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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종훈 Apr 27. 2019

연인을 보내는 밤처럼 빛나는 스페인, 톨레도

#1 

고속도로를 빠져나와 들어선 톨레도 신시가지의 모습은 특징이 없었다. 우리나라 일산이나 분당의 모습과 흡사했다. 잘 정비된 도로를 통과해 구시가지 방향으로 이동했다. 길이 점차 좁아지고 도로 바닥이 울퉁불퉁한 돌로 바뀌기 시작하면 구시가지에 들어서는 것이다. 나는 유럽을 여행하며 이렇게 신시가지에서 구시가지로 들어서는 순간을 병적으로 좋아한다. 타임머신을 타고 시간을 거슬러 여행을 하는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2

예약한 호텔은 알카사르 궁전 바로 옆에 붙어 있었다. 호텔에 체크인만 하고 카메라와 스케치북을 들고 나왔다. 톨레도 구시가지 전경이 보이는 언덕으로 올라가기 위해서였다. 아주 오래전 유럽여행을 담은 책에서 본 한 장의 사진. 바로 그 장면을 실제로 보기 위해 이 자리에 온 것이나 다름없었다.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언덕길이라 구불구불 만들어진 도로는 감격의 순간을 한 번에 보여주지 않고 조금씩 공개하는 것 같았다. 마지막 굽은 길을 돌아 보였던 탁 트인 톨레도의 전경은 온몸에 전율을 흐르게 했다. 내 여행과 그림은 사진 한 장이 시작이었고, 바로 그 사진 속 풍경이 눈앞에 있었다. 구시가지 전체를 끼고 도는 타호강과 요새처럼 만들어진 외성, 왼쪽 중심에 있는 대성당과 오른쪽 알카사르는 완벽한 자리에 있었다. 그리고 구름 하나 없이 펼쳐진 하늘. 어떤 말로도 설명하기 힘든 판타지의 순간에 내가 존재하고 있는 것이 비현실적이었다.     



#3

엘 그레코의 작품 속 인물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만큼 독창적이지만 몽환적인 인물들의 눈빛은 보는 이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것 같은 불편함을 주기도 한다. 그의 그림 속 인물이나 풍경은 현대의 추상화에서처럼 기묘하게 일그러지고 뒤틀리고 변형되어 있어 그가 난시였거나 시각장애를 앓았을 거라는 학설도 있다. 이 천재화가는 많은 화가들에게 영향을 끼쳤는데 피카소는 엘 그레코의 <다섯 번째 봉인의 개봉>에서 영감을 받아 <아비뇽의 아가씨들>을 그렸다고 말했다.


 톨레도를 사랑한 그는 죽어서도 톨레도에 남아 산토 도밍고 엘 안티구오 수도원에 있는 가족묘지에 묻혔다. 하지만 아들 호르헤 마누엘이 수녀들과 말다툼을 벌이는 바람에 가족묘지는 산토르콰토 성당으로 옮겨졌고, 그 성당이 파괴되면서 엘 그레코의 무덤은 완벽하게 사라지고 말았다. 결국 물리적인 그의 존재는 완전히 사라졌지만 그의 그림과 그가 걸었던 거리, 그가 머물렀던 성당, 그가 생활한 톨레도는 과거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채 여전히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다.       

         

#4

호텔 근처에 있는 산타크루즈 미술관에서 그의 그림을 보고 돌아오는 골목길에서 올려다 본 하늘엔 하얀 반달이 걸려 있었다. 가로등이 희미한 골목 끝으로 걸어가면 그가 살았던 중세의 톨레도가 펼쳐질 것만 같았다. 도시의 가로등 빛이 더 진해지고 어둠이 짙어지기 시작했다. 호텔 입구에 거의 도착했을 무렵 난 다시 걸음을 돌려 주차장으로 가서 차를 꺼냈다. 이 순간 톨레도의 전경이 보이는 언덕은 하늘의 별들과 지상의 별들로 가득 차 있을 것 같았다.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도시를 밝히는 가로등이 별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나는 달이 한참 기울 때까지 걸음을 옮기지 못하고 스케치를 했다. 평생 다시 만날 수 없는 연인을 보내는 마지막 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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