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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종훈 May 02. 2019

푸른 종소리가 들리는 중세도시, 프랑스 고르드

#1

바위산에 지어진 중세도시 고르드(Gordes). 그곳의 아침 풍경을 보기 위해 어둑어둑한 새벽길을 달렸다. 도로변 카페에서 간단히 아침을 먹고 도시의 고속도로를 빠져나왔다. 한적한 국도로 접어들자 아늑한 시골 풍경이 펼쳐졌다. 집집이 아침을 준비하느라 피운 연기가 굴뚝을 타고 나와 새벽안개를 만나고 있었다. 20분 동안 자동차가 한 대도 지나가지 않는 작은 교차로에 차를 세우고 소박한 동상 아래서 하늘을 찍었다. 언제 봐도 신기한, 구름 없는 하늘이 그날따라 더 짙어 보였다.


#2

고르드는 여행책에 담긴 사진을 보고 내가 상상해 온 모습보다 더 아름다웠다. 마을 전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자리에서 사진을 여러 장 찍었지만, 마음에 쏙 드는 장면을 담을 순 없었다. 순간의 감정까지 담을 수 있는 카메라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마을 가장 높은 곳, 성당 앞에 차를 세우고 눈 앞에 보이는 골목길로 무작정 들어섰다. 여전히 골목 끝은 안개로 가물가물해 보였다. 창틀에 놓인 철 지난 산타클로스 인형도, 유리창에 붙은 낡은 테이프도 반갑게 느껴졌다. 내가 언제 이런 것들을 그리워했던가? 안개에 가려 보이지 않던 골목 끝에 닿았다. 그곳에 서니 내가 고르드에 들어서며 차를 세우고 사진을 찍던 마을 입구가 내려다보였다


#3

어느새 안개는 걷혔다. 걷다 보니 작은 종탑이 눈에 들어왔다. 그 건너편 벤치에 걸터 앉아 종이 울리길 기다렸다. 골목을 걸으며 어렴풋이 들은 종소리를 가까이에서 듣고 싶었다. 작고 푸른 종이 내는 소리가 ‘세상의 생각’을 잊게 할 것만 같았다. 아니, 그런 시간이 아주 잠깐이라도 있길 바라는 마음이었던 것 같다. 눈을 감고 5분을 기다려 15초의 종소리를 들었다. 그 푸른 종소리는 이 세상이 아닌 어느 곳과 잠시 연결되었다가 여운을 남기고 사라졌다


#4

건물 사이사이로 쏟아지는 볕을 따라 다른 골목으로 들어섰다. 켜켜이 쌓인 세월이 느껴지는 건물들을 하나씩 카메라에 담았다. 그러다가 뷰파인더 안으로 누군가와 눈이 마주쳐서 급히 카메라를 내렸다. 담배를 손에 든 할머니가 웃는 듯 마는 듯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사진을 찍진 않았지만 혹시나 무례가 아니었을까 하는 마 음에 목례를 건넸다. 할머니는 씩 웃으며 손을 흔들어 주셨다. 그 할머니의 표정이 내내 머릿속에 맴돌았다. 살아 보지 않은 삶과 시간에 공감하는 일은 누구든 참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에는 울고 웃는 긴 시간을 지난 뒤에야 받아들일 수 있는 일이 대부분이고, 어떤 것들은 끝내 절대로 이해할 수조차 없을지도 모른다. 인생은 공부하듯이 배울 수 없는 것이다. 한 살씩 나이를 먹어 가면서 스물, 서른, 마흔, 쉰, 예순 살이 돼야만 자물쇠가 열리는 일들과 감정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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