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할 사람을 만나면 딱 느낌이 와요?"
"아니! 딱 느낌이 안 오던데?"
내가 이 남자랑 결혼을 결심한 대단한 사건이 있었던가? 하고 아무리 생각해 봐도 결정적인 한 방이 생각나지 않는 거 보면 우리의 연애와 결혼은 아마도 은근하게 피어오르는 모닥불처럼 잔잔하고 평화롭게,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은 적정온도를 유지하며 아주 자연스럽게 흘러 온 것 같다.
결정적인 한 방 은 없지만 오랜 연애를 하면서 '이런 사람이라면 평생 함께 할만해'라고 생각했던 소소한 기억의 단편들이 있다.
#1. 운전 알려 주는 남자
가까운 사람한테는 절대 운전 배우는 거 아니라는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남편이 남차친구였던 시절 운전을 배웠었다. 7년 묶은 장롱면허를 꺼내 들고 브레이크와 엑셀을 헷갈리는 만행을 저지르는 나의 운전실력에도 그는 한 번도 화를 내지 않았다. 긴장한 나와 다르게 남편은 차분함을 잃지 않았다. 속으로는 울화통이 치밀었을지 모르지만 말이다.
운전과 관련된 또 한 가지 인상 깊었던 기억은 클락션을 누르지 않는 남편의 모습이었다. 화가 날 만한 상황에서도 클락션을 누르지 않고 전조등을 두 번 깜빡이며 앞차에게 신호를 주는 그의 손이 조금 멋있어 보였던 것 같기도 하다.
#2. 그의 어린 시절을 함께 해온 오랜 벗들
그에겐 초등학교 때부터 함께 해 온 오랜 친구들이 있다. 워낙 가까운 친구들이라 연애를 시작하고 얼마 되지 않아 친구들 모임에 나를 데려갔는데 아직도 그날의 장면들이 눈에 선할 정도로 인상 깊었다. 그 죽마고우들은 언제 만나도 초등학교 시절로 돌아간 듯한 시시한 장난을 치고, 만날 때마다 어린 시절 추억들을 얘기한다. 남편과 친구들의 모습을 보며 그들의 어린 시절을 만난다. 나는 20살이 된 남편을 만났지만 그의 친구들을 만나면 남편의 유년시절까지 공유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냥 함께 하기만 해도 즐겁고 힘이 되는 진정한 친구들이 있는 남편의 모습이 좋았다. 친구를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고 하듯이 그들이 쌓아온 우정을 보며 그의 다정함과 의리를 보았다.
#3. 가족이 될 인연에 대해
남편과 데이트를 하던 어느 날, 근처에서 친구분들과 식사를 하고 계시던 아버님을 뵙게 됐다. 아무런 준비도 없이 갑작스럽게 뵙게 되었는데 이상하게 아버님을 만나자마자 자꾸만 눈물이 나오려고 해서 꾹 참느라 혼이 났다. 나를 바라봐 주시는 따뜻한 눈 빛과 꼭 잡아주신 손에서 진심이 전해 져서였을까. 그때 나는 아마도 아버님과 내가 가족이 될 인연이라는 걸 직감했던 것 같다. 지금도 가끔 아버님을 보면 그날의 감정이 떠올라 마음이 찡 해 질 때가 있다.
아들과 아들의 여자 친구를 바라보는 아버님의 눈 빛에 들어있는 사랑은 그 어떤 말보다 강하게 내 마음을 움직였다.
"아니 고작 이런 게 결혼을 결심한 이유라고?"
결혼에 골인하기까지는 다양한 케이스가 있다. 큰 범주에서 보면 결혼에 목적을 두고 배우자를 찾아 나서서 만나는 사람이 있고 연애를 하다가 자연스럽게 결혼까지 이어지게 되는 사람들도 있다. 나처럼 후자인 경우에는 한눈에 운명처럼 결혼할 사람을 알아보기보다는 연애 과정에서 느끼는 소소한 사건들이 쌓여 점점 결혼에 대한 확신을 가지기도 한다.
이 글을 시작할 때부터 예상하긴 했지만 글로 적고 나니 더 시시하다.
내가 결혼하게 된 이유는 고작 이런 것들이다. 고작 이런 사소하고 시시한 아주 작은 순간들이 모이고 모여서 남편과 나를 결혼식장까지 데려다주었고 지금 여기까지 왔다.
지금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 앞으로도 서로의 적정 온도를 유지하며 작고 따뜻한 기억들을 만들어 가고 싶다.
내일은 음감님이 바톤을 이어받습니다. 작가 4인이 쓰는 <남편이라는 세계>에 관심이 간다면 지금 바로 매거진을 구독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