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보드를 들으며, 모나미 볼펜으로 테이프를 감던 시절
낡은 고물이지만, 누군가에겐 보물 같은 80~90년대의 기억들을 팝니다.
가격은 공감 하나면 충분.
[고물상 추억팔기] 마이마이와 껌전지, 그리고 길보드 차트
거실 한구석을 떡하니 차지하고 있던 거대한 유리 장식장 안의 '전축'. 그 시절, 집에 전축이 있다는 건 곧 꽤 사는 집이라는 부의 상징이었습니다. 하지만 피 끓는 10대들에게 거실에 정좌하고 앉아 들어야 하는 전축은 너무 멀고 무거운 존재였죠. 우리에겐 언제 어디서나 나만의 음악 세계로 빠져들게 해줄 작고 소중한 네모 상자, '소형 카세트 플레이어'가 간절히 필요했습니다.
1. 길보드 차트와 '영어 듣기'라는 마법의 주문
당시 정품 카세트테이프 하나 가격은 4~5천 원 선이었습니다. 떡볶이가 몇백 원 하던 시절이니 학생 주머니 사정으론 꽤 부담스러웠죠. 하지만 우리에겐 훌륭한 대체재가 있었습니다. 바로 시장 어귀나 번화가 구루마(리어카)에서 파는 1천 원짜리 불법 복제 테이프, 일명 '길보드(길거리+빌보드) 차트'였습니다. "최신 X세대 댄스 히트 쏭 모음" 같은 테이프를 파는 리어카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가 그 시절 대중음악의 진짜 인기 척도였습니다.
음악을 들을 테이프는 구했는데 문제는 기계였습니다. 당시 일본의 소니(SONY), 아이와(AIWA), 파나소닉 제품은 정식 수입이 안 되거나 너무 비싸서 언감생심이었습니다. (소니의 제품명이었던 '워크맨'이 당시 모든 휴대용 카세트를 통칭하는 보통명사로 쓰였죠.) 대안으로 삼성 마이마이, 금성 아하, 대우 요요 같은 국산 소형 카세트가 있었지만, 이 역시 10만 원을 육박하는 고가품이었습니다.
어느 날, 잘사는 친구 원보가 가방에서 매끈한 삼성 마이마이를 꺼내 들었습니다.
"야, 원보! 너 이거 샀냐?!"
"어, 나 이거 영어 듣기 공부하려고 엄마한테 사달라고 했지."
새빨간 거짓말이었습니다. 원보의 마이마이 속에선 영어 회화 대신 015B의 노래가 흘러나왔으니까요. 하지만 전국의 수많은 학생들이 부모님을 조를 때 쓰던 가장 강력하고도 고전적인 마법의 주문은 바로 그 '영어 듣기 평가'였습니다.
2. 사촌 형의 은혜, 그리고 등짝의 스피커
원보를 부러운 눈으로 쳐다보며 속만 태우던 어느 날, 기적이 찾아왔습니다. 대학생이 된 사촌 형이 삐까뻔쩍한 소니 워크맨으로 갈아타면서, 본인이 쓰던 '삼성 마이마이'를 제게 양도해 준 것입니다!
비록 최신형은 아니었지만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었습니다. 제가 물려받은 마이마이는 특이하게도 기기 뒷면에 아주 작은 '스피커'가 달려 있어서, 이어폰을 꽂지 않아도 음악을 들을 수 있는 모델이었습니다.
가방 속에 묵직한 카세트테이프 대여섯 개를 무기처럼 챙겨 넣고 다니던 시절. 신승훈의 애절한 발라드를 시작으로, 이승철의 보컬에 취하고, 신해철의 철학적인 가사에 심취하다가, 서태지와 아이들의 등장에 심장이 터질 듯 흥분했던 저의 찬란한 10대 감성은 모두 그 낡은 마이마이 속에서 빙글빙글 돌아가며 완성되었습니다.
3. 용산발 '소니 워크맨'이 안겨준 신세계
시간이 흘러 고등학생이 되던 해, 고등학교 입학 기념으로 아빠가 용산 전자상가에서 꿈에 그리던 '소니 워크맨'을 사다 주셨습니다.
