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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필 Jan 22. 2024

내적본능의 의미부여에서
내적욕구의 의미부여로

본능억제

내적본능의 의미부여에서 

내적욕구의 의미부여로

내적본능과 내적욕구를 본능과 욕구의 구분처럼 구분 지어 보 [의미를 정하다]와 [의미를 정하고 싶다]로 구분 지어지며 본능에 의해 [의미부여를 해야만 하는 것]과 욕구에 의해 [의미부여를 하지 않아도 되는 것에도 의미부여를 하고 싶은 것]으로 내적본능의 의미부여내적욕구의 의미부여가 구분 지어진다. 사냥이 목적일 때 내적본능은 사냥을 보고 따라 하는 학습에서 끝나지만 내적욕구는 '나'는 어떻게 사냥할 것인가를 사고하고 자신만의 사냥방식을 만들거나 정할 수 있다. 이를 교육에 비유하면 단순암기로 학습해서 지식을 습득하는 것은 내적본능으로 의미에 논리적인 이유를 부여하고 사고를 통해 학습하는 것은 내적욕구로 분류할 수 있으며 내적본능이 단순히 의미를 정하는 것이었다면 내적욕구는 단순히 의미를 정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구분 짓고 싶어 하는 욕구라고 볼 수 있다. 


내적본능이 내적욕구가 되는 과정에서는 환경의 변화, 유전자 변이등의 영향을 받아서 내적본능으로 기억해야 할 의미부여가 늘어난 것에 그치지 않고 본능과 생존에 필요하지 않은 더 많은 것에도 의미 부여한 것을 유심히 들여다봐야 한다. 본능과 생존에 필요하지 않은 것들을 필요하다고 여겨서 의도치 않게 불필요한 것을 기억하는 양이 늘어난 것은 얼떨결에 기억창고가 대량으로 늘어나는 기반이 되었고 그로 인해 뇌기능이 발달할 수 있었다. 기억창고의 증가와 뇌기능의 발달이 새로운 뇌기능을 개발하고 결국 새로운 생존방식에 도달했다고 유추되는데 그렇다면 생존에 필요해서 구분하는 것이 아닌 생존에 필요 없더라도 구분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를 구분이 가능하기에 뇌기능이 발달했다고도 볼 수 있지만 구분할 수 있을 만큼 뇌기능이 발달한 사람은 구분을 교육했을 때 구분 지을 수 있는 반면 뇌기능이 발달하지 못한 사람은 구분을 교육해도 구분 지을 수 없는 것을 기본전제로 두면 뇌의 기능이 구분이 가능할 정도로 발달했기에 구분하고 싶어 졌다고 가정할 수 있다. 정리하자면 뇌기능의 발달과정을 거쳐 자극에 따른 반응만 하는 내적본능의 의미부여에서 내적욕구의 의미부여가 개발됨에 따라 본능, 생존과 관련 없는 추가적인 구분이 대량으로 가능해졌고 반응을 선택하고 자극을 받아 반응할 수 있는 욕구의 영역이 본능의 영역보다 더 많이 자리 잡았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내적욕구는 [의미를 정한다]가 아닌 [의미를 정하고 싶다]가 된다. 만약 내적본능의 의미부여에만 의존해서 뇌의 기능이 발달하지 않았다면 인간도 다른 동물과 별반 다르지 않게 살았을 것이기에 뇌기능의 발달과 개발은 내적본능이 내적욕구로 변하는데 주요한 역할을 했으며 내적본능에서 내적욕구로의 변화가 현재의 인간을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의미부여를 늘려가는 과정은 뇌기능이 발달하는 요소로 뇌에 기억을 담당하는 지식창고가 늘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지식창고가 늘어남에 따라 비슷한 것들의 구분이 필요해지고 구분하기 위한 의미부여를 통해 분리하는 뇌기능이 개발된다. 이 과정을 반복하다 보니 분리하는 영역이 방대해졌고 의미부여를 한 것에도 할 것과 하지 않을 것을 나누고 그에 따른 규칙이 생성되어 다수가 정한 규칙을 교육하게 된다. 그렇게 규칙에 따라 본능대로 행하는 것이 아닌 본능을 억제하는 교육을 함으로써 본능을 억제하는 기능이 발달되었고 본능보다 욕구의 측면이 강조되어 본능이 아닌 다수가 정한 의미부여대로 살게 된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들을 거친 생존방식의 변화가 가설과 가정을 통해 새로운 것을 찾으려 하고, 더 좋은 것을 찾으려 하고, 계속해서 발전하려고 하는 등의 다양한 욕구에 도달한다. 여기서 가설과 가정, 계획과 근거를 가지고 생존에 유리해진 것은 맞으나 모든 일련의 과정이 가설과 가정이라는 계획이 있었더라도 명확히 증명되지 않은 사실을 토대로 이루어졌기에 변화의 실상은 우연히 일어난 것이며 운이 좋았다고 본다. 결국 인간이 정한 모든 것은 가설과 의미부여에서 시작했다. 


