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단-8> 세상을 읽는 힘, 리터러시
내가 리터러시라는 말은 안 건 10년 남짓이다. 우리에게 보편적으로 쓰이지 않았기 때문에 모르는 것도 당연했다. 리터러시(literacy,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능력)는 말 그대로 하면 문자를 해독하는 능력, 즉 문해력이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리터러시에 ‘미디어’나‘ 디지털’ 같은 단어가 따라오면서 적극성을 띄기 시작했다. 그냥 읽기가 아닌 ‘분석적 읽기’, ‘깨어서 읽기’라는 의미를 포함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바뀌면서 나에게는 친숙한 단어가 된다. 첫 직장인 ‘미디어오늘’은 미디어를 분석적으로 읽어서 대중들이 미디어를 제대로 이해하게 하는 역을 하는 매체였기 때문이다. 내가 기자 생활을 시작은 1995년 가을은 김영삼 정부의 중반기로 보수 여당의 기운이 강했다. 보수 매체들은 경쟁적으로 정권의 수호자 역할을 했고, 언론을 통해 나오는 기사도 그 만큼 의도성이 강했다. 그런 세상을 바꾸는 게 젊은 내 의지 속에 있었다. 나는 흔히들 말하는 의식화 된 상태라고 해도 틀리지 않았다.
그 시작은 대학 1학년때 쯤 도서관을 헤매다가 파울로 프레이리(1921~1997)의 책 ‘페다고지’를 만난 것일 수 있고, 사회과학 동아리에 들어간 것을 수 있다. 프레이리는 브라질에서 태어나 제국주의에 맞서는 철학을 만들려 했던 그는 남미 해방운동의 선구자 중 하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남미는 여전히 정치적 혼돈 속에 있지만, 그때 그들이 넘긴 개념들은 지금도 내게 깊게 남아있다. 그가 쓴 가장 대표적인 단어가 ‘즉자적’과 ‘대자적’이었다. ‘즉자적’(則自的)은 자신에게 오는 것들을 있는 그대로 곧바로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반면에 ‘대자적’(對自的)은 스스로 그 오는 것을 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자세를 말한다. 어떻든 그때 이후 대자적이라는 말은 내 삶에 중요한 잣대가 됐다. 무슨 현상이든 그대로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충분히 비판적으로 검토해서 수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 개념은 막스가 먼저 사용했지만, 내 눈에 걸린 것은 프레이리의 글을 통해서다.
이후 사회학에서 뿐만 아니라 국어학에서 조차 그런 주체적 수용에 단어가 많이 들렸다. 언어학자 소쉬르의 시니피에와 시니피앙 조차도 그렇게 읽혔다. 그러다가 내게 가장 신선하게 들어온 단어가 ‘미디어 리터러시’였다. 미디어 리터러시(media literacy)는 간단히 말하면 미디어를 비판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하는 전반적인 시스템을 일켣는다. 내가 첫 직장에서 보는 눈을 학문적으로 정리한 개념에 가깝다고 보면 된다.
그럼 미디어 리터러시는 어떤 모습일까. 가령 지금 사회에서 시간당 최저임금을 1만원으로 올리자는 논의가 진행된다. 그런데 이런 이슈가 나오면 보수매체로 불리는 조중동은 열불을 내면서 반대하는 의견들을 독자들에 전달한다. 반면에 진보성향의 매체는 찬성하는 입장을 독자들에게 전달한다. 그러면 보수매체의 독자는 1만원으로 안올리는 게 맞다고 생각하고, 진보매체 독자는 1만원으로 올리는 게 맞다고 생각해 정반대의 판단을 하게 된다. 결국 자신이 믿는 매체만 믿으면 결국 독자는 한가지 관념만 주입받게 된다. 그런데 미디어 리터러시는 그런 배경이나 논리를 정리해서 각 매체가 그런 입장을 가진 이유를 설명한다. 영화 ‘내부자들’을 보여주면서, 언론사가 검찰 등과 결탁해 저런 식으로 언론을 활용할 수 있다는 것도 알려준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언론사들이 가진 성격도 복잡하다. 진보와 보수라고 완전히 특성을 규정할 수 없다. 가령 한겨레 신문 검찰 출입기자와 다른 기자의 거리가, 보수신문 기자와 한겨레 일반 기자의 거리보다 멀 수도 있다는 게 최선의 흐름이다. 일단 신문사 안에도 계보가 있고, 기자로 합격하는 층이 이미 사회에 대단한 기득권 층이 됐다는 점을 감안하면 충분히 숙고해볼 문제다. 물론 이건 아주 복잡한 성향의 문제이지, 옳고 그름의 문제는 아니다.
