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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 12 거꾸로 매달린 남자

새로운 선의 기점

by 오필

라온델의 공방

공방의 문을 걸어 잠갔던 라온델은 한동안 아무도 공방에 들이지 않았다. 그렇게 좋아하던 작업들을 뒤로하고, 공방의 불도 켜지 않은 채 사색에 빠졌다. 사색을 한지 하루 이틀이 지나자 그는 사색마저 작업인양 몰두해서 했다. 그를 찾아와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그의 이름을 부르는 음성이 그에게는 들려도 들리지 않는 상태였다. 그가 사색하며 바라본 공방의 모습을 감정도 사유도 아닌 침묵의 낙차라고 느낄 때 즈음 자신의 세상이 아닌 사람들의 세상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이른 시간, 그는 사색을 하는 동안 들려도 들리지 않던 점술가의 발걸음이 소리를 들었다. 늘 같은 시각에 천막으로 향하던 소리를 들으며 그는 생각했다. '사람들의 세상은... 계산의 영역인가, 아닌가?' 점술가의 발걸음은 라온델이 계산해 온 세계의 리듬과는 전혀 맞지 않았다. 계산대로라면 이 대륙에서 점쟁이라는 일을 업으로 삼을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라온델은 계산밖의 그 흐름이 자연스럽다고 느꼈다. 그렇게 느끼자 자연스럽게 자신의 생각에 스스로 답했다.

"사람들의 세상은 아직은 계산의 영역이다. 그러나 관점이 바뀌면 계산해야 할 범위도 달라진다."


라온델의 사색은 어느덧 자기 자신에게서 세상을 향했다. 라온델에게 세상은 오랫동안 하나의 정답을 요구해 왔다. 그가 바라보는 관점에서의 정답, 그의 공식대로 해석되는 질서, 그가 이해할 수 있는 구조.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것을 자신은 알고 있었기에, 자신이 먼저 알아냈기에 그가 바라보는 관점은 언제나 정답이었다. 하지만 관점을 세상으로 바꾸자 그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정답이라 부르는 것이 사람들의 정답과 같을 필요는 없지. 세상이 요구하던 정답은 모두의 정답이 아닌 나에게 정답을 요구하던 자들이 바라본 세상의 관점이다.' 라온델은 사색을 통해 자신이 바라보는 관점의 정답이 사람들이 바라본 관점의 정답과 다를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는 계산이 틀리고 맞는 문제가 아닌, 정답과 오답도 아닌 관점의 차이, 다름을 말하는 것이었다. 자신의 정답이 누군가에겐 오답일 수 있음을 말했다. 생각을 갈무리한 그는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누군가 옆에 있는 양 대화하듯 혼잣말을 했다.

"내가 왕궁에 입궁하지 못한 건, 나의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님을 세상 모두가 알아. 내가 황궁의 부름을 받지 못한 건 나의 재능이 부족해서가 아니야. 단지 왕궁이 바라보는 관점이 나와 따랐을 뿐이고, 황궁이 요구하는 관점이 나와 달랐을 뿐이다. 이는 문제의 구조가 서로 다른 좌표 위에 놓여 있었던 셈이야... 나의 관점대로라면 내가 그곳, 황궁에서 일했으리라. 그러나 황궁의 관점에서는 재능이 중요한 요소가 아니었을지도 몰다. 혹은 내 재능이 황궁에서 필요치 않을 수도 있지."


그는 어느덧 작업대 앞에 서있었다. 무언가를 급하게 계산해야 하듯이, 자신의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듯이 머리를 부여잡았다. 이내 가빠지려는 숨을 부여잡으며 작업대에 손을 올려 진정한다. 혼잣말을 하며 받아들인 세상이 그에게는 드문 종류의 인정이었다. 재능의 부족이 아니라 관점의 불일치라는 사실, 그리고 고개를 숙여 세상의 관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어쩌면 황궁에서 일하지 못한 건 내 재능이 아니라... 나라는 존재의 문제였을지도 몰라.”


