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필 Jan 29. 2024

의미부여란 무엇인가?

의미부여를 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의미부여와 의사소통

하나로 통일한 단어를 있는 그대로 전달하는 용도로만 사용한다면 문제가 없지만 언어로써 다른 속뜻이 담기게 되면 내포된 의미가 다양해져서 같은 말을 주고받더라도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와 전달받은 의미가 달라질 수 있다. 배고프다는 말 한마디에도 속뜻이 있으면 혼잣말을 하는 것인지, 배고파서 먹어야 하는 것인지, 배고프지만 다이어트를 해야 하는 것인지, 다이어트를 해야 하지만 먹고 싶은 것인지, 다이어트 중이지만 먹겠다는 것인지 등 같은 말이라도 다양해지기에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와 전달받는 의미가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언어가 없어도 아기와 소통이 가능하듯이 의미만 제대로 전달된다면 수많은 의사소통이 가능한 반면에 의미를 더 다양하고 잘 전달할 수 있는 언어일지라도 의미를 제대로 전달하지 않으면 언어가 없을 때 보다 더 심한 의사소통의 부재가 생긴다. 다만 언어의 사용 전과 언어의 사용 후로 나눠서 의사소통의 부재를 일부 파악해 보면 언어가 없었을 때의 의사소통의 부재는 언어가 없어서 생겼고 언어의 탄생 후의 의사소통의 부재는 언어가 있어서 생긴 아이러니함을 찾아볼 수 있다. 고로 언어의 전과 후로 나눠 의사소통의 부재가 생겼다기보다는 언어가 있든 없든 의사소통의 부재가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여기서 규칙으로 규정한 언어의 용도와 소통을 할 때의 언어의 용도가 다르다고 가정하면 언어가 없었을 때의 의사소통 방식보다 언어를 통한 의사소통 방식이 더 효율적이고 명확하며 다양하게 사용할 수 있어서 주 의사소통 기능이 되었을 뿐이라고 유추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의사소통의 부재는 어디에서 오는가? 의사소통의 부재는 언어가 아닌 의미부여와 의미전달에서 시작한다. 의미부여 조기교육을 글로 전달했기에 언어로만 교육되는 것처럼 표현됐을 수 있지만 의미부여 교육은 단순히 언어를 교육하는 개념보다는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 전반에 속한다. 모든 의미부여들이 언어적으로 묘사가 가능한 것이지 언어만 교육하는 것이 아니며 사람을 대하는 자세, 세상을 대하는 자세 등 모든 것이 내포되어 있으며 의사소통의 핵심이 언어가 아닌 의미부여와 의미전달이기에 의사소통의 부재가 생겼을 때 언어는 죄가 없다.


의미부여에서 시작한 의사소통의 부재는 의미전달이 제대로 되지 않아서, 의미부여가 재해석돼서 등 전달의 오류나 의견이 달라서 발생하기도 하고 나라별 언어와 문화에 따른 의미부여 자체에서 발생하기도 한다. 모두 의사소통의 부재라는 범주안에 속하지만 오류나 의견이 다른 것은 실수하거나 다르게 생각할 수 있는 것에 해당하는 반면 의미부여 자체가 다른 것은 절대로 다르면 안 되는 것이기에 틀린 것으로 간주할 가능성이 크다. 이를 다른 것으로 간주할지 틀린 것으로 간주할지는 의미부여 조기교육 때 교육받은 의미부여중 문화, 역사에서 시작된 의미부여 자체를 의견이 다른 것으로 보느냐, 의미부여 자체가 틀린 것으로 보느냐의 차이인데 문화와 역사는 의미부여와 가설에서 시작되었고 그에 따른 의미부여자체가 연구를 통해 증명되었다고 정의하기가 애매해서 문화와 역사에 해당하는 의미부여 자체에서 시작된 의사소통의 부재는 틀린 것이 아닌 서로 다른 것으로 봐야 한다. 애초에 의미부여 조기교육은 언어뿐만이 아니라 세상을 살아가는 전체적인 규칙이나 방식을 알려주는 것이기에 교육받은 규칙과 방식을 재해석하는 것은 기본사항이고 자신이 재해석한 것이 교육받은 의미부여와 동일할지, 달라질지는 선택사항이다. 의견이 다른 것마저 틀리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기에 증명된 사실이 아닌 의미부여라면 규칙으로 정해진 같은 말이라도 의미부여 재해석을 통해 각자가 다른 의미부여를 할 수 있다는 것과 자신의 의미부여도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기본전제로 의사소통이 이루어져야 한다. 


