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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필 Jan 08. 2024

욕구란 무엇인가?

욕구를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욕구란 무엇인가?

욕구란 무엇인가? 이 질문은 욕구에 대한 궁금증이 아닌 꾸준히 오르내리는 의미부여와 자기 합리화에 대한 궁금증에서 시작했다. 의미부여를 하지 말라는 말, 자기 합리화를 하지 말라는 말을 들으면 의도는 이해가 가지만 말이 되지는 않는다고 생각했다. 세상천지 모든 만물에 의미부여를 하고 있으면서 의미부여를 하지 말라는 말은 무엇인가? 다들 살아온 대로 합리적으로 판단하고 자기 기준의 합리화를 하고 있으면서 자기 합리화를 하지 말라는 말은 무엇인가? 말의 의도와 뉘앙스와 상황에 따른 표현은 모두 다 이해가 되는 반면에 의도와 뉘앙스와 상황을 제외한 의미부여와 자기 합리화를 하지 말라는 말은 성립되지가 않아서 납득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를 납득하고자 의미부여와 자기 합리화가 무엇인지 알기 위한 논리적 추론을 거치다 보니 인간의 욕구라는 종착지에 도달했고 왜 그렇게 사용되는지가 그제야 명확해졌다. 


욕구를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의미부여와 자기 합리화를 명확하게 하는 논리적 추론을 하던 중 욕구에 대해 잘못 알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돼서 그 부분을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할 거 같다. 본능, 욕구, 이익을 따로 사용할 때는 개별적으로 맞는 말이지만 함께 비교대상으로 보고 구분 짓지 않는 이상 헷갈리기 쉬운 함정이 있다. 필자도 구분 짓지 않고 사람은 이익에 의해 행동한다는 관점으로 바라보고 함정에 빠졌었다. 모든 상황을 이익에 의해 행동한다는 이익의 관점으로 바라봐도 맞는 말이 돼서 함정에 빠지기가 쉽다. 함정에 빠져있을 때 '자신이 원하지 않는데 특정 행동을 했다'라는 이야기를 들으면 그 행동에서 금전적이든, 육체적이든, 정신적이든 기타 등등 무조건 이익이 있다는 관점으로 보게 된다. 행동으로까지 옮겼으면 그럴만한 이유가 있겠거니와 어떤 행동을 하든 이익을 찾고자 하면 찾아지는 것이 함정에 빠지는 원인이다. 만약 똑같은 이야기를 욕구에 의해 행동한다는 욕구의 관점으로 보아도 행동으로 옮기는 모든 것은 욕구에 의한 것이고 욕구라는 단어를 붙여 이익욕구로 대입해도 맞는 말이 된다. 결국 하나의 상황을 이익의 관점으로 보는지, 욕구의 관점으로 보는지에 따라 둘 다 맞는 말이 돼서 '내'가 바라보는 관점으로 끼워 맞추기만 하면 맞는 말이 된다. 관점이 변하지 않는 이상 언제나 변함없이 맞는 말이 되기에 구분 지어 알필요도 없다. 그래서 관점에 따라 끼워 맞추는 것이 아닌 좀 더 명확히 알기 위해서 이익, 욕구 그리고 본능으로 나눠보면 얼떨까?라는 생각으로 나누자는 제안만 하겠다.


