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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종훈 Aug 04. 2019

누구와도 사랑에 빠질 것 같은 도시, 스페인, 세고비아

#1

장거리 운전을 고려해 새벽에 출발했지만 포르투갈에서 스페인 마드리드를 거쳐 세고비아까지의 여정은 쉽지 않았다. 4시 전에는 캠핑장 체크인을 마쳐야 텐트를 치고 시내로 나가는데 무리가 없을 것 같았다. 다행히 아슬아슬하게 예상했던 시간에 도착했다. 도시 외곽에 있는 캠핑장은 아담했지만 길게 펼쳐진 잔디와 캠핑장 옆으로 흐르는 프리오강이 시원하고 마음을 편하게 만드는 곳이었다. 저녁 10시에 캠핑장 출입구를 닫는다는 것을 확인하고 늦어도 9시 30분까지는 돌아오기로 했다.      

수도교와 세고비아 구시가지가 멀리 보이는 골목길에 주차를 했다. 유럽 자동차여행에서 주차는 항상 골칫거리다. 여행자 입장에서는 정식 주차장을 찾는 것이 여러모로 안전한 선택이지만 여행이 길어지면 주차비의 지출이 높아지면서 아껴야한다는 생각이 들게 마련이다. 관광지와 멀리 떨어져 있더라도 무료주차장을 찾게 된다. 그러다 ‘에이, 별일 없겠지?’하는 간사한 마음은 관광지와 가까운 골목에 주차하는 일을 만들고 결국 벌금 딱지를 떼이거나 견인을 경험하면 다시 정식 유료주차장으로 돌아오게 된다. 벌금도 내보고, 견인도 당해 봤지만 주차장 앞에 세워진 살인적인 주차비용을 보고나면 무료 주차의 유혹이 다시금 살아난다. 오늘 저녁도 골목가에 길게 늘어선 주차 행렬을 보고 마음이 흔들렸다. 오늘은 행운이 가득한 날이길 무작정 바라면서 말이다.      


#2

수도교 광장의 레스토랑 노천에 자리를 잡았다. 해가 완전히 넘어가고 노을도 사라질 때쯤 광장 주변의 가로등이 켜지면 저녁식사 손님을 받는 카페와 음식점들의 움직임이 분주해진다. 광장에 길게 펼쳐진 테이블에 앉아 스페인 카스티야 지방의 향토 음식인 ‘코치니요 아사도(새끼돼지 통구이 요리)’를 주문했다. 음식에 민감하지 않아 맛집을 일부러 찾아다니지는  않지만 여행에서 그 지역의 대표적인 요리를 먹을 기회가 있다면 빠뜨리진 않으려한다. 다른 여행자의 블로그에서 봤던 사진에는 어린 돼지를 통째로 구워 나온 모습이 다소 충격적이었던 기억이 있었다. 요리는 사진에서 본 모습 그대로였고, 종업원이 접시로 고기를 해체해 주고 사용한 접시를 깨버리는 퍼포먼스를 보여주는 것도 그대로였다.      

와인을 곁들인 저녁식사 시간은 요리보다 그날의 여행을 마치고 일행들과 나누는 여행이야기로 항상 즐겁다. 특히 각자 찍은 사진을 돌려볼 때는 감탄과 공감, 배움의 시간이 만들어지고 여행이 깊어진다는 생각이 들었다. 같은 공간을 돌아보면서도 보는 눈이 조금씩 다르다는 것이 늘 신기하고 새롭다. 세고비아의 저녁 풍경은 너무 아름다워 여행의 하루가 지나가는 것이 유난히도 아쉬웠다. 와인과 가로등 빛으로 발그레하게 달아오른 일행들과 마지막 잔을 부딪칠 때 누군가가 던진 한마디가 그날의 저녁을 두고두고 기억나게 했다.     

“세고비아 광장에 오래 앉아 있는 것은 위험해. 누구와도 사랑에 빠질 것만 같거든!”


#3

세고비아의 둘째 날은 자유시간을 갖기로 했다. 오랜 시간을 함께 움직여야하는 동행 여행은 반드시 중간중간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다. 아무리 친한 사람이라해도 누군가와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공유하는 일은 스트레스가 엄청난 일이다. 여러 번의 여행으로 얻은 큰 소득 중 하나가 바로 ‘따로 또 같이’를 적절하게 유지하는 것이다.      

나는 종일 수도교가 있는 광장의 골목을 돌아다닐 생각이었다. 다양한 색을 지닌 건물의 사이사이를 지나다가 파란색 건물 앞 벤치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내 옆으로 대학생 정도로 보이는 연인이 큰 피자 한판을 사이에 두고 있었다. 상대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고 앞만 바라보고 앉은 남자에게 여자는 일방적으로 이야기를 쏟아내고 있었다. 다양한 표정 변화와 손짓을 더해 열렬한 설명을 하고 있지만 남자의 표정은 전혀 받아들일 생각이 없어 보였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이 늘 행복하고 고생하지 않길 바라는 마음을 갖고 있다. 그것이 사랑의 마음이고 누군가를 아끼는 마음일 것이다. 그 마음으로 가족에게, 연인에게, 학생에게, 동료나 후배에게 충고나 조언의 말을 꺼내든다. 그 시작이 아름다운 것은 세상의 모든 사람이 안다. 하지만 듣는 이는 이해하고, 고마워하면서도 자신의 결정에 대한 타인의 이야기를 즐거워하지 않는다. 스스로 조언을 구하는 경우에도 자신을 바라보는 상대의 오해와 편견이 느껴지는 순간 불편함과 불쾌감을 느끼게 된다. 옳고 그름의 가치 판단 이전에 오롯한 존재로서의 자신에 대한 상대의 주관적 판단이 불편한 것이다. 누군가에게 조언을 해부고 싶은 순간이 찹아오면 상대를 사랑하고 존중하는 마음으로 말을 아끼는 것이 더 나을 때가 많다.     

‘어떤 말이든 하지 않을 때보다 좋은 것은 없다.’ 내 대인관계의 원칙 중 하나다.     


#4

광장이 끝나는 곳 계단 아래 파란색 연미복을 입은 노인이 자신보다 더 오래되어 보이는 카메라를 앞에 두고 심각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카메라 박물관에나 있을 커다란 상자처럼 보이는 클래식 카메라로 광장을 촬영하고 있는 중이었는데 자신이 원하는 구도가 잡히지 않는지 계속해서 카메라의 위치를 바꾸고 높이를 조절했다. 그렇게 30분을 조정하고 나서야 허리를 펴고 외부로 노출된 특이한 셔터를 눌렀다. 심각했던 표정도 사라지고 편안해보였다.      

내가 오랫동안 자신을 지켜본 것을 알았는지 눈을 찡끗하며 웃었다. 노인은 내 마음도 읽었는지 어깨를 으쓱하며 카메라를 살펴봐도 좋다는 표정을 짓는다. 조심스럽게 다가가 바늘구멍 같은 파인더를 들여다봤다. 그 안에는 오래된 흑백영화의 한 장면같은 세고비아 광장이 들어있었다.      

그 순간 나는 정말 세고비아의 누군가와 사랑에 빠진 것 같은 달뜬 마음으로 두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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