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있어 여행은 사치였다.
그것은 금전적인 사치가 아니라 시간적인 사치였다.
하루 평균 수면 시간은 네 시간 미만이었다. 그러면서도 괴롭지 않고 즐겁다고 생각했다. 내가 하고 싶었던 일을 하고 있으니까... 돌이켜보니 정말 스스로 행복하다고 최면을 걸고 있었던 것이나 다름없었다. 몸과 마음이 더 이상 견디지 못하는 순간 서점에서 펼쳐 든 여행책 속 스페인의 어느 작은 마을의 골목길과 파란 하늘이 나를 멈춰 세웠다. 치료는 일단 모든 것을 멈추고 여행뿐!이라는 처방전이 책 사이에 끼워져 있는 것 같았다.
7월 24일 오전 6시. 1,100km를 밤새 달려 스페인과 피레네 산맥을 경계로 붙어있는 프랑스의 작은 마을 ‘생장 피드포르(St. Jean Pied de Port)에 도착했다. 렌터카 문제로 파리의 샤를 드골 공항에서 예정에 없는 하루를 보내고 다음날 힘들게 벤츠 왜건(c200)을 찾아 짐과 사람이 뒤섞여 쉬지 못하고 달려왔다. 모두가 지친 상태였지만 이곳의 서늘하고 기분 좋은 새벽 공기는 차에서 내리는 순간 모든 피로와 짜증을 가져갔다. 그토록 오고 싶었던 유럽을 도착한 지 이틀이 지나서야 실감할 수 있다니! 공항과 차에서 지친 표정과 한숨으로 보낸 시간이 아깝고 한심했다.
쉼 없이 달려온 시간을 돌아보고, 비움 없이 채워서 용량이 다한 좁은 마음을 정리하겠노라 해놓고선 금세 계획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조급해졌으니 말이다. 그동안의 내 마음은 정리를 하지 않고 차일피일 미뤄둔 다락방이었다. 버리기엔 아까워 언젠가 다시 쓰겠지 하고 쌓아두었다가 10년이 넘게 먼지를 덮고 앉아있는 곳. 이젠 그 다락도 한계 지점에 있었다. 작은 충격으로도 아무렇게나 쌓아둔 마음들이 당장 쏟아져 나올 것만 같았다. 바로 앞이 보이지 않는 짙은 안개 안에 서서 나 자신에게 다시 말한다. 나는 지금 이곳에 있고, 프랑스와 스페인, 유럽의 길 위에 다시 꺼내보지 않을 마음들을 버리고 방전된 에너지를 채우고 가겠노라고.
순례길 걷기를 시작하기 전 마을의 작은 카페에 들렀다. 배가 고프기도 했지만 진한 커피 향과 고소한 빵 냄새를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고작해야 단팥빵이나 먹는 내가 버터와 빵 굽는 냄새에 끌리다니 이것도 여행이 주는 기분 좋은 변화와 새로움이었다. 모든 것이 즐겁고 기분 좋은 아침이었다. 아침 식사를 마친 우리는 출발 전 화장실도 들르고 신발도 걷기 편한 것으로 바꾸어 신었다. 오늘 걷기로 한 거리는 약 20km. 도보로 4-5시간 정도의 거리로 ‘팜플로나(Pamplona)'가 목적지였다. 목적지에 도착하면 다른 일행이 차를 가지고 우릴 마중하러 나올 계획이었다. 운전을 해서 캠핑장에 미리 가기로 한 일행과 헤어지고 오늘의 순례자인 우린 기념사진을 찍었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향한 첫걸음이었다.
