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길 따짜들과 방구석 꼬마 디자이너
낡은 고물이지만, 누군가에겐 보물 같은 80~90년대의 기억들을 팝니다.
가격은 공감 하나면 충분.
문방구 벽면, 집게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던 커다란 전지 크기의 종이판들. 20원, 30원짜리 동전 하나면 살 수 있었던 이 얇은 종이 한 장은 남자아이들에게는 짜릿한 일확천금의 카지노였고, 여자아이들에게는 화려한 부티크(Boutique)였다.
오직 손가락의 감각과 가위 하나로 모든 상상력을 동원하며 놀았던 그 시절, 우리의 가장 대중적인 자산이었던 '종이 장난감'들을 추억해 본다.
커다란 종이판에 다닥다닥 붙어 있던 동그란 딱지들. 조심스레 손가락으로 뜯어내다 테두리가 찢어지기라도 하면 그렇게 속이 쓰릴 수 없었다. 스트리트 파이터나 로보트 태권 V 같은 그림도 중요했지만, 이 딱지의 진짜 가치는 테두리에 찍힌 '별(★)의 개수'와 '글자 수', 그리고 '전쟁 계급'에 있었다.
① 낭만과 비위생을 넘나드는 기술들
동그란 딱지는 빳빳하게 접어 치는 네모 딱지와 달리 고도의 테크닉이 필요했다.
1. 멀리 날리기:
왼손 엄지와 검지로 딱지를 쥐고 오른손 새끼손가락 끝에 딱지를 걸어 용수철처럼 튕겨 누가 더 멀리 날아가는지 겨루는 게임. 딱지를 주어와야 하고 한 장씩 먹기 때문에 승부사 기질이 있는 친구들에게는 다소 시간이 오래걸리는 것이 단점.
2. 입김 불기:
딱지들을 수십 장씩 탑처럼 쌓아놓고, 가위바위보로 순서를 정해 순서대로 입을 모아 "파!!!" 하고 숨을 내뿜어 뒤집어진 만큼 쓸어 담았다. 침이 엄청 튀었고 폐활량(?)이 좋은 친구에게 유리한 게임.
3. 도장 찍기:
역시 딱지들을 수십 장씩 탑처럼 쌓아놓고, 주먹 밑바닥에 입김을 호호 불거나 침을 살짝 바른 뒤 바닥에 있는 딱지를 향해 "착!" 내리찍어 손에 붙여 올려서 붙어 올라가면 계속 먹는 게임. 손날에 땀이 많으면 유리한 게임으로 시작 전에 침을 충분히 발라 놓아야 한다.
② "네가 접어!" 골목길 카지노의 시작
동그란 딱지의 진정한 묘미는 바로 '배팅(도박)'에 있었다. 승부사 기질이 다분한 아이들은 딱지를 수십 장씩 걸고 일생일대의 승부를 벌였다. 룰은 이렇다. 공격하고 싶은 아이가 상대 아이에게 "네가 접어!"라고 외친다. 딜러가 된 아이는 등 뒤에서 딱지 더미를 대충 반으로 갈라 양손에 쥐고 주먹을 내밀면서 조건을 건다.
"글높! (글자 수 높은 쪽)" "별낮! (별 개수 적은 쪽)" "전쟁높! (계급 높은 쪽)"
그러면 공격하는 쪽은 걸 딱지를 손에 쥐고 한쪽 손을 가리킨다.
양쪽 딱지의 맨 위장을 공개해 승패를 확인하는 그 찰나의 쫄깃함이란! 공격과 딜러조차 결과를 모르는 완전한 랜덤 게임이었기에 짜릿함은 배가 되었다.
가장 피 터지는 건 '전쟁(계급)'으로 승부할 때였다. "내 장군 딱지에 별이 세 개인데, 네 탱크가 어떻게 이겨!"라며 눈에 불을 켜고 싸우기 일쑤였다. 동네마다 '탱크가 장군을 이긴다', '스텔스기가 최고다' 등 룰이 다 달라서, 다른 동네 원정이라도 가면 마치 고스톱 하우스 룰을 정하듯 게임 전부터 치열한 기싸움을 벌이곤 했다.
남자아이들이 모래 바닥에서 침을 튀기며 딱지를 넘길 때, 여자아이들은 방바닥에 배를 깔고 엎드려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했다. 그녀들의 앞에는 눈이 얼굴의 반을 차지하는 예쁜 종이 인형과 화려한 드레스들이 놓여 있었다.
① 꼬마 디자이너들의 숨 막히는 가위질
종이 인형 놀이의 8할은 '가위질'이었다. 이미 대부분 잘려 있어 뜯기만 하면 되는 종이 딱지와는 달리 종이 인형은 인형과 옷의 외곽선을 따라 1mm의 오차도 없이 가위를 놀려야 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생명줄은 옷의 어깨와 허리에 볼록 튀어나온 '하얀색 탭(고리)'이었다. 이 탭을 잘못해서 싹둑 잘라버리는 날엔, 그 예쁜 드레스는 영영 인형에게 입힐 수 없는 폐기물이 되었다.
② 달랑거리는 목, 눈물의 응급 수술
가위질을 무사히 마치면 본격적인 역할극이 시작된다. 학교 갈 때 입는 옷, 파티에 갈 때 입는 드레스 등 상황에 맞춰 어깨 탭을 접었다 폈다 하며 옷을 갈아입히며 '엄마 학교 다녀 올게요~' 라며 대사를 하고 종이 인형을 깡총깡총(팔 다리 관절이 꺾이질 않으니) 이동시킨다.