시대적 의미부여 

문화와 역사에 속하는 의미부여자체를 다른 것으로 받아들일 수는 있으나 한평생 지켜오던 규칙이 의미부여와 가설이라는 주장은 쉽게 인정하기에는 민감한 부분일 수 있기에 문화와 전통을 유지하는 것의 옳고 그름을 논하자는 것은 아니다. 다만 문화와 전통을 유지하는 것은 의미부여 조기교육의 영향을 크게 받고 있으며 언어의 탄생 이후에는 모든 의미부여가 가설에서 시작했다는 것은 부정할 수가 없어서 문화와 전통을 유지할 것인가 말 것인가는 선택사항이라는 이다. 선택사항이라는 것은 시대적으로 다르게 인식, 인지된 노예제를 보면 명확히 알 수가 있다.

모두에게 노예제가 문화와 전통으로 의미부여가 되어 있을 때 노예도, 주인도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면 노예는 노예로, 주인은 주인으로 살아가는 것이 잘못되거나 틀린 것이 아니라 노예와 주인은 애초에 다른 것이라는 하나의 문화가 자리 잡게 되고 노예제 자체를 하나의 문화처럼 조기교육을 하게 된다. 만약 노예제를 유지하느냐 마느냐가 선택사항이 아니었다면 노예제 폐지가 이루어지는 것은 불가능했다. 선택사항이기 때문에 노예제폐지라는 새로운 의미부여가 자리를 잡을 수 있었고 노예제가 끝날수 있었다. 이러한 언어, 단어, 문화등 모든 과정이 옳고 그름을 논하기 이전에 의미부여로부터 시작을 했고 의미부여를 하는 것 자체가 욕구이기에 노예제 또한 가설을 세우고 증명하는 과정이며 문화와 역사의 일부라고 봐야 한다. 이는 지금도 노예제폐지처럼 크고 작은 사회의 새로운 의미부여가 문화와 역사를 만들고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그리고 시대적으로 의미부여가 바뀌듯이 자신이 하고 있는 의미부여중에서도 노예제처럼 바꿔야 할 것이 있는지 점검하고 앞으로 어떤 의미부여를 할 것인지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정답형 의미부여, 의문형 의미부여

하나의 언어라도 규칙으로 규정한 언어의 용도와 소통을 할 때의 언어의 용도가 다른 것처럼 빨간색을 떠올렸을 때 빨간색이라는 언어의 의미는 변하지 않아도 각자가 생각하는 빨간색이 다를 수는 있다. 이는 노예제라는 언어에 담긴 의미가 변하지 않아도 노예제를 폐지할 수 있는 것과도 같다. 이처럼 의미부여도 규칙으로 정해져 변하지 않는 정답형 의미부여와 규칙으로 정해지지 않는 의문형 의미부여가 있으며 둘의 용도는 확연하게 다르다. 만약 용도가 다른데도 분리하지 않고 하나의 의미부여라고 규정해 버린다면 정답이 있는 의미부여를 정답이 아니라고 여겨서 성별의 구분을 없애버리거나 정답이 없는 의미부여를 정답이라고 여겨서 선택지를 주지 않고 모두가 돈을 위해 살아야 한다고 강요하는 등의 문제가 발생한다. 이러한 문제가 발생하지 않으려면 어떤 의미부여로 말하는 것인지 정해지지 않은 상황에서 빨간색이라고 지칭했을 때 혼동될 수 있는 달라지지 않는 사전적 빨간색과 달라질 수 있는 주관적 빨간색처럼 의미부여도 하나로 보지 않고 정답형 의미부여와 의문형 의미부여로 구분해야만 한다. 


