참고문헌
https://magazine.notefolio.net/19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