사람들은 이런 배경에 대한 나름대로 이해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미리 걸러서 볼 수 있다는 생각도 한다. 하지만 그렇게 간단한 문제는 아니다. 진보층이라고 할지라도 굉장히 다양한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 그들 가운데는 이미 사회적 영향력을 확보한 이들이 있고, 이들은 그들의 힘을 조직화시키려는 정서를 가질 수 있다. 그러면 그들은 또 다른 권력이 될 수 있고, 필요에 따라서 자신들의 의지를 관철하기 위해 세력을 형성하고, 여론도 만들 수 있는 것이다.
-미디어 넘어선 리터러시 필요성
그런데 이것이 정치 등 특정한 문제만은 아니어서 복잡하다. 현대는 포털 등 망을 가진 사람들이 스마트폰을 통해서 사람들의 모두에게 영향을 줄 수 있다. 내가 ‘LG 알뜰폰’을 검색하면 이후 내가 보는 스마트폰은 물론이고, 집에 있는 데스크탑, 유튜브까지 모두 관련 광고를 보여줘, 내가 어떤 결정을 내리는데 영향을 준다. 내가 오는 어느날 간편한 조립식 신발장을 사고 나면 비슷한 생활 관련 아이템들이 지속적으로 보여준다. 또 살 수 있는 사람이란 걸 알고리즘 관계자가 알기 때문이다. 단순한 소비만이 아니다.
내가 여당이 우선한 콘텐츠를 즐겨보는 것을 알면, 유튜브는 관련 콘텐츠를 더 노출시킨다. 결국 알고리즘을 만드는 이들이 내 정치적 성향도 콘트롤하고 있는 시대가 된 것이다. 미국에서는 이런 식의 선거기법을 십수년전부터 써왔고, 사회적인 논란거리가 됐다. 나라에 따라서 페이스북 등 SNS광고를 막는 경우도 있는데, 이런 이유 때문이다. 이런 기술을 쓸 수 있다면 권력과 돈을 가진 이들은 지속적으로 정권을 만들 수 있다. 최근 선거에는 심리학이나 행동경제학 전문가들이 음으로 양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유권자의 심리를 통해 자신들을 유리하고 이끌기 위한 여러 가지 기법을 쓸 수 있다. 우리나라에는 아직 전공자가 많지 않지만 행동경제학은 유권자의 행동을 분석해 경제에 적용하는 방식인데, 선거에서도 그대로 사용할 수 있다. 물론 과하면 상당히 위험한 방식이다. 문제는 히틀러 등 많은 독재자들도 이 방식을 이용해 왔다.
또 우리가 갈수록 네트워크, 혹은 소셜 미디어에서 이런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는 상황으로 가고 있다. 결국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이런 구조라도 파악하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내가 어떤 판단을 하던 타인의 의지가 아닌 내 힘으로 판단했다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판단에서 ‘리터러시’는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럼 리터러시는 어떤 것이 있을까. 앞서 말한 미디어 리터러시는 가장 활발하게 진행되는 분야다. 이미 학문적으로도 정의되어 지속적으로 발전하고 있다. 앞으로도 더 체계적으로 발전하고, 관심을 가져야할 분야다.
