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하루 Apr 19. 2019

선인장

13회 동서문학 맥심상 수상작

아래 글은 동서문학에서 주최하는 공모전에 난생처음 수필을 써서 상을 받았던 선인장이라는 글이다. 이혼하고 나서 몇개월 됬을때, 앞으로 내가 어떤 마음과 태도로 살아가겠다고 결심했던, 내 마음을 다졌던 글이어서 개인적으로도 의미가 컸는데, 맥심상이라는 제일 작은 상이었지만.. 내 자존감이 바닥일때 받은, 내가 잘못되지 않았다고 위로해준, 인정받은 느낌이 들게 했던 정말 의미가 있는 글이 되었다. 이 글로 인해 내 이야기를 기꺼이 읽어주고 공감해주는 사람들이 있다고 생각이 들었고 그 용기가 몇개월 뒤에 웹툰을 시작하게 했던 것같다.

나에게 공모전에 글 써보라고 추천해주었던 분께 감사의 마음을 담아...



 

고등학교 졸업한지 20년 정도가 지나서 다시 붓과 수채화 물감을 샀다. 문득 선인장을 그리고 싶었다. 주변에 널려있는 디지털기기로도 색연필로가 아닌, 맑고 투명한 물빛의 수채화로 꼭 그려보고 싶었다. 미술과 관련 없는 전공을 하고 또 졸업 후 사회생활을 해 온 세월동안 막연히 그림을 다시 그려보고 싶다고 생각은 해왔지만, 항상 이런저런 핑계로 뒷전으로 밀려왔었다. 이렇게 실행으로 옮기는데 오랜 세월이 흘렀고, 고등학생이었던 내가 한 아이의 엄마가 되기까지 많은 일을 겪었다.

 누구나 살아가며 이런저런 일을 겪지만, 30대 후반의 나이가 되기까지 내가 기존에 가지고 있던 생각과 가치관, 신념 등에 변화를 가져올 만한 몇 가지 큰 사건들이 있었다.

 20살이 되자마자 대학생이 된 자유로움과 기쁨을 누리기도 전에 나를 찾아온 자가 면역 질환. 감기도 한번 크게 앓아본 적이 없던 나로서는 청천벽력과 같은 일이었다. 나를 공격하는 것이 외부에서 들어온 세균이나 바이러스 따위가 아닌, 다름 아닌 나의 백혈구들이라니 도대체 누굴 원망해야 된다는 말일까. 게다가 평생 고칠 수 없어 약을 꾸준히 먹고 살아야 한다니. 나의 뇌가 몸을 통제하는 게 아니라 고작 몇 알의 약으로 조절이 된다니. 이런 저런 생각에 크나큰 절망감과 상실감을 느꼈다. 그에 더해, 증세가 약으로 약해지지 않을 때의 그 몸의 고통이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마치 그렇게 성인식을 치르듯 몸과 마음에 큰 변화를 가져온 호되고 힘겨웠던 시기였다. 부정, 우울, 분노, 타협의 과정을 겪으며, 결국 시간이 흘러서야 내 앞에 일어난 일을 나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방법을 배웠다. 같은 병실에 있다가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충격을 받았지만, 지나고 보면 그런 사건들 때문에 삶과 죽음, 평범한 것에 대한 감사함 등을 느낄 수 있었다. 또한 상황을 바꿀 수 없다면 그 상황을 대하는 나의 생각을 바꿔야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던 시간이었다.

