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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종훈 May 18. 2019

따뜻한 일몰을 품은 옛 도시, 프랑스 아비뇽

#1
어제 새벽에 출발하느라 맞췄던 휴대폰 알람소리에 번쩍 정신이 들었다. 지난밤 늦게 도착해 짐도 풀지 않고 침대 모서리에 앉았다 누웠던 게 기억났다. 참 오랜만에 느끼지는 기분 좋은 졸음에 피식 웃다가 그대로 잠이 든 것 같았다. 오랜 불면증과 두통에 시달려본 사람은 알 것이다. 베개에 머리만 갖다 대면 깊은 잠에 빠지고 아침이면 개운하게 눈 뜰 수 있는 게 얼마나 큰 행복인지 말이다. 늘 많은 일과 복잡한 생각으로 깊게 잠들지 못하는 나에게는 몸이 견디지 못하는 순간 잠깐 눈을 붙이는 밤이 많았다. 늘 약간 몽롱한 상태로 지내는 일상이었다.
 
그런데 지난밤은 오랜 운전이 주는 피로가 있었다해도 깊고 개운한 잠이었다. 프로방스에서 보낼 여유있는 여정과 맑은 공기, 일정하게 창문을 흔드는 바람소리 때문인 것 같았다.
 
창으로 돌아누워 커튼을 열었다. 낡은 창에 낀 이끼와 얼룩 사이로 보이는 아비뇽 구시가지가 그림처럼 보였다. 내 두통과 불면을 낫게 할 진통제는 일상을 떠나는 것뿐인가보다. 어쩌면 평생 이 두통과 불면증이 사라지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속상하거나 아프지 않았다. 내 삶에서 두통과 불면이 사라지면 여행을 떠나야할 이유도 사라질테니까.


#2
호스텔을 나와 광장을 가로질러 골목으로 들어섰다. 생 베네제 다리 안내판을 따라 좁은 골목을 두어 번 지나고 아비뇽을 둘러싼 성벽을 벗어나니 론강과 강 중간에서 끊어져 있는 생 베네제 다리가 보였다. 어느 책에선가 아비뇽 교황청이 가장 아름답게 보이는 자리는 이 다리에서 바라보는 것이라는 말이 있었는데 해질무렵 다리의 끝까지 걸어가 교황청 방향을 바라보면 하늘과 함께 주황빛으로 물든 교황청이 너무나 환상적이라고 했다.
 
다리로 올라가는 입구 매표소에서 한참을 망설이다 우선 교황청 건물을 살펴보고 돌아오기로 마음을 먹었다. 최고의 순간을 위해 생 베네제 다리에서 보는 아비뇽 풍경은 해질 무렵으로 미루는 것이 아무래도 최선일 것 같았다.
 


#3
이제는 구교황청이 되어버린 이곳은 광장에서 바라보는 웅장한 외관에서 겨우 과거의 영광을  찾을 수 있었다. 내부는 황량하고 유물이 거의 없다는 가이드북의 설명대로 내부는 빈 공간이 많았지만 빈 자리를 상상으로 메우는 재미가 있었다.
 
구교황청은 생각보다 넓었다. 건물 내부를 모두 둘러본 후 로세돔공원에 올랐다가 구시가지 골목을 돌아 다시 생 베네제 다리로 돌아오려면 시간이 빠듯했다. 평소 뜨거운 음식을 잘 먹지 못하는 내가 휴게실 자판기 커피를 서둘러 마시며 고개를 돌렸다가 멈칫했다. 모퉁이에 놓인 무심한 나무벤치가 나를 쳐다보는 것 같았다. 정해진 일정 안에서 움직여야 하는 여행자에게 어쩌면 여유가 없는 게 당연한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 여행은 빠듯한 생활을 멈추고 여유를 찾고자 온 것인데 여행에서조차 일정에 쫓겨 종종대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나무벤치에 앉아 여전히 뜨거운 커피를 옆자리에 가만히 내려두었다.

#4
이미 좋은 자리마다 아비뇽의 일몰을 구경하려는 사람들이 꽤 모여 있었다. 해가 더 내려가 아비뇽 구시가를 붉게 물들이는 시간이 되면 지금 남은 자리마저 사라질 것 같아 다리 끝 구석에 가방을 내려놓고 앉았다. 생각해보니 아비뇽 골목 풍경에 빠져 돌아다니느라 숙소를 나온 후 처음으로 앉았다는 것을 알았다.
 
과하다 싶을 정도로 극찬을 받은 아비뇽의 일몰은 충분히 그 이름을 얻을 만 했다. 빛바랜 구시가의 지붕이 다시 기와를 얹은 듯 붉게 변하고, 높이 솟은 교황청의 금빛 조각상이 더 노랗게 물들었다. 그리고 하늘은 파랑에서 노랑과 빨강으로 그리고 마침내 검정으로 변하고 하루의 작별을 소리없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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