정답형 의미부여는 수많은 가설과 가정을 거쳐 하나의 규칙을 정해 의미를 담아놓은 단어로 사회가 통일해 놓은 단어 자체의 의미라던지 연구를 통해 증명된 달라지지 않는 진리와 유사하다. 사회가 정해놓은 단어의 규칙을 따르는 것은 사람이 되기 위해선 사람이라는 의미부여가 정해져 있어야 하는 것처럼 굉장히 중요한 사회의 의미부여이다. 사회가 만들어 놓은 정답형 의미부여를 알아가는 것은 세상을 쉽게 살 수 있게끔 만들어 주는 중요한 수단인 반면에 사회의 의미부여중 일부인 사회가 추구하는 방향성은 사회가 정해놓은 가정이 될 수 있을지언정 정답이 될 수 없는 의문형 의미부여에 해당한다. 의문형 의미부여는 단어 자체의 의미는 정답형 의미부여로 통일할 수 있더라도 각자가 생각하는 단어의 의미는 달라질 수 있는 것을 의미하며 규칙으로 정해진 단어의 범위를 벗어난 정답을 정할 수 없는 가설, 가정과 유사하다. 의문형 의미부여에서는 사회가 가설과 가정을 통해 정답이라고 정해놓은 추구하는 방향성이 옳다는 것이 증명되더라도 당시에만 옳은 시대적 의미부여처럼 새로운 가설과 가정으로 옳음의 기준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한다. 


노예제와 같은 단어나 증명, 규칙으로 정의할 수 있는 것이 정답형 의미부여라면 노예제가 있어야 한다, 없어야 한다는 식의 가설과 가정으로 정의한 후에 증명까지 할 수 있더라도 달라질 수 있는 것은 의문형 의미부여라고 구분할 수 있다. 그래서 사회가 추구하는 가정이 증명되었다고 해도 의문형 의미부여라면 맹목적으로 믿을 것이 아니라 의문형 의미부여라는 것을 인지하고 사회가 추구하는 의미부여와 개인이 추구하는 의미부여가 다를 수 있다는 생각으로 세상을 바라봐야 한다. 


사회의 의미부여, 개인의 의미부여

아름다움의 사전적 의미가 변하지 않아도 아름다움의 주관적 기준이 다를 수 있다는 것은 당연한 사실이다. 그런데 사전적 아름다움을 사회의 의미부여로 전부 사전적 의미인 것처럼 구성해 버리면 당연히 있어야 주관적 아름다움에 대한 개인의 의미부여는 매몰되고 만다. 그렇다고 의미부여로 형성된 사회가 새로운 가정으로 정답을 만드는 과정이 잘못됐다고 볼 수도 없어서 사회가 추구하는 방향성을 무시하는 것이 아닌 '나'또한 사회의 의미부여를 있는 그대로 존중하되 따르지 않아도 되는 것은 굳이 따르지 않아도 된다. 이와 유사한 남의 눈치 보지 말라는 말 또한 모든 것을 다 무시하고 마음대로 하라는 말이 아닌 사회에서 지킬 건 지키되 지키지 않아도 되는 것마저 지키라고 가스라이팅 하는 것은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다. 