사람은 자신이 이득을 보는 합리적인 선택을 한다고 믿거나 손해를 보더라도 합리적인 선택이라며 낙관적인 자세를 취하기도 한다. 이득을 보는 것보다 손실에 더 민감하며 자신이 합리적이지 않은 선택을 했어도 그 사실을 온전히 받아들이기 힘들어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기에 표면적으로 보면 모두가 이익의 관점으로 행동한다고 보인다. 비합리적으로 행동하면서 자신이 합리적이고 이익의 관점으로 행동한다고 착각하면 욕구에 의한 행동도 이익에 의한 행동이라고 믿을 수 있어서 분리하기도 애매해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게 사람은 비합리적인 행동도 한다는 것이다. 양자택일의 상황에서 '나도 내가 원하는 게 뭔지 모르겠다'라는 이야기의 특정 부분은 이익의 관점에서 이익을 볼 수 있는 행동이 명확히 눈에 보임에도 욕구의 관점으로 선택하고 싶어 하는 자신을 모르겠다는 이야기이다. 비합리적이고 손해를 보는 선택임을 알면서도 선택할 때가 있으며 이것이 바로 욕구에 의한 행동이다. 배고플 때 마트에 가지 말라는 것이 욕구에 의한 비합리적인 선택을 하지 말라는 말이라고 볼 수도 있는데 여기서 재밌는 것은 배고플 때 마트에 가서 물건을 마구 사는 것을 정신적 이득이나 그 순간의 이득을 보기 위한 선택이라고 끼워 맞추면 이익의 관점에서도 말이 된다. 그러니 이익을 보기 위해 선택하는 것을 이익의 관점으로 봤다면 이해득실을 따지지 않거나 손해라는 것을 알면서도 선택하는 건 욕구의 관점으로 양보하자는 것이다. 여기서 추가적으로 본능까지 나누는 것은 이익의 관점으로 사는 사람은 본능과 욕구가 미묘하게 다르다고 인지를 하면서도 동일선상으로 여겨 이익을 보지 않는 것을 욕구의 관점이 아닌 욕구+본능이라고 단정 지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사회의 변화에 따른 비율은 달라지겠지만 현대의 사람은 본능대로 행동하는 경우가 생각보다 드물다. 그래서 욕구를 본능이라고 받아들일 수가 있는데 간단히 나눠 보자면 [본능은 한다]이고 [욕구는 하고 싶다]라고 규정할 수 있다. 여기에 식욕을 대입하면 [본능은 먹는다]이고 [욕구는 먹고 싶다]가 되며 수면욕을 대입하면 [본능은 잔다]이고 [욕구는 자고 싶다]가 된다. 본능을 토대로 한 욕구는 있으나 욕구를 토대로 한 본능은 없다고 정의하면 본능과 욕구의 구분이 굉장히 쉽지만 본능과 욕구를 구분 지을 때 둘 다 속해서 가장 헷갈리는 먹어야만 한다, 자야만 한다라는 부분을 구분 지어야 한다. 이를 식욕에 다시 대입하면 [본능은 먹어야만 한다]이고 [욕구는 먹고 싶어서 먹는다]가 되며 수면욕을 대입하면 [본능은 자야만 한다]가 되고 [욕구는 자고 싶어서 잔다]가 된다. 본능에서는 먹지 않아도, 자지 않아도 될 상황에서 먹고, 자지 않지만 욕구에서는 먹지 않아도, 자지 않아도 될 상황에서도 먹어야만 한다, 자야만 한다고 생각하고 행하려 한다. 그러므로 먹는 것에, 자는 것에 중독되어서 먹어야만 한다, 자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본능이 아니라 욕구로 분류된다. 본능은 필요에 의해 본능적으로 행해지는 것이고 욕구는 본능, 충동적인 부분에 욕구가 포함되거나 필요하지 않아도 욕구적으로 하고 싶어 하는 것이다.


본능, 욕구, 이익의 관점을 함께 놓고 정리하면 본능은 유전적 경험이 전달되는 것으로 생존을 예시로 봤을 때 생존에 필요해서 본능적으로 행해지는 것이며 자극에 따른 반응이다. 욕구는 합리적, 비합리적인 것을 계산하기보다는 욕구에 의해 행동하는 것으로 손해라는 걸 알면서도 다소 충동적으로 감행할 때도 있고 자극이 없더라도 원하는 반응을 먼저 선택해 자극을 찾아서 반응하려 할 때도 있다. 이익의 관점은 이득을 본다고 생각하는 합리적 선택, 이해타산적인 행동을 하는 것으로 자극이 있으면 논리적 추론(합리적 선택)의 과정을 거쳐 이득을 볼 수 있는 반응을 선택하는 것이다. 

만약 본능욕구이익의 관점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어떤 관점으로 살아야 하는지를 가늠하려 한다면 그것은 탁상공론으로 사람이 살아가는 데는 뇌의 기능도, 심장의 기능도 이루어져야 하는데 뇌의 기능으로만 살 것인지, 심장의 기능으로만 살 것인지를 가늠하는 것과 같다. 사람은 본능, 욕구, 이익의 관점 중 하나로만 살아가는 것이 아닌 본능, 욕구, 이익의 관점이 공존한 상태로 살아가며 상황에 따라 도드라지는 부분이 달라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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