이밖에도 ‘디지털 리터러시’, ‘데이타 리터러시’ 같은 말도 있다. 두가지 역시 의미는 비슷하다. 디지털 사회는 데이터 전쟁의 시대다. 앞서 내가 디지털 세계에서 움직이는 것들은 대부분 데이터로 만들어지고, 그것은 결과적으로 시장을 잡으려는 자들에게 가장 강력한 자원이 된다. 사람들은 자신이 어떤 욕망을 가지고 있는지 완벽하게 알지 못한다. 그래서 고민도 한다. 그런데 데이터를 가진 인공지능(AI)은 마음만(?) 먹으면 내가 어떤 패턴을 보일지 알 수 있다. 내가 금요일 저녁에 프로야구를 보면서 응원하는 팀이 지면 술이 땡기는 것을 인공지능을 기억할 수 있다. 그리고 그 타이밍에 맞추어, 내가 보는 미디어의 한 켠에 시원한 술 광고를 하면 나는 끌려갈 수 있다. 그 자리에는 술 대신에 치킨, 피자 등 배달음식이 차지할 수 있다.
따라서 주체적인 소비를 위해서는 그 데이터를 가진 이들이 어떤 방식으로 나를 조정하려 하는 지를 깨달을 필요가 있다. 그게 작은 생활용품일 수도 있지만, 때로는 주택이나 금융상품처럼 큰 투자여서, 자신의 경제 생활에 큰 영향을 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바른 리터러시로 가는 길
이 기획의 앞 목표는 세상이 돌아가는 것을 읽고, 그 방법으로 책을 읽자를 강조했다. 필자는 세상을 읽는데 있어서 이 리터러시의 철학이 꼭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그러면 어떤 게 리터러시적 삶을 살아가는 것일까. 어떻게 하면 리터러시적 삶을 살아가는 것일까.
첫째는 내가 판단해야 하는 전 단계에서 내가 일방적으로 지시받고 있지 않은 지를 검토하라는 것이다. 판단은 단계가 있다. 우선 아이디어를 검토하고, 논증하고, 분석하며, 정보를 분류하고, 의미를 해석하고, 결론을 내리는 과정을 거친다. 그런데 이 과정 하나하나에 비판적 생각을 갖고, 제대로 판단하는 지를 계속 고민해야 한다. 과거 생산현장에는 ‘6시그마’(six sigma)가 있었다. 품질혁신과 고객만족을 달성하기 위해 불량률의 목표를 정하고, 전사적으로 실행하는 21세기형 기업경영 전략이다. 그런데 제품의 불량 뿐만 아니라 기획이나 판단의 과정에서 그런 불량을 막는 지를 고민해봐야 한다.
둘째는 이 과정에서 확실하게 증거를 찾을 때까지 열린 마음을 유지하며, 세상에 대해 호기심을 느끼는 태도를 갖는 것이다. 물론 시간이 촉박한 일이라면 기다릴 수 없겠지만, 미리 준비해 충분히 검토할 시간을 갖는 게 좋다. 이때 모든 구성원은 물론이고, 밖에서도 열린 마음으로 그 문제를 같이 하는 것이다. 필자가 공직 사회에서 가장 아쉬운 점은 협업의 문화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사실 일반 직장도 협업이 어려운데, 공직은 더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하지만 자신이 일하는 곳이 기계적인 공간이 아니라 같이 하는 공간이라면 부서간 장벽을 허물고, 같이 도달할 목표를 찾는 것은 소중한 일이다. 이때 외부 전문가그룹도 적극 활용해볼 필요가 있다.
세 번째는 진정한 리터러시의 결과물은 독창적인 아이디어와 창의적인 문제해결을 가져온다는 것이다. 미디어 환경의 변화는 분명히 부정적인 면이 있다. 가령 ‘빅 브라더’나 ‘판옵티콘’으로 불리는 거대한 감시의 눈에 생겼다는 것을 확실하다. 하지만 플랫폼의 발달은 개인이 이제 특별한 제한 없이 세계로 나갈 수 있는 시대도 됐다는 것을 의미한다. 파워 유튜버의 경우 공중파에 버금가는 매출을 올릴 만큼 성장한 것도 특이한 일이 아니다. 과거처럼 공중파, 케이블, 스카이라이프, SNS로 순위를 매기던 시기는 지났다. 따라서 독창적인 콘텐츠를 순식간에 전 세계에 영향을 줄 수 있다. 싸이나 정부산하기관 홍보 영상이던 ‘범 내려온다’가 세계적인 인기를 끈 것도 한 예이다. 국내에서서 수십억원의 예산이 들어가는 서울이나 경기도가 만드는 영상 보다 거의 예산없이 지자체 공무원이 만드는 충주시 콘텐츠가 인기를 얻는 것도 이런 기반의 변화가 있기 때문이다.