왕궁의 부탁을 수없이 들어주었으나 부름을 받지 못한 그는 핏줄 때문임을 알았다. 번듯한 가문의 뒷받침이 없는 그가 기댈 것은 황궁에서 가끔 가문도 핏줄도 아닌 오로지 능력이 있거나 재능이 있는 자를 차출해 간다는 것, 자신이 차출될 것이라는 희망이었다. 그러나 현재 그에게 놓인 상황, 처해진 현실은 자신의 재능을 과신해서 황궁에 갈 수 있는 과정자체를 스스로 부정해 버렸다는 사실이다. 모든 것을 받아들인 사색의 방향성은 참혹했으나 그는 회피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스스로에게 되물을 수 있었다.

"나는 왜 황궁에 가고 싶었나? 왜 황궁에서 일하고 싶은가? 왜 황궁에서 일해야만 하는가?"


이는 존재에 대한 물음이었기에 그는 한참 동안, 쉽사리 답을 찾지 못했다. 그저 공방의 공기만이 천천히 식어갔다.

'사람들의 관점이 아닌 나의 관점으로만 세상을 바라보면서, 나의 관점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도대체 누구에게 증명하고 싶었던 것일까. 내가 나의 능력이 부족하지 않음을 나에게 증명하기 위해서 꼭 황궁을 가야만 하는가?'


문제에 직면하자 그가 늘 그랬듯 수많은 계산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한참을 고민해도 어떤 완벽한 공식도, 설계도, 그 어떤 실마리조차도 찾아지지 않았다. 세상을 향해 뻗었던 관점이, 이제는 자신을 향해 되돌아와 응축되었다. 그는 펜을 쥐지 않은 채 펜을 움켜쥐는 듯 자신의 손가락을, 손을 강하게 누른 뒤 이내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가 거듭 심호흡을 한 뒤 천천히 풀었다. 그 후 자리에 앉아 책상에 한쪽 팔꿈치를 대고는 살며시 주먹은 쥔 후 생각이 풀리기를 바라며 자신의 머리를 두드린다.

'정답을 찾으려는 습관이 오히려 독이 되는 건가.'


그는 이 생각을 마지막으로, 정답을 찾으려는 생각을 떨쳐내기 위해 닫힌 문을 바라보았다. 그때 때마침 점술가의 발걸음이 소리가 들려왔다. 다시 이른 시간. 라온델은 답을 찾지 못한 채 꼬박 하루를 지나 보낸 것이다. 그는 계산의 밖의 존재인 점술가, 그 점술가의 발걸음 소리를 듣자, 그 발걸음이 틀리지 않았다는 사실에 갑자기 소름이 끼쳤다.

'내가 틀린 것도 아니고, 점술가가 틀린 것도 아니고, 황궁이 틀린 것도 아니다. 모두가 각자의 관점으로 움직이는 것뿐이다. 세상의 관점을 알지 못한 채 나의 관점만으로는 세상의 정답을 찾을 수 없다. 증명해야만 하는 것은 능력이 아니라 내가 어느 관점으로, 어느 자리에 서있고 싶은 가다. 나의 관점만을 가지고 세상의 관점을 찾아낼 수는 없다. 관점이 견고해지기 위해선 다른 관점, 교류가 필요하다...'


라온델은 자신이 황궁에 가지 못한 이유는 재능이 부족해서도, 노력이 부족해서도 아닌 자신이 서 있던 관점이 다른 곳을 향하고 있었을 뿐, 황궁이 요구한 관점이 그가 가진 방향과 맞지 않았을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그리고 명확한 답이 아닌 방향성을 찾는 생각을 끝으로, 그동안 황궁을 향한 집착으로 자신을 짓누르던 압박에서 벗어났다.

'내 문제가 아니야. 황궁이 나를 부르지 않았다면 내가 가야 할 곳은 애초에 그곳이 아니었을지도 몰라.'


그는 압박을 자리에 내려놓듯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닫아두었던 공방의 문을 열기 위해 걸음을 내디뎠다. 그 순간 톡, 톡, 톡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사색이 끝나는 순간, 세상이 먼저 그를 향해 다가왔다.