 그 다음은 20대 후반, 나와 다른 가치관을 가진 사람을 만났던 때였다. 당시 나와 제일 가깝다면 가까울 수 있는 사람이, 내 노력과 의지로 바꿀 수 없는 질병을 나의 약점인 듯 쥐고 흔들며 나를 이용하려했던 일이 있었다. 이별의 아픔과 함께 사람에 대한 깊은 배신감에 괴로웠던 시간이었다. 연애 후 맞이했던 그 어떤 실연의 아픔보다 치유의 기간이 제법 오래 걸렸다. 하지만 나는 「위대한 유산」에 나오는 미스 하비샴처럼 과거에 머무르는 선택을 하진 않았다. 다양한 사람이 있음을 받아들이고, 가족의 말에 경청해야 함을, 나를 아끼는 사람들이 내 주위에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세 번째는 불과 몇 달 전에 겪은 일이다. 내가 노력하는 방향과 다르게 흘러가는 상황 속에서 내가 굳건히 생각했던, 지켜왔고 또 지키려했던 가치관을 내려놓으면서 많은 혼란과 슬픔을 겪었다. 지금도 여전히 내가 선택한 새로운 상황을 받아들이는 과정 중에 있다. 꾸준히 하루하루 내 자존감을 회복하기 위해 여러 서적을 읽고,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새로운 악기를 배우는 등 갖가지 방법으로 나 자신을 치유하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문득 나 자신에 대한 초라함과 불쌍함을 직면해야 할 때면 그 끝이 보이지 않는 공허함을 채우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 지 모를 정도다. 이렇게 하루하루 보내다보면 괜찮아질까. 이 마음의 구멍은 뭘 해야 메워질까 매일매일 고민하고 도전하고 실험 중이다.

 이렇게 내 인생에 거대한 획들을 그은 사건들은 물론, 자잘하게 내게 영향을 미친 여러 일들을 겪으면서 사회 속에서의 나의 존재감과 위치에 대해 생각해보다가 그렇게 문득, 그렇게 선인장이 떠올랐던 것이다. 그래서 오랜 시간을 보내고 나서 지금에 와, 물감을 사서 꼭 수채화로 선인장을 그려보고 싶었다. 저장해 놓은 수분을 지키고 있는 초록색의 굵은 줄기와 그 위에 흔적처럼 남아버린 가시형태의 잎을 사진 선인장. 건조한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최대한 수분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잎을 좁히고 좁혀, 가시처럼 가느다랗고 뾰족한 형태로 만들어버린 선인장. 나도 이런 저런 일을 겪고 어른으로서, 사회인으로, 엄마로써, 여러 내가 맡은 상황 속에서 내가 뻗은 잎사귀에 생채기가 나거나, 가지가 다쳐 수액을 흘리기도 하고, 잎이 말라 떨어뜨리기도 하며 살고 있다.

 그러다가 문득 두려움을 느꼈다. 내가 이런저런 상처받는 것에 두려운 나머지 나의 잎사귀를 선인장처럼 말아 가시처럼 만들어버리면 어떻게 하지. 한 해 한 해 지날수록, 별 것 아닌 말에 화를 내며 다른 사람들을 상처주거나, 자기를 방어하는 사람들을 이전에 비해 자주 볼 수 있다. 나도 분명 어린 시절보단 그럴 것이다. 개인적으로나 사회생활을 하며 누군가를 만나면, 혹시라도 받게 될 상처나 자극이 두려워 나도 모르게 움츠리고 나를 방어하며 한동안 잠자코 상황을 살피게 된다. 그렇게 세월 속에서 누구나 선인장이 되어 버리는 걸까. 모두 그렇게 자기가 가진 수분의 손실을 막기 위해, 자기 의지와는 상관없이 어느 순간 선인장이 되어버리고 마는 운명인 걸까. 나이가 먹고 어른이 된다 함은 그런 걸까. 아니 나는 이미 선인장이 되어 버린 건 아닐까?

 나는 산이나 바다 같은 사람으로 나이 들고 싶다. 식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수십 년 수백 년이 흘러도 산도 바다도 그 자리에 있다. 그렇게 변함없어 보이기에, 사람들이 나이를 먹어가며 늙고 죽어가는 것, 그리고 세월의 흘러감에 빗대어 변치 않는 자연의 대명사처럼 자주 사용되곤 한다. 하지만 자세히 그 안을 들여다보면 과연 그러한가. 산이나 바다로부터 멀찍이 물러서서 바라봤을 때 변함없어 보일 뿐, 사실은 다르지 않은가.

