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서사
하고 싶은 일만 하면서 살던 필자에게 회의감을 느끼는 일이 있었다. 때는 과거에 써놓은 미래계획을 발견했을 때이다. 써놓은지도 까먹고 있었던 미래계획을 발견하고서 처음에는 '이런 것도 있었지, 어떻게 썼는지 궁금한데?' 하며 호기심으로 읽기 시작했으나 너무나도 계획대로 흘러왔던 삶을 보니 소름이 끼치고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앞으로의 계획을 읽으면서 울렁거림이 이내 짜증과 분노, 두려움 그리고 복잡 미묘하기보단 이상미묘한 감정으로 바뀌어 생각에 잠겼다. '내가 이렇게 뻔한 사람인가? 예상하기 쉬운 고정된 삶을 사는 사람인가?' '미래가 예측한 대로만 흘러갈 거라면 나는 지금 도대체 뭐지?' '나는 하고 싶은 것을 하는 사람이 맞기는 한가? 혹시 하고 싶다고 정해놓은 대로 사는 거 아닌가?' 이런 식의 생각들이 존재자체에 대한 너무나도 큰 회의감에 도달해 극단적인 결단을 내렸다. '내가 정말로 하고 싶은 게 맞다면, 그래서 계획대로 돈을 모으고 있었던 거라면 성실히 살면서 차곡차곡 쌓아놓은 돈을 전부 다 날려버리더라도 다시금 계획을 수정해 기간 안에 맞춰서 돈을 모으겠지'라며 전재산을 탕진하는 결단이었다. 결단을 내린 후 몇 개월이라는 시간이 흐르자 정말로 하고 싶은 일이 아니라 '할 수 있으면 해야지'정도의 일이라는 결과에 도달했다.
미래계획은 단지 과거의 내가 더욱 과거의 나를 분석해서 만들어진 것으로 니라면 앞으로 이렇게 살고 돈을 얼마만큼 모을 것이며 모은 돈으로 이런 일을 시작해서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이라는 분석을 잘했을 뿐인 계획이었다. 하고 싶은 일만 하면서 살아온 필자로서는 계획에 적힌 것들이 하고 싶은 일인 것도 변함은 없으나 분석을 통해 조건이 갖춰질 수 있기에 하고자 했던 계획일 뿐 가장하고 싶었던 것은 아닌 게 되었다. 그러고선 회의감이 들었던 '내가 하고 싶은 게 맞나?'라는 가장 큰 원인에 집중하게 됐고 '내가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라는 고민에 빠졌다. 고민에 빠졌을 당시에도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고 있었기에 고민을 하는 둥 마는 둥 몇 개월을 흘려보내다 그동안 하고 싶어서 했던 좋아하는 일들과 앞으로 하고 싶은 일들을 하나씩 검토하던 중 죽음과 연결 지어서야 고민이 풀리게 되었다. '내일 내가 죽는다면 나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죽기 직전에 나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시간을 세세하게 나눠보고 가장하고 싶은 것인지, 정말로 하고 싶은 것인지, 죽음을 앞둔 상황에도 하고 있을지를 하나씩 대입했더니 죽음을 앞두고서 마지막으로 느끼고 있는 감정을 글로 남기고 있을 거 같았다. 그리고 그 감정을 글로 남기며 문득 든 생각이 책을 출판하지 않은 것을 후회할 것 같았다. 재밌는 것은 미래계획에도 구체적인 나이와 집필기간까지 정해져 책을 쓰겠다는 내용은 있었다. 그러나 그때까지 살아있을 것을 어떻게 장담할 수 있을까? 갑자기 죽을 날이 되면 분명히 책을 출판하지 못한 걸 후회하겠구나 싶어서 <사소한 하루가 모여 하나의 삶이 되었다>를 출판하게 됐다.
죽기 전에 출판을 했기에 출판에 대한 후회는 없어졌음에도 <사소한 하루가 모여 하나의 삶이 되었다>에는 본래 쓰고 싶었던 내용을 다 담지 못했다. 필자가 쓰고 싶었던 것은 시, 에세이보다는 인문학이었고 글쓰기가
가장하고 싶은 일이라는 것도 변함이 없어서 새로운 고민에 빠졌다. '20년 후에 내가 쓰려고 계획했던 인문학은 무엇일까?' '내가 지금 쓰고 싶은 인문학은 무엇인가?' 그렇게 개똥철학을 기획하고 구상하기를 일 년, 지식을 쌓으며 집필하기를 일 년. 분명히 하고 싶은 일인 것은 변함없으나 과정이 고되고 힘들기에 도중에 포기도 하고 싶었고 이걸 왜 쓰고 있는지에 대한 의문도 들었으며 다시금 마음을 다잡기도 반복했다. 그러던 중 다시 한번 죽음과 연관 지었더니 따로 이룬 아무런 업적 없이 죽음이 다가왔을 때 개똥철학을 완성했다면 책의 평가가 어떻든, 잘 팔리든 안 팔리든 죽기 전에 이것 하나는 해냈다는 마음일 것이고 개똥철학을 완성하지 못했다면 이것 하나도 해내지 못했다는 마음일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결론에 도달했음에도 20년 후에나 쓰려고 했던 글을 지금 쓰는 것이 너무나도 버거워 완성할지 말지에 대한 의지가 확고한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완성되지도 않은 미흡한 개똥철학을 보며 스스로도 안될 거라는 걸 알고서 제출했던 공모전의 결과를 보니 글을 쓰고자 하는 마음에 미묘한 변화가 생겼다. 나의 글이, 나의 말이 나를 통해서는 가치가 없으나 다른 사람이 토씨하나 틀리지 않고 사용했을 때 좋은 글, 좋은 말이 되어서 가치가 생기는 경험을 숱하게 해 봤기에 그 경험에 순응하기로 했다. 내가 남긴 기록이 온전히 나의 가치로 인정받지 못할지라도 언젠간 빛을 발하고 누군가를 빛내줄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으로 내 힘과 마음이 다하는 데까지 글을 쓰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게 마음을 먹고 나니 개똥철학을 기획하고 집필하면서 가장 중요한 것을 빠트리고 있었다는 것도 깨닫게 됐다. 글을 쓰고 책을 출판하여 잘 팔리기면 당연히 좋겠지만 그것을 바라는 것보다 내가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를 잘 전달하는 것에 목적을 둔 글쓰기를 하지 않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출판을 위한 글을 쓰기보다는 출판을 하지 못하더라도 좀 더 진솔한 나의 글을 쓰는 게 낫겠다는 것이다. 출판을 위한 글쓰기에도 진솔한 글쓰기가 포함될 수 있으니 이를 정정하자면 잘 쓰기 위해서 공부하고 지식을 쌓고 논리적 추론을 검토하며 수백 번 퇴고하는 작업보다는 좀 더 진솔한 개똥철학 다운, 날것의 나 다운 글을 쓰는데 몰두하고자 한다.