노파심에 말하자면 필자는 뇌과학을 연구하는 뇌과학자도 아니며 세세하게 디테일한 지식을 가진 사람도 아니다. 그저 모두가 의미부여와 자기 합리화를 하고 있으면서 왜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인지에 대한 궁금증에서 시작한 논리적 추론이 본능과 욕구에 다다랐고 논리적 추론에 따른 구분이 의미부여와 자기 합리화가 내적욕구라서 하고 있다는 것에 도달했으며 내적욕구의 의미부여가 어디서 시작되었는가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뇌기능의 발달과 개발이 필요해서 포함한 가정이다. 이 이후의 의미부여는 전부 내적욕구의 의미부여로 규정할 것이며 내적본능에 해당하는 요소가 궁금하다면 본능, 욕구에 관련된 생물학, 유전학, 진화학, 뇌과학등의 분야를 따로 공부해 보길 추천한다.


사회화, 문명의 시작은 의미부여와 함께

뇌에 있는 지식창고가 증가함에 따라 비교대상은 자연스럽게 증가한다. 이는 뇌기능의 발달이 구분을 하기 위한 뇌기능의 개발로 연결되는 것을 의미하며 지식창고가 급격히 증가하는 구간은 사회화, 문명의 시작과 연관되어 있다고 본다. 그리고 여기서 강조되는 것이 내적욕구와 본능억제이다. 


뇌에 있는 지식창고가 증가함에 따라 뇌기능이 발달되었고 지식창고에 다양한 의미부여가 축적됨에 따라 비교대상도 함께 증가한다. 그리고 구분해야 할 것이 늘어나면서 과거에 분리하지 못했던 것을 분리하기 위한 뇌기능이 개발된다. 분리하는 뇌기능의 개발이 시사하는 것은 규칙을 구성하는 뇌기능의 발달과 사고의 형성 등 복합적인 작용을 의미하는데 과거보다 복잡한 규칙을 구성하고 복잡한 사고가 가능해졌기에 문자의 탄생 이전부터 유사한 의사소통이 이루어졌을 것이다. 이 과정에서 다량의 경험과 의미부여가 증가함에 따른 교육이 이루어져서 본능대로 행하는 것이 아닌 규칙대로 행동해야 한다는 교육이 본능억제와 맞물린다. 여기서 또다시 뇌기능의 발달과 개발로 좀 더 복잡한 규칙을 구성하고 복잡한 사고를 하는 과정을 반복숙달하면서 문자를 개발하고 또다시 반복숙달해서 언어를 개발하고 또다시 반복숙달해서 숫자를 개발하는 과정을 밟았을 것이라고 유추할 수 있다. 지속적인 뇌기능의 개발과 발달은 의미부여와 가설, 본능억제에 따른 교육에서 시작했고 이것은 환경의 변화에 맞춘 생존방식을 선택한 것과 유전적 변이로 인한 지식창고의 증가로 인해 우연히 이루어졌으며 의미부여의 축적, 교육, 다량의 학습을 한 것은 운이 좋았다고 볼 수 있다. 현재 인간이 받는 교육은 본능보다는 욕구가 더 많이 기여하기에 사회, 문명과 본능억제의 주요한 연결점은 본능이 행한다고 지시하는 것을 욕구로 환산해서 하고 싶다로 분리가 가능해진 점에 있다. 이로써 뇌기능의 개발은 내적욕구의 개발과 맞물려 있고 사회, 문명이 형성될 때 가장 중요한 원초적 기반에 해당한다. 그래서 내적욕구는 인간의 사회화, 문명의 시작점이라고 보거나 사회, 문명이 시작하면서 극적으로 발달시킨 혹은 극적으로 발달된 욕구라고 볼 수 있다.


