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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중 걸쇠 03화

결심

결국, 모든 것을 알아내야 했다.

by 정윤

빵빵, 굳게 닫힌 창 너머로 자동차 경적 소리가 들렸다.

똑딱똑딱 시계 초침 넘어가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그 어떤 소리도, 소음도 존재하지 않는 공간에서.

시은은 그것들이 평소보다 유독 크게 귀에 꽂힌다고 생각했다.


손 끝에, 종이가 바스라지는 이질감이 걸렸다.


머릿속을 맴돌던 이름이 서서히 옅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시은은, 내내 전화번호부를 들고 멍하니 있다가 천천히.

시선을 내려 바닥에 흩어진 것들을 바라보았다.


태워버릴까?


순간, 날 선 문장 하나가 번쩍이다 사라졌다.


명백하지 않은 진실, 뭉뚱그려진 엄마의 과거.

어쩌면 그 안에 담긴 선명한 의미와 의도에도, 여전히 알아보지 못하는 가엾은 제 자신.


이 안에 담긴 진실이 무엇이든, 혹은 이미 제가 알고 있든.

모든 것이 그녀의 눈앞에 펼쳐졌다.


그게 엄마의 비밀이든, 제 출생의 비밀이든 간에.


그럼 이걸 태워버리면.

모든 게 없던 일이 될까?


시은은, 그 모든 것들이 지나치게 섬뜩하다고 생각했다.


혹시 누군가 자신을 시험하려던 것은 아니었을까?

엄마를 미워하던 누군가가, 엄마를 협박할 생각으로 보낸 건 아닐까?


어쩌면 엄마도 모르는, 시은으로서는 알 수 없는 누군가의 악의가 이 안에 담긴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시은이 끝내 그것들을 모아다 불을 지를 수 없게 만들었다.


봉투 위 또렷한 엄마의 필체만 아니었다면, 아마 끝끝내 그렇게 해버렸을지도 모르지만.


시은은 더 이상 어떤 생각도 남지 않은 얼굴로, 한참을 그렇게 바닥만 쳐다보고 있었다.


아마 주머니 속에서 맹렬히 존재감을 뽐내는 것만 없었다면.

언제까지고 하염없이 그렇게 주저앉아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


핸드폰 액정 위로 단출한 이모티콘 하나가 떠올랐다.


찬혁이다.

시은은 지잉, 하고 울리는 핸드폰을 바라보다가 버튼을 눌렀다.


흠흠, 하고.

습관인 양 목소리를 가다듬으면서.


“응, 출근 잘했어요?”

-출근은 잘할 수 없는 일인데? 지각할 뻔했어.


얇은 네모판 사이로 다정하게 장난기 어린 목소리가 들렸다.


언제나 제게 묵직한 안정감을 주던 목소리지만.

오늘은 어쩐지 그게 딱딱하게 굳어버린 표정을 어쩌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을.

시은은 문득 떠올렸다.


-짐은 좀 정리됐어? 너무 많으면 좀 쉬다가 나 퇴근하면 같이 하자.


며칠 잠도 제대로 못 잤을 텐데, 하며 찬혁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를 냈다.

그 말에 시은은 생각했다.


오늘, 그가 함께 오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별로 많진 않아요. 큰 건 대충 정리했는데, 자잘한 게 문제네요. 진짜 오빠 퇴근하면 할까 봐.”


그러면서 애써 침착하게, 깊이 가라앉은 감정을 숨겨냈다.

과분할 정도로 저를 사랑해 주는 그라면, 목소리만으로도 제 감정을 유추해 낼 수 있을 테니까.


찬혁이 그 뒤로 몇 마디를 더 건넸지만 시은은 이따 퇴근하면 보자는 말로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거짓말을 잘하지도 못할뿐더러, 자꾸만 그에게 이 모든 일을 이야기하고 싶다는 충동이 올라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끝끝내.

시은은 그에게 이야기하지 않기를 택했다.


전화를 끊은 시은은 손에 들고 있던 전화번호부로 눈을 돌렸다.


‘천사보육원’.


핸드폰을 켜 인터넷 창에 보육원의 이름을 쳤다.

20년도 더 된 곳이니 나오지 않을 거라는 생각은 있었지만, 역시나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나타나는 것이라곤 ‘보육원’ 연관으로 유명인들의 선행 관련 기사나 행사 관련 기사들뿐.

줄줄이 뜨는 것을 보던 시은은 핸드폰을 내리며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다면 여기 있는 전화번호들도 이미 지워진지 오래일 거라는 이야기일 텐데.

쓸모없는 전화번호부를 덮고, 시은은 다시 핸드폰을 들었다.


‘199x년 아동 실종 사건’


구체적인 연도까지 기입했으니 뭐라도 나오지 않을까 했건만.

밑에 뜨는 것들은 언젠가 뉴스에서 봤던 유명한 사건들.

그리고 지나가며 한 번쯤 보았던 장기 실종 아동 수배 전단.


그 어디에도, 혜정의 이름은 없었다.


그럼, 대체 저 실종 아동 전단은 뭐란 말이지?

엄마가 아무 연관도 없는 것들을 모아서 가지고 있었다는 건가?


시은은 실종된 4살 혜정이를 찾는다는 전단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다시 핸드폰을 들었다.


뭐가 됐든, 대체 왜 엄마가 이걸 여태 갖고 있었는지 알아야겠다.

그래야 잠을 자든, 찬혁에게 모든 것을 이야기하든 할 수 있을 테니까.


시은은 핸드폰 속의 익숙한 전화번호를 찾아 버튼을 눌렀다.


“어, 민서야. 난데…….”


순간, 창문 걸쇠가 저 혼자 덜그럭거린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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