책 소개
개똥철학은 크게 기준, 선택, 미래로 나눠져 있다.
기준에서는 사람들이 말하는 기준은 무엇인지, '나'의 기준은 무엇인지, 그리고 기준에 대한 본질이 무엇인지를 알아본다. 선택에서는 기준이 정해지면 자신의 선택에 따라 무엇이 어떻게 결정되는지를 알아보는 것인데 기준을 아무리 잘 정해도 선택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면 무용지물이 되기에 선택 편을 먼저 집필 중이다. 미래에서는 개인의 관점도 중요하지만 사회의 흐름은 사회라는 거대한 파도에 휩쓸려가는 경우가 많기에 사회의 관점에서 현재의 결정이 미래에 어떤 영향을 줄지, 만약 그런 영향을 준다면 현재의 선택은 옳은 것인지, 현재도 중요하지만 그것이 사회가 가고자 하는 방향은 맞는 것인지 알아볼 것이다.
개똥철학의 전체적인 틀은 '나'의 철학이 누군가에겐 개똥철학, 누군가의 철학이 '나'에게는 개똥철학이 될 수 있음을 토대로 정답을 정해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정답을 정하라는 메시지가 더 강하다. 지금부터 다룰 내용은 선택 편이며 자신의 선택이 맞는지, 무엇을 선택할 것인지를 스스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점쟁이도 자신이 본 미래가 확정이 아니라며 부적을 팔고 굿을 하는데 점을 보는 것보다 더 정확하게 미래계획을 했던 필자가 선택에서 전달하는 메시지는 점을 본 것이 진실이든 거짓이든, 맞든 틀리든 애초에 확정이 아니라는 거다. 점이 잘 맞았다고 가정했을 때 그대로 살 것인지 다르게 살 것인지, 점을 보지 않았더라도 자신의 인생을 바라보며 그대로 살 것인지 다르게 살 것인지는 잘 굴러가던 미래계획을 제 발로 걷어찬 필자의 인생처럼 자신이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앞으로의 글을 읽으며 자신이 고민하기도 전에 선택된 것은 무엇인지, 무엇을 선택할 수 있는지, 자신이 어떤 선택을 하고 있는지 알아보고 '나'는 앞으로 어떤 선택을 할 것인지를 물어보게 될 것이다.
지금에 와서야 극단적인 결단보다 계획대로 살면 좋은 것 아니냐는, 계획을 틀 필요가 있었냐는 의견들 그리고 이미 경험해 보고 아직 경험 중인 필자로서도 미래계획대로 사는 것이 더 좋았을 수도 있다는 것을 수용한다. 만약 그때로 돌아가면 좀 매스꺼운 감정이 들더라도 참고 계획대로 살거나 너무 과감한 결정을 할 필요는 없었을 거라고 생각하는 반면 극단적인 결단으로 지금을 경험하지 않았다면 삶의 본질에 도달하지 못해서 나의 삶과 사회가 정해놓은 삶을 정확히 구분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미래계획에 써놓은 대로 살았다면 아마 쓰여있는 것을 토대로 20년 뒤에나 이와 유사한 글을 쓰며 나의 삶과 사회가 정해놓은 삶을 구분했을 것이다.
'나'의 삶과 사회가 정해놓은 삶을 구분하지 못한다면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이 뭔지, 원하는 것이 뭔지 헷갈리기가 쉽고 자신이 원하지 않은데 선택된 것을 자신의 선택이라고 혹은 자신이 원해서 선택한 것을 자신의 선택이 아니라고 혼동할 수도 있다. 이에 대해 개똥철학은 "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도, 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도, 하고 싶은 게 있다는 것도, 하고 싶은 게 없다는 것도 선택의 결과라면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를 묻겠다. 개똥철학을 읽을지 말지도 당신의 선택이기에 필자는 당신의 선택을 존중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