본능억제 훑어가기

내적욕구에서 다루는 내용과 주제는 의미부여와 자기 합리화이지만 본능억제도 그만큼 주요한 부분이기에 잠시 짚고 넘어가겠다. 인간이 본능을 억제하는 부분 중에 가장 쉽고 간단하게 알 수 있는 것은 본능대로 대소변을 보던 아기가 교육을 통해 기저귀를 떼고 대소변을 가리는 것이다. 본능대로 산다는 사람도 대개가 길을 걷다가 대소변이 마렵다는 이유로 멈춰서 배설을 하지는 않는다. 만약 변소를 가리지 않고 정말 마음대로 배설을 한다면 그것은 본능을 행하는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본능억제의 과정을 열거하면 너무 길어지니 생략하고 현재 다다른 곳에 연결 지으면 인간상, 윤리에 도달한다. 이를 모든 것이 가설과 의미부여로 시작했다는 가정과 연관 지으면 인간의 집단형성, 사회화에는 규칙형성이 뒤따르고 규칙을 규정하기 위한 가설과 가정이 인간상, 윤리에 도달했다고 유추할 수 있으며 이는 생존의 의한 선택일 수도 있고, 사회를 보존하기 위함일 수도 있고, 그렇게 교육을 받았기 때문일 수도 있는 등 다양한 논리적 추론을 거쳐 형성된 것이다. 이로써 본능억제는 뇌기능의 발달에 영향을 받기는 했으나 아직까지 교육이 필요한 개발의 영역에 속한다. 정리하자면 의미부여를 통한 가설은 집단이 커지면서 사회화, 문명에 도달했고 인간상이라는 가설을 세웠다. 이 가설은 본능과 욕구를 억제하는 규칙이 되어 윤리라는 가정을 구축한다. 

윤리가 사회와 문명을 유지하기 위한 하나의 규칙이 되었고 이 구조로 이루어진 본능과 욕구를 억제하는 윤리위주의 법이 아닌 규칙만을 위한 법은 모순이 된다. 규칙만을 위한 법은 제멋대로 구는 사람을 억제하는 효력이 떨어지는데 정확히 말하자면 윤리를 제외한 법으로 억제가 가능하나 제멋대로 구는 사람일지라도 가려서 규제하는 새로운 규칙이 형성되는 것이다. 현재의 법이 이처럼 규칙만을 위한 법의 성향을 띨 때가 있는데 벌해야 할 사람을 가려서 벌하거나 윤리에 어긋남에도 규칙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벌하지 않을 때가 있다. 윤리가 아닌 다른 규칙으로 벌하는 것은 점차 윤리를 지킬 필요가 없다는 것을 시사하며 법에서 윤리를 지킬 필요가 없어지고 규칙만 남아 고착화된다면 '어떻게 합법적으로 악용할 것인가?'라는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더 나아가 윤리가 빠진 법이 극자본주의와 결합하면 자본주의의 규칙에 따라 법 위에 자본이라는 새로운 규칙이 형성될 수밖에 없다. 애석하게도 윤리를 지키는 사람의 관점으로 봤을 때는 세금을 내지 않고 버티는 행위, 혹은 그와 유사한 행위들이 합법적 악용인 반면에 윤리를 지키지 않는 사람의 관점에선 합법적으로 활용하고 있는 꼴이다. 윤리가 무조건 옳다고 정의할 수는 없으나 본능억제가 윤리에 다다른 이유를 생각하지 않으면 같은 법이라도 지켜야 할 사람과 지키지 않아도 될 사람을 자본으로 나누게 한다. 이것이 문제라고 생각해서 극과 극으로 나눠 규칙 없이 윤리적으로만 봐서도 안된다. 사람마다 윤리의 기준이 다르기에 기준을 맞추기 위한 공정한 규칙도 꼭 필요하다. 결국 본능과 욕구를 행하며 제멋대로 구는 사람이 제멋대로 굴지 못하도록 규제하는 공정한 타당성이 필요한 것이다. 이보다 더 자세히 훑어가면 좋겠지만 의미부여라는 주제에서 너무 멀어지기에 욕구를 억제하고 다음 내용으로 넘어가겠다.


