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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ment designer Apr 30. 2021

결국 또 남편에게 뱉어버렸다.

부부 '백해무익'

주말 아침, 화장실에 들어갔더니 익숙한 풍경이 펼쳐진다. 하얀 욕조 군데군데 동그랗게 남아있는 갈색 염색약 자국. 수세미로 박박 문지르다 보니 리드미컬하게 화가 올라온다. 아무리 지워도 흐릿하게 자국이 남는다. 단전에서부터 올라온 무언가가 순식간에 목구멍까지 차 버렸다. 고무장갑을 벗어던지고 거실로 나와 양손을 허리에 얹었다. 허리에 얹은 양손은, 공격 태세를 갖췄다는 일종의 신호다.


나.

여보. 내가 진짜로 궁금해서 물어보는 건데 말이야.

화장실에 염색약 자국 진짜 안 보여서 안 씻는 거야? 

내가 몇 번을 말해? 진짜 궁금해서 그래.. 진짜 안 보이는 거야?


남편.

( 깊은 한숨과 짧은 침묵 )

지금 진짜로 그게 궁금해서 물어보는 거야?

여보는 지금 그냥 날 비난하고 싶은 거잖아. 


잔소리를 한 바가지 퍼부을 샘이었는데 남편의 대답에 말문이 턱 하고 막혀버렸다. 정확히 말하자면 마음속 깊은 곳에 숨겨놓은 못된 심보를 들켜버린 기분이었다. 


나는 정말 궁금해서 물어본 걸까? 사실 궁금하긴 했다. 안 보여서 안 지우는 건지, 보이는데 귀찮아서 안 지우는 건지 알고 싶었다. 그런데 왜 남편의 대답에 말문이 막히고 가슴이 뜨끔했을까? 


남편은 정확하게 핵심을 짚었다. 내 질문의 숨은 의도를 지분으로 따져보니 '궁금한 마음'은 고작 1%였고 나머지 99%의 지분은 '비난하고 싶은 마음'이 차지하고 있었다. 




잔소리에는 흔하게 따라붙는 레퍼토리가 있다. "다 너 잘 되라고 하는 소리야. 내가 나 좋자고 이러니?"


우리는 정말로 상대방을 위해서 잔소리를 할까? 표면적으로는 그럴지 몰라도 사실은 나 좋자고 하는 경우가 더 많다. 상대방이 기분 나쁠 걸 뻔히 알면서도 참기가 힘들다. 목구멍까지 올라온 잔소리를 '꿀꺽' 하고 삼켜야 하나 '퉤'하고 뱉어야 하나 잠깐 고민이 되긴 하지만 하지만 결국은 뱉어버리고 만다. 


마음속에 일어난 불쾌한 감정들을 입 밖으로 내 보내 버리면 적어도 그 순간에 내 속은 시원해지니까 말이다. 하지만 무방비로 잔소리 폭격을 맞은 쪽의 기분은 어떨까? 어쩌면 '퉤' 하고 뱉은 침을 얼굴에 맞은 것처럼 더러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잔소리 말고 조언은 어떨까. '잔소리'가 부정적인 어감이라면 '조언'은 조금 생산적인 느낌이다.


[잔소리]
쓸데없이 자질구레한 말을 늘어놓음. 
필요 이상으로 듣기 싫게 꾸짖거나 참견함. 

[조언]
말로 거들거나 깨우쳐 주어서 도움.


사전적 의미로 보자면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대로 잔소리는 부정적, 조언은 긍정적인 의미로 받아들여도 무리가 없다. 하지만 과연 잔소리와 조언의 의미를 '말하는 사람' 입장에서만 정의 내려 완성할 수 있을까?


예능프로그램 유 퀴즈 온 더 블록 10화에서 '잔소리와 조언의 차이점이 뭐라고 생각하나요?'라는 질문에 한 초등학생의 답변이 한동안 화제였다. 


"잔소리는 왠지 모르게 기분 나쁜데, 조언은 더 기분 나빠요." 

요즘 말로, 그야말로 '띵언'이다.


결국은 잔소리나 조언의 정의는 말하는 사람이 아닌 받아들이는 사람의 입장에서 완성된다. 아무리 좋은 의도로 얘기한다 할지라도 듣는 사람이 불쾌하다면 '잔소리'와 '조언'은 동의어가 된다. 


특히, 평등한 위치에 있는 부부관계에서는 더욱더 그렇다. 부부 사이의 '조언'은 잔소리보다 조금 덜 기분이 나쁠 뿐, 듣기 좋은 소리는 아니라는 걸 여러 번의 시행착오를 겪으며 알게 됐다.


엄마가 자주 하던 말이 생각난다. 

"내가 하기 싫은 일은 남도 하기 싫고, 내가 듣기 싫은 소리는 남도 듣기 싫어. 

그래서 엄마가 아빠한테도 너희한테도 잔소리 잘 안 하잖니" 

우리 집의 고요와 평화가 엄마의 인내심과 노력이었다는 걸 이제야 알겠다.


덧.

남편은 정말 염색약 자국이 안 보이는 거였다. 염색을 할 때는 약이 흰색이라 안 보이다가 시간이 지난 후에 자국이 올라온다는 변론이다. 듣고 보니 일리가 있다. 진작 좀 말해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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