사회의 의미부여중 정답형은 단어로 규정된 규칙처럼 이미 연구를 통해 증명하고 실생활에서 사용하는 자동차, 핸드폰과 같은 기술적인 부분과 사회과학, 사회심리학, 사회현상등에서 증명할 수 있는 것으로 구성되어 있어서 정답형 의미부여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사회의 의미부여 중 의문형은 착해야 한다, 성공해야 한다, 긍정적이어야 한다 등 사회 전반 혹은 일부가 정답이라고 가정한 주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사회의 의문형 의미부여에서 정답이라고 주장하는 것에 개인이 가스라이팅 당하게 되면 자신이 착하고 싶은지 아닌지에 대한 가치관을 형성하는 것은 고사하고 아름다움의 기준이 다르듯이 착함의 기준이 다르다는 것마저 망각하게 된다. 망각한 후에는 스스로가 사회에서 착하다고 말하는 기준에 맞춰 살아가며 자신에게는 착하지 않은 사람이 되어버린다. 또 사람마다 성공의 기준이 다른 것을 망각하면 자신이 원하는 성공이 뭔지도 모른 채 사회에서 성공했다고 말할 수 있는 직관적인 돈을 기준으로 잡고서 자신의 성공, 자신의 삶에 집중하는 것이 아닌 보이는 돈, 삶에 집중하게 된다. 심지어 긍정은 기준도 존재하지 않아서 노예제에 버금가는 무시무시한 가스라이팅으로 회사가 수직구조일 때 상사의 말에 무조건 긍정해야 하고 국민들은 국가의 뜻을 무조건 따르라는 일방적인 긍정을 강요하며 긍정할 사람과 긍정하지 않아도 될 사람의 기준을 수직구조로 형성한다. 이렇게 개인의 의미부여를 형성하기 전에 사회의 의미부여에 가스라이팅 당하면 착하고 싶은지, 성공하고 싶은지, 긍정하고 싶은지 등을 자신에게 묻지도 않은 채 사회의 의미부여를 정답이라고 여겨서 사회가 노예로 살라고 하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스스로 노예로 살게 된다.


사회의 의미부여에 가스라이팅 당하는 것은 의미부여 조기교육을 받을 때부터 사회의 의미부여를 그대로 따르라고 주입식 교육을 받아서, 혹은 개인의 의미부여를 찾으라고 교육해주지 않아서 생기는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정답형과 의문형을 구분하지 않고서 사회의 의미부여를 그대로 받아들이면 개인의 의미부여는 고민해보지도 못한 채로 사회의 의미부여를 따라가게 될 것이고 결국 자신이 하고 싶은 게 뭔지, 원하는 게 뭔지, 자신에게 쌓인 의미들은 뭐고 앞으로 쌓을 의미들은 무엇인지 등 아무것도 궁금해하지 않은 채로 살아가게 될 것이다. 이렇게 사는 것 또한 틀린 것은 아니라서 다르다고 정의할 수도 있으나 사회의 의미부여에서 성공의 기준을 정했다고 해서 모두가 그 기준에 맞춰서 성공했다고 정의해야 한다면 사회에서 정한 성공의 기준과 개인이 정한 성공의 기준은 다를 수 있기에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이런 사회의 기준을 무조건적으로 존중하게 되면 사회는 오히려 개인의 의미부여를 무시한 채 사회의 기준과 개인의 기준이 다를 때 틀리다고 정의하게 된다. 자신이 원해서 사회의 의미부여에 맞춰서 사는 사람이라면 그 또한 존중할 수 있지만 만약 그것이 아니라면 기준이 다른 것을 틀리다고 강요당하기 전에 개인의 의미부여를 생각해봐야 한다.


의미부여를 하지 않은 것?

의미부여되지 않은 것, 하지 않는 것이 있을까?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지 않은 이상 일상에 녹아들어 의미부여를 하지 않았다고 생각할 뿐 모든 것에 의미부여가 되어있다. 만약 지금까지 의미부여가 되지 않은 것을 발견한다면 명확하게 정하기까지 시간이 걸릴 뿐 찰나의 순간 의미부여를 하게 될 것이다. 고로 의미부여가 되지 않은 것은 존재를 알 수 없는 것에 한정되어 있다. 신조어를 생각해 보아도 명확하게 언어로 정해지지 않았던 것을 명확하게 정하거나 새롭게 의미부여를 했기에 새로운 단어, 새로운 의미부여가 생겨난다고 볼 수 있으며 이는 지식창고에 새로운 지식을 하나 생성한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새로운 행성을 발견해도, 새로운 기술을 발명해도, 새로운 음식을 만들어도, 새로운 가설을 만들어도 의미부여를 하는데 정말 만약에 존재함에도 의미부여를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다름없어진다. 지구의 존재를 알기 전에는 지구에겐 아무 의미가 없었지만 존재를 알고 나서 지구가 되었고 행성이 되었다. 심지어 아직 알지 못하는 것에도 미지라고 정의를 해놓았으며 지금까지 의미부여가 되지 않은 것은 아직 존재를 알 수 없는 것이기에 의미부여를 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의미부여를 하지 못한 것에 해당한다. 결국 존재를 알고 있는 모든 천지만물에는 의미부여가 되어있다. 