라온델과 카일리스

라온델이 닫혀 있던 문을 개방하자 그 앞엔 카일리스가 서 있었다. 카일리스는 모습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달라져있는 라온델에게 짧게 고개 숙여 인사한 후 안부인사인양 용건을 먼저 물었다.

"선생님 오늘은 가르침을 주실 수 있으신가요?"


말투는 공손했으나 머리와 눈은 라온델의 변화를 빠르게 파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흔한 안부 인사도 하지 않았을뿐더러 달라진 연유 또한 묻지는 않았다. 라온델은 그저 말없이 들어오라는 듯이 문을 활짝 열어주었다. 카일리스는 공방 안에 들어서며 전에 왔을 때와 달라진 것이 감각적으로 느꼈다. 구조가 크게 달라진 것은 없었으나 묘하게 정돈되지 않았으며 공방을 가득 메우던 작업의 향들은 메마른 나무냄새에 잠식되어 있었다. 둘은 잠시간, 오랜 침묵의 시간을 가졌다. 카일리스는 이유 있는 기다림의 시간을 가졌으며 라온델은 사색하는 동안 흐트러져 있던 감각을 천천히, 다시 느끼고 있었다. 스며든 감각을 어느 정도 받아들인 라온델이 먼저 입을 열었다.

"자네, 시장에 점을 치는 점술가가 있다는 걸 알고 있소?"

"예, 알고 있습니다. 운수판을 돌려 점을 치고 계시지요."

"그렇군, 그 점술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오?

"저는 점술가이기 이전에 헌책방을 운영 중이실 때 뵌 적이 있습니다."

"헌 책방이라...'헌 책방.'"


라온델은 헌책방이라는 단어에 눈을 깜빡였다. 새로운 것을 설계하고 완성하던 라온델에게 헌책방은 오래된 먼지가 켜켜이 쌓여 있는 듯한 단어였고, 닿지 않았던 세상의 냄새였다.

"잘 운영하던 헌책방을 정리하시고 점술가라는 운명을 스스로 선택하셨습니다. 선생님의 물음은 점술가라는 직업에 대한 물음인가요, 아니면 점술가 선생님 자체에 대한 물음인가요?"

"점술가가 궁금해서 물었으나... 지금은 직업도, 사람도 아닌 그 사람이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이 궁금해졌소."

"그분은 점술가가 된 뒤로 세상을 운명과 선택들로 보고 계십니다. 세상의 사람들을 질문으로 만나기 위해 점술가를 하고 계시지요. 헌책방 운영부터 현재까지, 물질적 풍요보다는 내면의 풍요를 중요시하는 분이라 생각합니다."

“그렇군, 세상을... 질문으로 만난다...”


공방 안의 공기가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 라온델의 시선이 작업대 옆, 오래된 도면 뭉치 위에 잠시 머물렀다. 그 도면들은 모두 정답을 향해 그어진 선들이었다. 그는 정답에 도달한 선들을 보며 혼잣말을 했다.

“나는 오랫동안 나의 관점에서 그려낸 선 위에서만 답을 찾으려 했지."


라온델은 생각에 빠진 듯 그 선들을 훑어보며 낮게 말을 이었다.

"선을 벗어난 질문들은 필요치 않다고 여겼지. 벗어난 질문이란 늘 미완을 의미했으니까.”


라온델의 말투에는 사색의 잔해와, 그 잔해를 다시 정리하는 기척이 담겨 점점 소리 높여 말했다.

"그러나 그 점술가는 정답의 선을 그리는 사람이 아닌, 사람이 어디에 서 있는지를 먼저 묻는다는 건가. 서 있는 위치에 따라, 정답은 바뀌니까 말이지."


라온델의 말을 가르침으로 해석한 카일리스는 속삭이듯 말한 혼잣말마저 경청해서 들은 후 물었다.

"그래서 선생님께서는 지금, 제 자리를 보고 싶으신 건가요?”


라온델은 카일리스를 보고 기분 좋은 헛웃음을 치고는 고개를 젖혀 벽의 나무의 결을 바라봤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마치 오래된 계산을 내려놓듯 말했다.

“그래, 자네 자리도 알고 싶고 내 자리도 알고 싶어 졌네."


