쥐 잡아먹는 다이아나에 놀라고 지적인 맥가이버 보며 꿈을 키우던
낡은 고물이지만, 누군가에겐 보물 같은 80~90년대의 기억들을 팝니다.
가격은 공감 하나면 충분.
지금이야 넷플릭스, 디즈니플러스 같은 OTT 앱을 켜면 전 세계의 수만 편의 드라마가 쏟아지지만, 80~90년대는 사정이 달랐습니다. 우리에게 '미드(미국 드라마)'란 토요일 오후나 일요일 아침, 신문 편성표에 빨간펜으로 동그라미를 쳐가며 기다려야만 만날 수 있는 귀한 손님이었습니다.
성우들의 찰진 더빙 목소리와 함께 브라운관을 채우던 파란 눈의 주인공들은 단순한 드라마 캐릭터를 넘어 우리들의 우상이자 상상력의 원천이었습니다.
그 시절 우리에겐 어벤져스보다 강력한 형님들이 안방극장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 선봉에는 뒷머리를 길게 기른 <맥가이버> 형님이 있었죠. 총 대신 스위스 아미 나이프(일명 맥가이버 칼)와 껌종이, 클립 하나로 시한폭탄을 해체하고 탈출구를 만들 때면 전국 국민학생들의 입에서 탄성이 터졌습니다.
당시 액션스타라고 하면 근육이 우락부락한 람보나, 코만도 또는 성룡, 척노리스 같은 무술로 상대를 제압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죠. 맥가이버는 호리호리한 체격에 싸움도 그리 잘 하지 못했던 캐릭터였습니다. 숙제에 괴로워하며 학교 공부는 왜 해야 하는 것인가 하는 원론적인 질문에 '맥가이버' 아저씨가 답을 줬달까요?
테크놀로지의 로망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보닛 위에서 빨간 스캐너 램프가 좌우로 움직이던 <전격 Z작전>의 인공지능 스포츠카 '키트'. 주인공 마이클 나이트가 손목시계에 대고 "키트, 도와줘!"라고 외치면 스스로 운전해서 달려오던 그 모습은 지금의 AI 자율주행 자동차의 선조 격이라고 할 수 있었죠. 사건이 모두 해결이 되면 마이클은 미녀와 키스로 마무리가 되는데 어린 시절 그것이 어찌나 부럽던지.
또한 다다다다~ 하는 프로펠러 소리와 함께 비장한 신시사이저 BGM이 흐르던 <에어울프>는 또 어땠나요. 사막의 바위산 동굴에서 튀어나오던 검은색 초음속 헬기의 위용은 남학생들의 심장을 미친 듯이 뛰게 했습니다.
여기에 느린 화면과 "띠띠띠띠~" 하는 전자음으로 시속 100km를 달림을 표현했던 <600만 불의 사나이>는 어떤가요? 그의 단짝 <소머즈>도 있습니다. 스티브 오스틴 대령의 몸을 개조하는 데 들어간 600만 달러는 시리즈가 시작된 1974년 기준으로 현재(2026년) 가치로 환산하면 대략 4,500만 달러 ~ 5,000만 달러(한화 약 600억 원 ~ 670억 원)에 달합니다. 당시 가장 몸값이 비쌌던 스포츠 스타를 보면 NBA의 카림 압둘자바의 연봉이 45만불였다고 하니 엄청난 금액입니다.
지금 돈으로 단순 환율로 계산해도 100억 가까이 되는데 당시에는 훨씬 더 비싼 아저씨였겠네요.
그리고 비행기 공포증이 있는 B.A.를 매번 수면제로 기절시키고 비행기에 태우며 작전을 수행하던 유쾌한 해결사 <A특공대>까지. 이 형님들이 악당을 소탕할 때면 우리들의 학업 스트레스도 통쾌하게 날아갔습니다.
80년대 최고의 충격적인 명장면을 하나 꼽으라면 단연 <V(브이)>입니다. 인간과 똑같이 생긴 우호적인 외계인인 줄 알았는데, 사령관 다이아나가 턱을 쩍 벌려 커다란 흰쥐를 산 채로 꿀꺽 삼키던 장면! 찢어진 인공 피부 사이로 징그러운 초록색 파충류 비늘이 드러났을 때의 그 충격은 다음 날 학교 전체를 뒤집어 놓았습니다. 극중 줄리엣이 찰싹 달라붙는 타이즈를 입고 고통 당할 때 국딩의 눈에 약간 성적인 야릇함에 흥분했던 기억도 있습니다.
이 기괴하고 미스터리한 분위기는 90년대 <엑스파일(The X-Files)>로 이어집니다. 으스스한 휘파람 소리의 오프닝 음악만 들어도 등골이 서늘해졌죠. "진실은 저 너머에 있다"는 명대사와 함께 외계인, 돌연변이, 심령 현상을 파헤치던 멀더와 스컬리 요원. 밤에 화장실도 못 갈 만큼 무서웠지만, 도저히 TV 앞을 떠날 수 없게 만드는 마력이 있었습니다.
액션과 공포만 있었던 건 아닙니다. 우리의 서툰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낸 브라운관 속 친구들도 있었습니다. <케빈은 12살(원제: The Wonder Years)>은 세피아 톤의 따뜻한 화면 속에서 절친 폴, 그리고 첫사랑 윈니 사이에서 갈등하며 성장통을 겪는 케빈의 내레이션은 사춘기에 접어들던 우리의 마음을 대변해 주었습니다.
나중에 무한도전에서 '명수는 12살'이라는 에피소드로 오마주하기도 했죠.