이 종이 인형에게는 치명적인 아킬레스건이 있었으니, 바로 가냘픈 '목'이었다. 머리카락은 풍성하고 무거운데 목은 너무 얇아, 며칠만 가지고 놀면 목이 앞뒤로 꺾여 '달랑달랑'해지기 일쑤였다. 목이 꺾인 인형을 보며 울상을 짓던 소녀들은 곧 비장한 표정으로 '스카치테이프'를 꺼내 들었다. 인형의 뒷목에 테이프를 여러 겹 덧대어 깁스를 해주는 그 순간만큼은 모두가 진지한 외과 의사였다.
① 종이 축구 놀이
문방구에서 단돈 100원이면 훌륭한 잔디 구장 하나를 소유할 수 있었다. 빳빳한 종이 위에 양 팀 선수들이 포메이션에 맞춰 역동적인 포즈로 그려진 '축구 게임판'이었다.
작은 플라스틱(가끔 책받침을 오리기도 한다.) 공을 가지고 볼펜이나 샤프, 연필 등으로 튕겨 상대방의 선수의 몸에 닿지 않으면서 골대에 넣으면 되는 게임. 사이 사이를 요리조리 조심스럽게 이동해야 하는데 너무 짧게 이동하면 제한을 두는 경우도 있었다.
② 종이 야구 놀이
축구 놀이와 마찬가지로 작은 플라스틱(가끔 책받침을 오리기도 한다.) 공을 튕긴다.
세워져 있는 수비수를 피해 최대한 멀리 보내 안타, 홈런을 치면 점수를 얻을 수 있지만 공수가 전환되는 축구와는 달리 야구는 조금 게임이 루즈한 편이라 크게 인기가 있던 게임은 아니었다.
그 시절 국민학생들에게는 배트, 글러브가 귀했던 시절이라 이런 놀이로 대리 만족을 했었다.
지금 아이들은 태블릿 PC 안에서 손가락 터치 한 번으로 캐릭터의 옷을 수백 벌씩 갈아입히고, 화려한 이펙트가 터지는 모바일 축구/야구 게임으로 승부를 겨룬다. 편리하고 화려해졌지만, 왠지 그 시절 100원짜리 동전으로 누렸던 낭만에는 비할 바가 못 되는 것 같다.
침이 마르게 싸우며 "별높!"을 외치던 골목길의 텐션, 그리고 가위에 온 신경을 집중하며 인형의 옷을 오려내던 방구석의 고요함. 모든 것이 풍족해진 지금, 유독 그 퀴퀴하고 빳빳했던 20원짜리 종이 냄새가 그리워진다.
① 동그란 딱지 테두리에 찍힌 '별'의 정체는?
동그란 딱지에서 화려한 그림보다 더 중요했던 건 테두리에 인쇄된 '별(★)'의 개수와 '글자 수'였습니다. 인쇄소에서 빈 여백을 채우기 위해, 혹은 아이들의 놀이를 위해 무작위로 넣었던 이 기호들은 동네 골목에 도착하는 순간 절대적인 '권력의 척도'가 되었습니다. 별 5개짜리, 6개짜리 딱지를 뜯어냈을 때의 쾌감과, 별 1개짜리 딱지를 보며 느끼는 실망감. 어쩌면 우리는 이 동그란 종이 쪼가리를 통해 현대 게임의 '확률형 아이템(가챠)'의 매운맛을 일찌감치 배우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② 종이 인형 목 부러짐 방지 '코팅 시술'
몇 번만 옷을 갈아입히면 목이 꺾여버리는 종이 인형의 비극. 이를 막기 위해 당시 좀 놀 줄 알았던(?) 동네 언니들은 아예 가위질을 하기 전, 인형 뒷면 전체에 스카치테이프나 넓은 박스 테이프를 빈틈없이 붙이는 '전면 코팅 시술'을 감행했습니다. 이렇게 코팅된 인형은 아무리 옷을 험하게 갈아입혀도 절대 목이 꺾이지 않는 불사신이 되었죠. 꼬마들의 생존 지혜는 언제나 열악한 환경 속에서 눈부시게 발전했습니다.
③ 저작권이 뭔가요?
그 시절 20원짜리 종이 딱지와 인형에는 '저작권'이라는 개념이 희박했습니다. 딱지 한 판에 <별나라 손오공>의 손오공과 <우주소년 아톰>의 아톰, 그리고 '로보캅'과 '후뢰시맨'이 나란히 어깨동무를 하고 있는 혼돈의 멀티버스(크로스오버)가 흔했죠.
종이 인형 역시 당대 최고의 인기 스타(김완선, 강수지, 최진실 등)나 만화 주인공(들장미 소녀 캔디, 밍키)의 얼굴을 미묘하게 베껴 그린 무허가 짝퉁 아이템이 수두룩했습니다. 지금이라면 당장 수십억 원의 소송이 걸릴 일이지만, 당시 문방구 앞은 전 세계 모든 캐릭터와 스타들이 사이좋게 대통합을 이루던 평화로운(?) 무법지대였습니다.
※ 이미지 출처 :
① 딱지 :
http://oldgift.com/m/product.html?branduid=114946, https://namu.wiki/w/딱지
② 종이 인형 :
https://www.pinterest.com/pin/83035186864657230/ ,
https://https://blog.naver.com/dp98f232/220250446768
③ 야구 놀이 : https://global.gmarket.co.kr/item?goodsCode=474848837
④ 축구 놀이 : http://www.oldgift.com/m/product.html?branduid=1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