가을 하늘처럼 높고 푸른 하늘, 시원한 공기, 땀이 흐르지 않는 건조함이 모두 좋았다. 우리는 작은 마을을 지나 도로 옆을 걸었다. 팜플로나 방향 이정표와 노란색 조가비 표시를 따라 걸었다. 그런데 도로를 따라 걷는 것은 어디서든 위험한 일이기도 했지만 순례길의 특징은 차가 다니지 않는 흙길(옛길)을 걷는 것인데 조금 이상했다. 도로 왼편으로 멀리 산을 바라보니 순례자들로 보이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걷고 있는 것이 보였다. 흙먼지가 조금씩 이는 것을 보니 그곳이 도보여행자를 위한 산티아고 순례길인 모양이었다. 우린 우선 길을 건너 마을로 들어가 누구에게든 길을 묻기로 했다. 여행을 떠나기 전 조금이나마 준비한 스페인어를 써보고 싶기도 했다. 마침 집 앞의 텃밭을 가꾸는 아저씨가 눈에 들어왔다. 일행을 두고 혼자 아저씨에게 다가가 인사를 했다. 나의 첫 스페인어 “올라(Hola!)" 인상 좋은 스페인 아저씨가 일을 멈추고 웃으며 인사를 받는다. ”부에노스 디아스(Buenos dias)". "뻬르도네, 돈데 에스따 엘 카미노 데 산티아고(Perdone, ¿Donde esta el camino de Santiago?). 그리고 아저씨의 엄청나게 긴 스페인어가 이어졌다. 표정과 손짓을 보니 너무 친절한 설명이었지만 내 짧은 스페인어로 이해하긴 힘들었다. 간단히 설명해 주시지... “까미노 데 산티아고...... 이스 끼에르다...... 데레차... (Camino de Santiago...... izquierda...... derecha...)" 겨우 표지판, 왼쪽, 오른쪽 방향 정도만 알아들었다. 웃는 얼굴로 인사했지만 거의 못 알아들은 내 표정을 봤는지 걱정스러운 표정과 추가 설명이 따른다. 감사 인사를 한 번 더 하고 서둘러 자리를 떴다. 아마 거기서 난처한 표정을 짓고 더 서 있었으면 그 아저씨는 길 안내를 자처하고 나설듯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멀리서 내 모습을 지켜보던 동행들이 웃는다. 내 난감한 상황을 눈치챘는가 보다. 나도 머쓱한 웃음으로 대답했다. 다행히 마을길로 더 들어서니 순례길 표지판이 다시 보이고 팜플로나까지의 지도도 있다. 우리는 순례길 표지판 앞에서 사진을 몇 장 더 찍었다. 우린 순례길을 모두 걷진 못하고 가벼운 체험 수준이지만 카메라 파인더로 보이는 일행들의 모습은 설렘과 각오가 가득했다. 함께 걷고 싶은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걷는 이 길이 또한 즐겁고 행복하게 다가왔다.
나는 잠시 혼자만의 시간을 위해 일행과 떨어져 걷기로 했다. 다음 마을에서 만나기로 하고 걸음을 빨리했다. 좋은 사람들과 함께 걷고 또 혼자 걷는 길이 바로 이곳 산티아고 순례길이니까. 순례길 옆으로 공원이 내려다보였다. 가족이 나들이를 나왔는지 바비큐 파티를 하고 있었다. 고기를 굽고 있는 아버지와 딸. 순간 나는 딸과 눈이 마주쳤다. 중학생 정도로 보이는 딸이 웃으며 손을 흔든다. “아디오스(adios)" 나는 주뼛거리며 어색하게 손을 흔들었다. 스페인 사람들은 눈을 마주치면 항상 웃으며 인사를 한다. 부러웠다. 누군가에게 스스럼없이 웃으며 인사를 하고 따뜻함을 나누는 것은 비단 나에게만 어려운 일은 아니다. 그렇지만 난 마음이 차다.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차가운 마음을 낯선 누구에게 따뜻하게 드러내 보이겠는가. 그러나 그 소녀의 웃음은 내 차가운 마음을 조금은 녹이는 것 같았다. 마침 고개를 든 딸의 아버지도 손을 흔든다. 좋은 사람들이다. 알 수 없지만 좋은 사람들이었다. 난 이 길에서 불필요한 낡은 마음을 버리고, 차가운 마음을 조금은 녹이고 가야겠다고 생각을 고쳤다. 버리다 보면 얻는 것이 없다 하더라도 최소한 가벼워진 빈 마음이 있을 테니까.
나의 첫 순례길은 이렇게 지나갔다. 팜플로나 외곽에 있는 캠핑장에서 식사를 마치고 텐트 앞에 모여 앉아 와인을 마시며 우리의 용기와 여행을 위해 건배를 들었다. 첫날 일정으로 지친 탓에 모두 일찍 잠자리에 들었고 난 한참을 뒤척이다가 텐트 밖으로 무수하게 빛나는 별을 바라보며 아쉽게 지나가는 7월 24일, 내 삶의 하루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