의미부여를 마무리하며

의미부여를 하지 말라는 표현의 의미와 뉘앙스를 대부분이 알고 있고 상황에 맞춰 적절하게 잘 사용하고 있어서 잘못 사용하고 있다고 규정하기도 애매하지만 내적욕구인 의미부여를 하지 말라는 것의 실상은 인간이길 포기하라는 말이 되기도 한다. 그것을 알면서도 뇌리에 박힌 단어를 쉽사리 바꿔 사용하기란 어렵기에 필자도 적절한 상황이 되었을 때 의미부여를 하지 말라고 잘못 사용할지도 모른다. 이런 식으로 잘못 사용되는 단어, 언어들이 현재 문제가 없다면 굳이 바꿔서 사용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기에 의미부여는 어느 정도 정상참작되어 사용되는 것이 좋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같은 상황에 놓였을 때 의미부여를 하지 말라는 말보다 더 적절하게 사용할 수 있는 단어, 언어가 있다면 그것을 사용하는 게 더 좋은 것 또한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어디까지나 현재에 문제가 도드라지지 않아서 나타나지 않았을 뿐이지 나중에는 의미부여를 하지 말라는 기능적 오해에서 시작된 문제가 개인의 의미부여를 막게 될지도 모른다. 혹시라도 이미 의미부여를 안 좋게 인식해서 개인의 의미부여를 하지 않으려는 사람이 있다면 문명도 의미부여에서 시작했다는 것을 기억하고 의미부여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에서 벗어나 충분히 개인의 의미부여를 해야 하는 상황에서는 가치관 형성에 필요한 의미부여를 마음껏 자유롭게 하기를 바란다. 다만 앞서 말했듯이 의미부여를 자유롭게 하라는 것은 자신의 관점으로만 주장하라는 것이 아닌 지키지 않아도 되는 의문형 의미부여라면 각자의 의미부여가 다르다는 것을 이해하고 존중해야 한다는 것을 꼭 유념해야 한다. 또한 개인의 의미부여가 새로운 족쇄가 되는 것을 방지하려면 사회가 정해놓은 의미부여도 바뀔 수 있듯이 자신이 정해놓은 개인의 의미부여도 바뀔 수 있다는 것도 인지해야 한다. 오늘 아름답다고 의미부여를 한 것이 10년 후에 아름답지 않게 보인다면 한번 정한 의미부여로 자신을 가두지 말고 현재 '나'는 무엇을 구분할 수 있는지, '나'는 무엇을 아름답다고 볼 것인지를 토대로 재구성해야 한다. 이를 삶의 목표로 보면 꼭 목표가 꼭 있어야 하는 것도 아니며 건강하게 살기였다가, 행복하게 살기였다가, 태어난 김에 살기로 바뀌어도 상관없다. 그리고 목표를 정할 때 거창한 목표를 정하는 것과 사소한 목표를 정하는 것 중에 무엇이 더 좋은지는 사람마다 다른 의문형 의미부여이기에 중요한 것은 거창하거나 사소한 것이 아니라 개인의 의미부여로 자신이 원하는 선택을 스스로 하는 것이다. 의미 부여함에 있어서는 꺾이지 않는 마음이든 꺾여도 하는 마음이든 무엇을 선택하든 간에 중요한 것은 인류에 해를 끼치지 않는 선에서 자신의 의미부여대로 살아가는 마음이다.


당신은 현재 어떤 의미부여를 하고 있는가?

앞으로는 어떤 의미부여를 할 것인가?

이전 04화 내적본능의 의미부여에서 내적욕구의 의미부여로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