그리고 멕시코 초등학생들의 사랑과 우정을 담은 <천사들의 합창>은 그야말로 국민 드라마였습니다. 도도하고 새침한 부잣집 백인 소녀 '마리아 조아키나'와, 그녀를 맹목적으로 짝사랑하던 착하고 가난한 흑인 소년 '시릴로'의 엇갈린 로맨스에 온 동네가 안타까워했죠. 매번 말썽을 피워도 따뜻하게 안아주던 '히메나 선생님'은 우리 모두의 이상형이기도 했고 그녀가 원래 에로배우 출신이다 라는 확인되지 않은 소문도 있었습니다. 천사 같은 선생님이 그럴리 없어 하며 말다툼을 하기도 했습니다.
나이를 먹고 보니 '공대에 가지 않고 의대를 선택한 것이 바로 그가 머리가 좋았음을 증명하는 것이었나.' 하는 생각이 드는 16살 의사, <천재 소년 두기>. 에피소드 마지막에 턱을 괴고 파란색 도스(DOS) 화면 컴퓨터에 또각또각 타자를 치며 일기를 쓰면서 마무리가 되는데 당시에는 컴퓨터를 다룬다는 것 자체가 지적인 상징이었나봅니다. 두기가 하루를 일기로 마무리하면 우리도 왠지 모르게 한 뼘 더 철이 든 것 같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학교 숙제 일기도 하기 너무 귀찮은 일이었지만 컴퓨터가 있다면 매일 같이 일기를 쓸 수 있을 것 같은 착각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가족들이 거실에 모인 주말 밤에는 날카로운 추리가 우리를 기다렸습니다. 늘 구겨진 바바리코트를 입고 시가를 문 채 "아, 우리 마누라가 그러는데 말이죠..."라며 어수룩한 척 범인을 방심시키던 <형사 콜롬보>. 방을 나가려다 말고 홱 돌아서며 "아, 한 가지만 더..." 하고 결정적 증거를 들이밀 때의 짜릿함은 최고였습니다.
반면 언제나 인자한 할머니 미소로 타자기를 두드리던 추리 소설가 할머니도 있었습니다. 바로 <제시카의 추리극장>이죠. 명탐정 코난이나 김전일의 원조 격이랄까요? 할머니가 발길을 닿는 곳마다 어김없이 살인 사건이 일어나는 '사신(?)' 같은 징크스가 있었지만, 할머니의 명쾌한 추리 과정을 지켜보는 재미는 쏠쏠했습니다.
� [그때 그 시절 TMI] 얼굴은 서양인, 목소리는 한국인?
1. 얼굴은 서양인, 목소리는 한국인? (더빙의 마법)
그 시절 외화가 우리에게 이질감 없이 훅 다가왔던 가장 큰 이유는 전설적인 성우분들의 열연 덕분이었습니다. 특히 맥가이버의 경우, 배한성 성우 특유의 비음 섞인 넉살 좋은 목소리가 입혀지며 원작 주인공보다 훨씬 더 친근하고 매력적인 '우리 형'이 되었습니다. "할아버지께서 말씀하셨지"라는 명대사 역시 그의 목소리를 타고 전 국민의 유행어가 되었습니다. "스컬리!"를 애타게 부르던 멀더 역의 이규화 성우님 등. 배우 본래의 실제 목소리를 들으면 오히려 "이건 가짜야!"라고 느낄 정도로, 성우들의 더빙은 작품에 완벽한 생명력을 불어넣었습니다. 유머러스, 가볍고 민첩한 목소리의 배한성, 약간 냉소적이지만 단정한 목소리의 이규화. 여러분들은 어느 쪽인가요?
2. 꼬마 천재들의 화려한 변신 (두기와 케빈의 근황)
천재 의사였던 '두기' 역의 닐 패트릭 해리스는 현재 할리우드에서 가장 잘 나가는 만능 엔터테인먼트가 되었습니다. 시트콤 <하우 아이 멧 유어 마더>의 바람둥이 캐릭터로 대히트를 쳤고, 오스카와 토니상 시상식 사회까지 맡을 정도로 대배우가 되었죠. 반면 <케빈은 12살>의 프레드 새비지는 배우보다는 <모던 패밀리> 같은 유명 시트콤의 연출가와 제작자로 변신해 감독으로서 명성을 떨치고 있습니다. 꼬마들이 참 잘 컸죠?
3. 맥가이버 vs 순돌이 아빠, 승자는 누구?
맥가이버 형님의 전공은 '화학'일 것 같지만, 극 중 설정으로는 웨스턴 공대 '물리학' 전공입니다. (물론 화학 지식도 천재적이지만요!) 당시 한국에서는 "맥가이버와 <한지붕 세가족>의 순돌이 아빠(임현식)가 붙으면 누가 이길까?" 하는 농담 섞인 논쟁이 있었습니다. 맥가이버가 클립 하나로 폭탄을 만든다면, 순돌이 아빠는 드라이버 하나와 '허허허' 웃음 한 방이면 동네 가전제품을 싹 고쳐내는 'K-맥가이버'였으니까요. 두 천재 공학도의 대결은 지금 생각해도 웃음이 절로 나는 추억의 한 페이지입니다.
※ 이미지 출처
① 신문 편성표 : https://www.threads.com/@jejugreenfarm/post/DJWXTHkJxDO/media
② 에어울프 : https://www.clien.net/service/board/park/16487287
③ 전격Z작전, A특공대, 순돌이 아빠 : 나무위키
④ 600만불의 사나이 : https://m.blog.naver.com/townsley/110114147106
⑤ V : 나무 위키 , https://m.blog.naver.com/ysseo01/222068911209
⑥ 케빈은 12살 : https://m.blog.naver.com/sampmusic/222276161194
⑦ 천사들의 합창 : https://watcha.com/ko-KR/contents/tEZ9V9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