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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앨리스 05화

죄 VS 꿈

똑똑. 이상한 나라의 문

by 유하



똑똑.


현실에 갇혀 있는 이상주의자, 설레는 마음을 안고 꿈과 이상으로 진입하는 문 앞에 선다. 문의 크기가 내 몸보다 아주아주 작다. 문 너머에 있는 세상도 아주아주 작은 것일까. 나 같은 사람은 들어오지 말라는 조롱인가. 거센 저항인가. 그래, 역시 쉽지 않을 거라 생각했어. 하지만 일단 열고서나 생각하자. 탈출은 둘째치고, 좁은 문으로라도, 한쪽 눈으로라도 보고 싶다. 저편의 이상적인 세상, 이상한 나라. 그곳이 실재한다는 사실을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 땀이 흥건한 손바닥을 하늘색 드레스에 문지른다. 조금은 덜 축축해진 손으로 이제 돌출된 문손잡이를 힘주어 꼭 잡는다. 돌린다.



그런데, 이 괴상한 비명은 뭐지? 고통을 느끼는 문손잡이라니!




디즈니,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 ① 문밖으로 나가기 위한 앨리스의 손길에 아파하는 문손잡이.




디즈니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는 아이들이 즐겨 보는 영화치고는 기괴한 컨셉이 참 많다. 그중에서도 앨리스가 문을 열려고 하자 문손잡이가 괴성을 내지르는 장면의 잔상은 뇌리 속에 꽤나 진하게 남아 있다. 원작 동화인 루이스 캐럴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는 없는, 이 말하는 문손잡이는 영화가 거의 끝나갈 무렵, 이상한 나라의 등장인물들로부터 쫓기던 앨리스가 꿈에서 깨어나기 직전의 순간에도 등장한다. 한시가 급한 순간, 문을 열고자 하는 앨리스에게 문손잡이는 또다시 고통을 호소한다. 이때, 문을 연다는 것은 꿈에서 깨어난다는 것이다. 문손잡이 구멍을 통해 앨리스는 잠든 자신을 목격한다. 그는 스스로에게 외친다. "일어나, 앨리스!"




② & ③ 후반부, 이상한 나라를 벗어나기 위해 문 앞으로 뛰어가 손잡이를 잡는 앨리스.




사물을 의인화하는 설정은 이제 다른 애니메이션 영역에서도 빈번하게 쓰이기도 하고, 다양한 영상물을 쉽게 접하는 현재의 관점에서 그다지 독특하게 느껴지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원작에는 없는 문손잡이 캐릭터와의 장면들은 기존 앨리스의 이야기가 갖는 복잡성을 정돈하고 그에 더욱 쫀득한 서스펜스를 부여한다. 꿈과 현실 각각이 보다 명확하게 분리된 공간이 되니, 서로를 밀고 당기는 힘과 맛도 더욱 선명해진다. 나가려는 자와 그것을 아파하는 자. 아프게 해서 미안하지만 그래도 나가려는 자와 그 모습을 껄껄대며 비웃는 자. 마음을 졸이는 자와 진실을 미묘하고도 잔혹하게, 조금씩 흘리는 자.








어린 시절에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봤을 때는 의인화된 문손잡이가 등장하는 장면이 그렇게까지 특별하게 느껴지진 않았던 것 같다. 반면, 다 커서 보는 지금, 유독 마음에 걸리는 이유는 뭘까. 어렵지 않게 답을 내릴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온 영혼을 다해 간절히 바라는 것이 누군가에게는 짐이 되고, 아픔이 될 수 있는 상황. 그런 딜레마 속에서 나는 살아가고 있다. 아름답고 매혹적인 꿈의 이면에 무엇이 있는지, 이제 나는 안다. 모든 성취에는 그에 맞는 포기와 희생이 따른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모든 결실이 보기보다 고귀하지만은 않다는 것도.



그럼에도 현실보다 이상에 더 큰 가치를 두며 계속해서 꿈을 좇을 수 있는 이유는, 그래도 꿈을 현실화하는 지금까지의 과정 속에서 잃는 것보다 얻는 것이 더 많았기 때문이다. 그 점이 감사하다. 혹은 적어도 현재는 내가 그렇게 느끼고 있다는 사실이 감사하다. 그렇게 느낄 수 있는 태도를 갖추기까지 죄의식과 잃어버린 것들의 늪에서 참 부단히도 허우적댔다.