 나무가 자라고 거센 비에 가지가 꺾이고 바위가 오랜 세월 빗물로 구멍이 나고 갈라지고 굴러 떨어진다. 바다나 심지어 강물도 그 자리에 변함없이 있기는 하지만, 모래가 유속에 따라 움직이며 그렇게 위치가 바뀌어 쌓여가고, 모래끼리 서로 닿으며 매순간 닳고 있다. 돌이나 수중식물엔 이끼가 끼고 새로운 물고기들이 산란기에 따라 찾아온다. 여러 생명이 잉태되기도 하고 한순간에 사라지기도 한다. 그렇게 한 자리에서 오랜 시간 지키고 있는 산과 바다이지만, 가까이에서 관찰하면 무수한 변화가 있는 그런 산이나 바다 같은 사람처럼 나이를 먹고 싶다. 그 자리에 있되, 변함이 없이 한 곳에 오래 고여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변화 속에서 그 본연의 모습을 지키고 서있는 사람. 그 사람에게서 세월이 흘러간 것을 느낄 수 있지만, 그 눈에서 살아온 깊이와 변화를 담고 있는 사람. 어릴 적부터 간직했던 순수함과 장난기가 느껴지는, 하지만 그 세월에 맞서 자신 본연의 모습을 지켜낸 그런 맑은 눈망울을 가진 사람이 되고 싶다.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사랑하라는 어떤 여류작가의 시의 내용처럼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이, 마음을 지켜내고 상처받더라도 또다시 자신이 지니고 있는 고유의 특질을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이야 말로 강한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그런 생각을 하며 오랜만에 팔레트에 물감을 짠다. 여러 가지 색 물감들 위로 햇볕에 빛이 반사되어 반짝이는 모습이 예쁘다. 학창시절엔 그렇게 한 번도 해보지 않았지만, 나중에 물감이 말라버리면 비슷한 색을 구분 못할 듯하여 검정색 펜으로 물감 아래쪽에 색 각각의 이름을 구분하며 적어놓는다. 그리고 천천히 붓을 들고 선인장 그림을 어떻게 시작해볼까 종이 위에서 망설인다. 생각만 하던 중 먼저 연필로 스케치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붓을 다시 내려놓았다. 스케치를 하며 통통한 모양의 선인장을 그릴지, 가느다란 모습의 선인장을 그릴지 잠시 생각한다. 나는 이런저런 일을 겪고 나서도 비교적 많이 움츠러든 것 같진 않으니 가느다란 형태의 선인장을 그려야지... 그럼 그 다음에 가시는 어느 정도로 그릴까. 선인장을 화분에 심어줄까 사막에 그려줄까. 이런 저런 고민을 하며 내가 선인장이 된다면 어떤 모습일지를 계속 생각해본다.

 내가 살아내고 싶어 하는 모습과는 정 반대인 선인장이다. 하지만 내가 이제껏 살면서 사람들로부터 또는 사회생활 중에, 상처받고 움츠렸던 나를 초록색의 길쭉한 줄기와 뾰족한 가시의 모습으로 담아본다. 가시 하나하나를 초록계열과 갈색톤으로 그리면서, 그간 내가 겪어온 모든 상처와 움츠림을 이 선인장 그림 속에 담는다고 상상을 한다. 그리고 나는 다시 넓은 잎사귀를 활짝 펼치고 하늘을 바라보는, 풍성한 잎을 드리운 나무가 되겠다고 다짐해본다. 설사 벌레가 먹더라도 거센 비를 맞아도, 우박이 떨어져 아프고 다쳐도 잎을 숨기거나 움츠려 겁내지 않으며 살고 싶다. 잠시 동안 충분히 돌아보며 날 스스로 치유하고, 그 과정에서 과감히 흘려보낼 건 흘려보내고 감수할 것은 감수하면서 그렇게 원래 모습 그대로의 나를 세상에 활짝 펼쳐 내보이는 사람. 그렇게 그 자리에 당당히 서있을 수 있는 그런 모습의 사람이 되고 싶다. 오랜 시간이 흘러 머리가 희끗희끗해졌을 때도 나는 살아온동안 나를 지키며 선인장이 되지 않았노라고 웃으며 말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전 25화 뫼비우스의 띠: 시작과 끝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