포장을 뜯는 순간, 저는 엄청난 문화 충격에 휩싸였습니다. 국산 마이마이와는 비교도 안 되는 얇고 세련된 메탈 바디. 그리고 건전지의 혁명이라 불렸던 길쭉하고 납작한 '껌전지(충전지)'! 하지만 진짜 신세계는 따로 있었습니다. 이어폰 줄 중간에 달려 있는 '유선 리모컨'이었습니다. 굳이 가방이나 주머니에서 카세트를 꺼내지 않아도 리모컨 버튼 하나로 재생과 정지를 할 수 있다니! 게다가 테이프 앞면이 끝나면 찰칵! 하는 소리와 함께 알아서 뒷면으로 넘어가 재생되는 '오토리버스(Auto-reverse)', 노래와 노래 사이의 공백을 감지해 다음 곡으로 귀신같이 감아주는 기능까지.
그야말로 외계인이 만든 것 같은 하이테크 기술의 집약체였습니다.
4. '국산'의 격세지감을 느끼며
그 시절 워크맨을 만지작거리며 우리는 입버릇처럼 말했습니다. "역시 미제나 일제가 최고야. 국산 전자제품이 다 그렇지 뭐."
하지만 강산이 몇 번이나 변한 지금, 세상은 완전히 뒤바뀌었습니다. 당시 워크맨의 절대 권력이었던 일본의 전자 기업들은 쇠락의 길을 걸었고, 우리가 "국산이 그렇지 뭐"라며 아쉬워했던 삼성과 LG 같은 대한민국 전자 제품들이 전 세계 시장을 압도하며 1등을 달리고 있으니까요.
제 손에 들려 있는 최신형 스마트폰을 볼 때면, 마이마이와 워크맨 사이에서 묘한 열등감을 느끼던 그 시절이 떠올라 참으로 엄청난 격세지감을 느낍니다.
오늘 퇴근길에는 스마트폰 스트리밍 앱을 켜서 조용히 서태지와 아이들의 노래를 검색해 봐야겠습니다. 화면을 터치하는 것만으로 선명한 노래가 흘러나오겠지만, 제 귓가에는 여전히 플라스틱 테이프가 돌아가며 나던 미세한 '스으윽' 백색소음이 환청처럼 들려올 것만 같습니다.
� [그때 그 시절 TMI] 카세트테이프 편
1. 워크맨(Walkman)은 고유명사? 보통명사?
일본 소니(SONY)사에서 1979년에 처음 출시한 휴대용 카세트 플레이어의 '상표명'입니다. 하지만 이 제품이 전 세계적으로 초대박을 치면서, 호치키스나 대일밴드처럼 소형 카세트 플레이어 전체를 뜻하는 대명사로 굳어졌습니다. 국내에서는 삼성 마이마이(my my), 금성(현 LG) 아하(AHA), 대우 요요(YOYO)가 3대장으로 치열한 점유율 다툼을 벌였습니다.
2. 혁신 중의 혁신, 껌전지
소형 카세트 플레이어를 얇게 만들기 위해 고안된 니켈-카드뮴(Ni-Cd) 충전지입니다. 모양이 마치 은박지에 싸인 껌처럼 납작하고 길쭉하게 생겨서 '껌전지'라 불렸습니다. 이 전지 하나면 뚱뚱한 AA 건전지 없이도 얇고 날렵한 디자인이 가능했죠. 전용 충전기에 껌전지를 꽂아두면 빨간불이 들어오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3. 테이프 감기의 영혼의 단짝, '모나미 153 볼펜'
건전지(특히 껌전지)는 수명이 매우 짧았습니다. 노래를 듣는 것보다 빨리 감기(FF)나 되감기(REW)를 할 때 모터가 돌면서 배터리가 엄청나게 닳았죠. 그래서 배터리를 아끼기 위해 카세트에서 테이프를 뺀 뒤, 육각기둥 모양의 '모나미 153 볼펜'을 테이프 톱니바퀴 구멍에 끼우고 헬리콥터 프로펠러처럼 빙글빙글 돌려서 수동으로 노래를 감던 눈물겨운 꿀팁이 있었습니다.
※ 이미지 출처
① X세대 인기가요 https://m.bunjang.co.kr/products/399537592
② 마이마이 광고
https://news.samsung.com/krsim/에서-만난-삼성전자-이야기_-추억의-카세트-마이/
③ 마이마이 https://namu.wiki/w/mymy
④ 금성 아하
https://col.science.go.kr/web/MetaDetail.do?menuIdx=480&metaId=meta_000003358
⑤ 대우 요요
https://col.science.go.kr/web/MetaDetail.do?menuIdx=480&metaId=meta_000003359
⑥ 서태지와 아이들 https://brunch.co.kr/@grina/18
⑦ 소니 워크맨
https://www.11st.co.kr/products/5510776237?srsltid=AfmBOooks9vAa_gW6jdc3GHlxT77sidnDUR0T1EnHiII5dzdTH7l1FQ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