네 번째는 리터러시형 인간형에 대한 관심이 생길 것으로 보인다. 지금까지 우리 사회에서 인재상은 고학력, 고스펙 등 외관을 많이 봤다. 필자도 공직에 있으면서 두차례 면접 시험을 본 적이 있다. 그런데 가장 눈에 띈 인재는 통찰력, 창의력, 비판적 능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사실 스펙으로 불리는 경력들은 면접관이 적극적으로 관여하게 하는 힘을 주지 못한다. 사실 면접 세계는 뻔히 뽑아야 할 사람이 있고, 도저히 뽑지 않게 만드는 두가지 인물형이 있다. 일단 사전에 여러 경로로 뽑았으면 하는 사람이 나올 수 있다. 면접 부정으로 볼 수 있지만 사람 사는 세상이니, 그런 문제를 함부로 제기하기 힘들다. 더욱이 면접관이 7명이라면 그 사람이 요청을 받은 경로가 달라서 함부러 말할 수 없다. 그런데 그런 경로를 이겨내는 경우도 있다. 아 저 사람은 여기에 꼭 필요하다는 인상을 주는 것이다. 면접자 가운데 점수가 별 차이가 없다면 앞서 청탁이 통할 수 있지만 확실한 장점이 있는 후보자라면 함부로 배제할 수 없다. 그런 능력을 갖추어야만 인생의 중요한 난관 등을 넘어설 수 있다. 그런 변별력은 어려울 것으로 보이지만 충분히 만들어낼 수 있다. 물론 이때 가장 중요한 게 열정이다.
마지막으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스스로를 분석적으로 읽어낼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리터러시를 넘어서 삶의 주체는 자신이다. 자신을 제대로 보지 않으면 모든 것들은 잘못된 것이 될 수 있다. 인생의 주기에서 자신은 어디에 있는지, 내가 가진 능력은 어디에 있는지, 내가 가진 사람들의 어느 정도인지, 내가 가진 능력과 사회의 접점은 어디인지를 알아야 한다. 필자는 서른살에 결혼과 더불어 중국에 투자하기 위해 중국으로 떠났다. 중국어를 한마디도 못한 상태였다. 중국에 도착해 중국어도 배우고 10년을 지내다가, 하루 아침에 귀국해야 했다. 내 의지가 아니라 운명이었다. 마흔을 한국에서 다시 시작해야 했는데, 다행히 중국 전문 공무원을 뽑는 자리에 지원했다. 그렇게 5년 동안 공직을 하고, 이후 중국 전문지 편집장도 하고, 기업에 임원도 했다. 그때까지는 중국 전문가로 살았다. 그런데 사드 도입이나 코로나가 터지면서 중국이라는 곳에서 먹고 살 것이 전무했다. 그때 나는 궁여지책으로 다시 언론을 선택해 춘천시 시민소통담당관을 지원해 합격했다. 아마도 우리나라에서 전문공무원으로 사무관급 이상을 두가지 한 사람은 극히 드물 것이다. 나는 투자유치와 미디어 분야로 그런 일을 했다. 내가 만약 그간에 배운 한가지를 고집하고 살았다면 다음 변화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각자의 인생은 단계별로 놓고, 거기에 맞추어 살아갈 수 있는 인생 리터러시를 말하고 싶다.
실제로 많은 곳에서 ‘라이브 라이브러리’라는 프로그램을 가동한다. 한 사람의 생애는 책과 같아서 그 사람을 열람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만약 공무원을 지망하는 이가 선배 퇴직 공무원과 진솔한 대화를 통해 미리 알 수 있다면 좀 다른 삶을 선택할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생 러터러시’ 역시 가장 중요한 러터러시 중 하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