의미부여 조기교육

드디어 잡론을 마치고 필자가 본래 쓰고 싶었던 내적욕구의 의미부여에 도달했다. 여기부터 시작한다는 마음가짐으로 궁금증을 되짚으며 시작하겠다. "세상천지 모든 만물에 의미부여를 하고 있으면서 의미부여를 하지 말라는 말은 무엇인가?", "이 아이러니함을 인류의 의미부여가 아닌 현재의 의미부여로 본다면 '나'라는 인간의 의미부여는 언제 시작하는가?" 놀랍게도 의미부여를 하지 말라는 사람도 태어날 때부터 의미부여 조기교육을 받았고 그들이 애를 낳아도 의미부여 조기교육을 한다. 심지어 태교까지 생각하면 아기가 나오기 전부터 의미부여를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의미부여 조기교육은 갓 태어난 아기에게 앞의 사람이 엄마인지, 아빠인지, 네가 누구인지부터 먹을 수 있는 것과 없는 것 등 비어있는 지식창고에 수많은 의미부여를 채워 넣으면서 시작한다. 의미부여 조기교육을 하지 않으면 아기의 지식창고의 대부분이 빈창고에 지나지 않기에 너무나도 필수적인 조기교육이며 의미부여 자체가 아기에게 한글을 알려줄지 영어를 알려줄지 보다도 우선시된다. 비어있는 지식창고에 사회가 정한 규칙적인 의미부여부터 양육자가 알고 있는 의미부여, 관계를 통해 배우는 다양한 의미부여들을 습득하게 되는데 어떤 방식으로 어떻게 조기교육을 하고 지식창고에 무엇을 채워 넣는지에 따라 아기의 삶은 천차만별로 달라질 것이다. 물론 조기교육으로 받은 의미부여에 머물고 끝나지는 않는다. 직접적으로 처음 교육받은 의미부여는 성장해 가면서 '나'는 어떻게 받아들일지, 어떤 선택을 할 것인지를 자신이 재해석하고 새로운 의미부여를 지식창고에 채워 넣을 수 있으며 새로운 지식을 채워 넣지 않더라도 자기 합리화 과정은 거쳐간다. 이러한 과정에서 절대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 있는데 아빠를 아빠라고 부르고 엄마를 엄마라고 부르듯이 모든 의미부여들이 구축되어 있기에 지금의 의미부여가 굉장히 쉬워 보이지만 여기에는 비를 만들고 불을 만드는 주술사와 연금술사의 탄생부터 비가 어떻게 내리고 불이 어떻게 생기는 지를 알기 위한 과학의 탄생까지 수많은 가설과 가정 그리고 반복숙달을 통해 지식창고를 증가시켜 준 인류의 노고가 있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를 토대로 일부 본능과 욕구억제의 타당성을 제시하자면 현재 누릴 수 있는 것들은 개인의 능력이나 힘이 아닌 인류의 노고와 힘이 기반이 되기에 인류의 고마움을 인지하고 인류에 해를 가하는 것을 억제해서 인류보존에 힘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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