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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중 걸쇠 04화

가정

짐작할 수 있는 사실들

by 정윤

“잠 좀 잤어? 어째 얼굴이 영 별론데.”


민서가 익숙한 몸짓으로 집안을 가로질렀다.


그러면서 며칠 잠도 못 자고 애썼을 친구의 얼굴을 한 번 살폈다.

민서는 시은의 중학교 동창으로, 약혼자인 찬혁보다도 시은에 대해 더 잘 아는 사람이었다.

엄마에게 못 할 말도 민서에게는 털어 놓았고, 찬혁에게 숨기고 싶은 일도 민서는 알고 있었다.


거의 불알친구라고나 할까.


“잠은 잤어. 짐 정리하다 좀 충격적인 걸 봐서 그래.”

“충격적인 거?”


어머니, 설마 뭐 숨겨둔 로또 번호 이런 거 있으셔?


살짝 가라앉은 시은의 말에 민서가 과장된 몸짓을 했다.

분위기를 풀려는 듯한 행동에, 시은이 옅게 웃음을 흘렸다.

“차라리 그런 거였으면 좋겠네. 직접 한 번 봐 봐.”


시은이 힘 빠진 미소로 고개를 가로젓자, 민서 역시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우고 고개를 기울였다.

“숨겨진 애인이라도 있으셨나?”

알고 보니 너네 아버지가 엄청난 재벌이고 뭐 그런 거?


그럼에도, 거의 본능처럼 농담 같은 말을 중얼거리던 민서는 안방에 들어서자마자 입을 딱 다물었다.

“……야. 이거, 설마.”


민서가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얼핏 바닥에 흩어진 것들을 살피는 듯 보였으나, 시은은 알았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났던 나이만큼의 시간이 흘렀다.

그만큼 서로에 대해 모르는 게 없다고 자부할 수 있는 사이.


시은은 헛웃음을 흘리며 민서를 툭 쳤다.


“너 괜히 심각한 척하지 말고 똑바로 봐. 나 진짜 이젠 뭐가 뭔지 모르겠어서 너한테 도와달라고 부른 거니까.”


어렸을 때부터 상상력이 풍부하고 그림을 잘 그리던 민서는 ‘웹툰’이라는 개념이 처음 생겼을 때부터 연재를 시작한 웹툰 작가였다.


그런 민서에게 이런 상황이 얼마나 좋은 소재처럼 느껴질지 누구보다 잘 아는 시은이었기에.

지금의 행동이 자신의 흥분을 숨기기 위한 몸짓이라는 걸 모르지 않았다.


“아, 미안. 진짜 잠깐 흥분했다. 진정할게.”


그리고 역시나, 흥분한 게 맞았다.


민서는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마구 문지르고는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흩어진 종이와 사진들을 하나하나 살피기 시작했다.


혜정의 이름이 쓰인 서류와 사진들.

전화번호부.

시은이 아직 보지 못했던 것들까지.


하나하나 살핀 그녀는 흠, 하고 사진 속 보육원 간판을 손가락으로 톡 건드렸다.


“어머니가 생전에 보육원 봉사활동 같은 거 다닌 적 있으시던가?”
“없지. 울 엄마 봉사활동 같은 건 시간 없어서 못 다니던 사람인데.”

“친구도 별로 없으시고, 여행 같은 건 생전 안 다니셨고.”


민서는 잠시 곱씹듯 말을 뱉으며 낮게 중얼거렸다.


“옛날에 본인 사시던 얘기 같은 것도 안 하시던 분이지.”

“울 엄마 핸드폰에 나 빼면 다 직장 동료들밖에 없어. 교류하던 가족, 친적, 하나도 없는데.”


그런데 이런 걸 숨기고 계셨단 말이지.

민서가 중얼거리며 눈을 빛냈다.

아, 저 얼굴.

소재를 가지고 스토리 라인을 짤 때의 얼굴이다.

익숙한 얼굴에 시은은 저도 모르게 픽, 하고 웃어버렸다.


“아, 미안. 나도 모르게 작품을 짜고 있었네.”


그런 시은을 눈치챈 민서가 두 손을 맞대고 미안한 얼굴을 했다.


하지만 시은은 그런 민서를 보고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됐어. 무슨 생각 했는지 들어나 보자.”


어쩌면 그게 진짜일 수도 있잖아.


사실 바닥에 가득 찬 것들을 봤을 때 민서를 떠올린 건 그래서였다.


가장 가까운 친구인 것도 물론 있지만.

그녀처럼 충격을 받거나 현실을 외면하기보다, 눈에 보이는 것들을 가지고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들을 만들어 내는 사람이라서.


어쩌면 자신이 보지 못하는, 차마 보려고 하지 않는 현실을, 민서라면 대신 보아줄 것 같아서.


그런 시은의 속내를 짐작이라도 하듯, 민서는 잠시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뭐, 나야 현실에서 가상을 만들어 내는 사람이고 너는 가상보다는 진실을 알고 싶은 거 같지만, 지금 여기 있는 자료들만 보고 내가 생각할 수 있는 건 이래.”

민서는 바닥에 펼쳐진 입양서류를 가리켰다.


“어머니가 네 진짜 어머니가 아니시라는 거. 뭐 이거야 거의 기정사실 같지만, 입양아는 입양아라는 걸 증명하는 서류를 뗄 수 있으니 그걸 떼보면 될 거고.”


그리고 이거, 민서가 이번에는 보육원 단체 사진을 집어들었다.

“네가 어머니랑 같이 살기 전에 보육원에 있었다는 것. 전화번호부에 ‘혜정엄마’라는 항목이 있는 걸 봐선 친부모가 보육원에 맡긴 게 아닐까 싶어. 그리고 또…….”


민서는 거기서 말을 끊었다.

그리고 잠시 입술을 깨물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뭐, 이건 가장 최악의 가정이니까 말 안 할게. 어쨌든 가장 좋은 건, 네가 입양됐다는 명확한 증거가 나오는 거야. 그럼 어머니는 네가 입양됐다는 걸 알리고 싶지 않으셨다, 정도로 정리될 테니까.”


민서의 말이 끝나자, 시은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게 가장 단순하고 따뜻한 결론일 테지.

하지만, 마음 한구석이 자꾸 선득해지는 건 왜일까?


시은은 내심 민서의 말이 사실이길 바라면서도, ‘천사 보육원’ 이라고 쓰인 사진 속의 글자에 눈이 가는 걸 막지 못했다.


민서가 그 사진을 들여다보며 읊조리듯 말했다.


“일단 이건 내가 가져가서 보육원에 대해 조금 알아볼게. 근데, 어머니 고향이 B시라고 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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