며칠 전에는 게으른으른과 통화를 했다. 이상에 대한 열렬한 고백과 그에 비견하는 고뇌로 가득찬 내용의. 그렇다. 그는 나와 같은 이상주의자다. 나는 친구로부터, 이상이 꼭 현실에서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그것을 현실화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꿈꾸는 일 자체를 순수하게 사랑하는 법을 배웠다. 자신의 꿈을 다른 누가 대신 이뤄 주었으면 좋겠다는 그의 '무책임하고 게으른' 태도는 (내) 꿈은 꼭 (내가) 현실화해야 하는 것이라 믿었던 나에게 충격적인 발상의 전환을 가져다 주었다. 아, 꿈은 그 자체로 가치 있고 사랑스러운 것이구나. 또 이 거창한 꿈을 꼭 내가 이룰 필요가 없구나. 남이 이루어 주어도 꿈은 여전히, 또는 몇 배로 더 아름답겠구나. 고맙겠다. 그런 생각은, 꿈은 꼭 현실화하기 위한 개인적인 노력이 동반되어야 의미가 있다는 나의 뻣뻣한 지론과 의무감, 그리고 그로 인해 꿈을 아직 현실화하지 못했다는, 혹은 그것을 위한 충분한 노력을 하지 않았다는 죄책감으로부터 나를 해방시켜 주었다.



한편 게으른으른은 나와는 조금 다른 결의 죄의식을 갖고 있다. 그는 어쩌면 나보다 이상의 세계에 훨씬 더 자주 머무는 사람이지만, 현실 속에서 자신이 이상주의자라는 사실에 관하여 비대한 죄의식을 안고 살아간다. 아니면 현실보다 이상 속에 더 자주 머물기 때문에 더 큰 죄의식을 갖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친구의 죄의식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그의 이상주의자로서의 정체성을 억압했던 가정 환경에 당도한다. 그의 가족은 철두철미한 현실주의자들이었다.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 본연의 모습을 부정당하는 삶. 얼마나 외롭고 괴로웠을까. 그럼에도 이상주의자의 신분을 지금까지 이어 온 그는 분명, 자신이 믿고 있는 것보다 훨씬 강인한 사람이다. 나는 그의 이상주의를 굳게 믿어 줄 것이다. 그가 나를 해방시켜 주었던 것처럼 그의 이상이 불필요한 죄의식으로부터 벗어나 제 힘을 발휘하는 그날까지.








다시 또 하나의 문 앞에 선 이상주의자.



똑똑, 문을 두드리려는데, 문이 이미 열려 있다. 그 문은 마그리트가 그린 문을 닮았다. 그림의 제목은 <승리 La victoire(The Victory)>(1939). 문틀에는 적운 하나가 두둥실 껴 있다. 구름은 정지되어 있다기보다는 문의 내외부를 자유롭게 이동하는 것처럼 보인다. 더 자세하게는, 어디까지가 안이고 어디까지 밖인지 잘 구분되지 않는다. 밖이라 생각했던 바다 풍경은 안개처럼, 공기처럼, 투명한 물감처럼 문틀과 문, 그 안으로까지 스며들어 있다. 내부에 보다 가까이에 있는 모래는 문틀과 문의 하단부를 물들이는 데 그치지 않고, 그 너머의 바다로까지 나아간다. 마그리트가 이전에 그린 문 그림에서는 문에 인위적으로 뚫린 구멍이 등장하며, 구멍 너머로는 내부에서 연장된 마룻바닥과 어둠이 자리한다. 이렇게 다소 닫혀 있던 문의 특성을 '문제'로 본 마그리트는 그에 대한 '해결책'으로서 외부의 풍경을 문에 뚫린 구멍 안에 삽입한다. 그는 이 효과를 더욱 발전시켜 내부와 외부가 상호적으로 교통할 수 있는 초현실적인 통로를 제시하기에 이른다.




르네 마그리트, <승리>, 1939, 캔버스에 유화, 72.5 x 53.5 cm.




이 문은 죄의식이나 회의로 가로막힌 좁은 문이 아니다. 드높은 이상을 충분히 현실화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혹은 단지 현실 속에서 이상을 꿈꾼다는 이유로, 또는 이상을 좇는 삶의 어두운 이면을 목격했기 때문에 스스로를 비좁은 방 안에 가두고 갉아먹는, 그런 문이 아니다. 이것은 '승리'의 문. 자신을, 세계를, 가능성을 무한히 확장하는 문, 이상과 현실로 하여금 서로의 손을 맞잡게 하고 적절한 균형을 이루도록 돕는 문이다. 이곳에는 마냥 터무니없는 이상도, 지루하기만 한 현실도 없다. 아프기만 한 과거도, 공허한 미래도 없다. 이 문을 사이에 둔 이상과 현실은 풍요로운 의미를 이루기 위해 서로의 존재를 필요로 한다. 불안하더라도 기어코 그 불안을 직면함으로써 그것을 투과하고, 치열하게 싸우더라도 꼭 화해를 하고야 말며, 앞뒤 어느 방향으로 흐르더라도 현재로 통합된다. 그것은 '승리'의 문. 궁극에는 이상주의자가 꼭 도달하고야 말 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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