텅 빈 교황청 앞에서 사랑타령

by 배종훈

아비뇽의 YMCA호스텔을 예약한 것은 훌륭한 선택이었다. 론강과 구교황청이 건너다보이는 언덕에 있어 테라스에서 바라보는 경치가 너무나 훌륭했다. 해질 무렵 도착한 아비뇽은 상상한대로 아름다운 도시였다. 론강을 끼고 도시를 에워싼 오래된 성벽이 아름다웠다.


다음날 아침, 숙소에서 바라보는 서늘한 새벽 풍경이 너무나 아름다워 간편한 차림으로 아비뇽 시내로 걸었다. 너무 이른 시간이라 골목에도 광장에도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론강에 놓인 다리를 건널 때도 바람이 굉장히 강하게 불었는데 구교황청 앞 광장에도 무척 바람이 세게 불었다. 몸을 휘청거리게 하는 바람을 가로질러 교황청 뒷편 로셰돔공원으로 올라갔다. 여행책에는 노을이 아름다운 공원이라는데 해가 뜨는 아침, 안개에 싸인 아비뇽 구시가지의 모습 또한 시간이 멈춘 것 같은 순간이었다.


공원 벤치에 앉아 아침 해를 받기 시작한 교황청의 인상은 견고한 요새의 모습이었다. 높이 50여미터, 두께 약 4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석벽으로 보호받도록 건축되어 있는데 어쩌면 막강한 정치권력의 위협에 상대적으로 열세에 있던 교황청의 자기 보호적 성격이 때문이 아니었을까하는 생각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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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이 독특한 교황청은 1334년부터 재직했던 교황 베네딕토 12세의 단조로운 구 교황청과 교황 클레멘스 6세 시대에 유행한 플랑부아양 양식의 신 교황청으로 이루어져 있다. 플랑부아양은 돌로 만들어진 불꽃 모양의 격자를 의미하는데 14세기 말부터 발전해 15세기에 전성기를 이룬 프랑스 후기 고딕 양식 중 하나다. 사치스러웠던 교황 클레멘스 6세의 신 교황청이 이 양식으로 건립됨에 따라 아비뇽 교황청은 세계에서 가장 큰 고딕 양식 건축물로 이름을 올리게 되었다. 내부는 추기경들이 한자리에 모여 새 교황을 선출하던 연회 홀이나 대형 홀 둥 20여개의 방이 모두 공개되어 자유롭게 살펴볼 수 있도록 되어 있다. 동물의 형상이 조각된 다양한 모양의 기둥과 이탈리아의 화가인 마테오 조바네티의 화려한 프레스코화, 정교한 도자기 타일로 꾸며진 벽 등을 볼 수 있지만 대부분의 방은 텅 비어 있었다.


그런데 유럽의 작은 성당 어디에서나 느껴지는 성스러운 기운이 어디에도 없었다. 그것은 교황청 내부가 특별한 유물이 없이 비어 있어서만은 아닐 것이다. 교황들의 침실이었던 방에는 금은보화를 보관하던 지하 금고가 따로 마련되어 있었는데 당시 그들이 누린 호화롭고 탐욕스러운 사생활이 신의 전당에서 성스러움과 경건함을 모두 빼앗아 버린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권위를 이용해 누릴 수 있는 것이 많아질 때, 그것을 철저하게 억누르고 절제하지 못하면 결국 모든 것을 빼앗기는 길로 걸어간다는 것을. 순간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은 거대한 교황청이 초라하게 보였다.


교황청을 빠져 나와 광장을 가로질러 골목으로 들어섰다. 좁은 골목을 두어 번 지나고 성벽을 벗어나니 생베네제 다리가 보였다. 아비뇽이 가장 아름답게 보이는 자리는 생베네제 다리에서 바라보는 것이라는 말이 있다. 해가 모습을 숨기기 시작하는 시간이 되면 생베네제 다리의 끝까지 걸어가서 도시를 바라보라는데 주황빛으로 물든 교황청과 아비뇽을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론강의 모습이 너무나 환상적이라고 했다. 해질 무렵은 아니었지만 론 강의 중간에서 보는 풍경은 말 그대로 그림이나 엽서 한 장 같았다. 다리 중간에 있는 작은 예배당에 걸터앉아 강을 따라 지어진 성곽과 빛에 반사된 반짝이는 론강은 신비로운 느낌마저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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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뇽은 약 1200년 동안 근처에 있는 님과 아를에 비하면 작은 도시에 불과했지만 론 강을 이어 주는 생베네제 다리가 건설되면서 발전할 수 있는 기회를 잡게 되었다. 1171년 베네제와 그의 제자들이 지은 것으로 완공까지 14년이 걸렸다. 생베네제 다리는 길이가 900m, 21개의 기둥을 사이에 두고 22개의 거대한 아치를 이어 놓은 다리로 로마인들이 만든 퐁 뒤 가르교 이후 이 지방에 건설한 토목 건축의 걸작으로 평가되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1660년 대홍수가 일어나 대부분 유실되었고 복원 공사는 이뤄지지 못했다. 지금은 4개의 기둥과 그 사이를 이어 주는 아치, 그리고 다리를 건설한 베네제를 기리기 위한 작은 성당만 남아있다.


겨울 해는 짧아 구시가를 돌아다니다 다시 교황청 앞에 도착하니 어느새 해가 산 너머로 넘어가고 있었다. 교황청을 돌아 로셰돔 공원을 다시 올랐다. 벤치에 앉아 물들어가는 아비뇽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 그 중에 눈에 띄는 연인이 있었다. 커다란 여행 가방을 옆에 둔 남자와 가벼운 차림의 여자는 애틋하게 서로를 안고 있다. 직장을 옮겨 멀리 떠나는 남자와 아비뇽에 남은 여자인지, 함께 이별을 앞둔 마지막 여행을 온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이 보는 사람을 안타깝게 했다. 아무 이유도 모르지만 두 사람의 시간이 마지막이 아니기를 빌었다.


사람이든 물건이든 어떤 대상에 대한 내 사랑은 지나고 보면 늘 나 혼자만의 것이었다. 상대에게 끌려 애틋해지고 그리워지고 매일 만나고 싶어지면 그게 사랑이라 생각했고 그 사랑이 영원하기를 성급하게 꿈꿨다. 내 모든 시간과 꿈을 기꺼이 맞추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뒤돌아보면 언제나 나 홀로 낯선 곳에서 찬바람을 맞고 서 있었다. 얼굴과 가슴에 몰아친 흙바람도 사랑을 위한 시련이라 여기며 미련하게 견디며 기다리고 기다렸다. 그게 얼마나 어리석인 일이었는지는 한참 뒤 깨달았다. 온몸이 모래에 파묻혀 더 나아가지 못할 때가 되어서야 내가 어디에 서 있는지 돌아보고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난 단 한 번도 사랑을 의심하지 않았고 억울하지도 않다. 결실은 맺은 사랑만이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혼자만 영원한 사랑이라 믿고 애태웠어도, 사랑하는 사람에게 배신을 당했어도 사랑은 온전히 아름답다. 사랑이라는 그 마음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뜨겁고 설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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