단순한 말이었지만, 이 말은 라온델의 사색이 턱 밑까지 차오르는 말이었다. 카일리스는 그런 라온델의 모습을 바라보며 기류를 정확히 읽어냈다.

"저의 자리를 선생님의 언어에 빗대어 말해본다면 선을 긋기 전, 시작점에 서서 다양한 자리를 경험하고 있는 중입니다."

"시작점이 정해지지 않았다면 황궁은 왜 들어갔소?"

"황궁이 시작점을 알려줄 것만 같았어요. 하지만 황궁은 제가 상상하던 것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그래, 나도 근래 든 생각이네만, 황궁은 답을 주는 곳이 아니라 이미 완성된 구조 안에서 움직이는 곳인 거 같더군"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선생님께서는 왜 황궁을 바라보셨습니까?”

"그때는, 나도 그랬지. 나의 시작점이자 정답이라고 믿었다네."

"그렇다면 선생님께서는 지금 어떤 자리에 서고 싶으신지요?"


라온델은 초췌한 용모였으나 몸을 반듯이, 곧게 세웠다. 그 모습은 마치 오래전부터 자신이 그려놓았던 선 한가운데 서 있는 듯했다.

“나는, 나의 자리는 여태 세상이 정해둔 답을 따랐다네, 그래서 위해 황궁을 원했소. 그러나 오늘부로 그 반대가 될지도 모르겠네."

"반대라면?..."

"황궁의 관점은 정해져 있고, 포르투나 엘렉티오는 황궁의 관점으로 돌아가고 있지. 나는 먼저, 이 세상에 맞추는 것이 아닌 세상을 바꿀 관점을 찾을 것이라네. 그리고 그 관점을 토대로 새로운 세상을 꿈꿀 것이네. 나는 지금 어느 자리에 서 있는 것 같소?"


둘의 대화는 이후로도 오래된 친구를 만난 듯이 쉴 틈 없이 이어졌다. 둘은 세상을 바꾸는 일이 쉽지 않지 않다는 것, 길이 길고, 험하고, 오래 걸린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길을 함께하기로, 그 선을 함께 그리기로 서로에게 맹세했다. 그 맹세 속에 카일리스는 다양한 자리를 경험하되 황궁에서 버티기로 다짐했고 라온델은 버티고, 재고, 받아들이며 미래의 자신을 위해 현재를 다시 희생하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라온델은 채비와 인사를 마치고 떠나가던 카일리스에게 낮지만 힘 있는 목소리로 다짐을 건넸다.

"한동안 공방의 문을 닫고 아무도 받지 않고 있었네만. 오늘부로 다시 문을 활짝 열 것이네. 이제는 열린 관점으로 물을 열것이오.”


카일리스는 그 모습을 보며 견고한 마음을 그리는 눈빛을 건네며 아주 작은 미소를 내비쳤다. 그 순간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공기는 질문과 답이 아니었다. 서로의 관점이 서로를 향해 열리는 새로운 세상을 향한 첫 바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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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꾸로 매달린 남자 키워드 - 인내, 수용, 관점 전환

라온델의 삶은 언제나 인내와 수용이었다.

그 오랜 기다림 끝에 황궁에 입궁할 실마리가 보였다.

그러나 그 실마리를 쥔 소년에 의해 방향이 바뀌었다.

인지부조화로 고집된 관점의 사색은 그를 평생 아집으로 살게 만들뻔했다.

평생 자신을 부정한 채 살아갈 뻔 한 라온델에게 카일리스의 등장은 기적이나 다름없다.

라온델 또한 아직 성숙한 나이라고는 할 수 없으나,

그가 살아온 삶을 빗대어 생각하면 결코 가벼운 삶은 아니다.

그렇기에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바꾼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카일리스에 의해, 점술가의 삶의 방향성에 의해 바꿀 수 있었다.

관점을 바꿔 미래를 바라보니 미지의 세상이 자신을 선명하게 만들어주었다.

그 미지의 세상에 도달하기 위해 다시 한번 인내와 수용을 삶을 살아야 하지만

이번에 하게 될 인내와 수용은 관점이 바뀌기 전과는 명백하게 다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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