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번째 입원 - 2일 차

2019.05.29

by 연보라

밥 한 끼를 먹을 때마다 마치 하루가 지나간 것 같다. 이곳의 시간은 그렇게 느리게 간다. 오죽하면 점심때 오늘 아침의 일을 어제로 착각했다. 그래도 시간이 지나면서 친해지는 사람도 생기고 답답함도 줄어드는 것 같아 정말 다행이다.

오늘 프로그램 시간에는 피천득 수필의 내용일부를 바꾸어 내 이야기로 만드는 작업을 했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 수필을 가득 채우니 뿌듯하고 기분이 좋아졌다.

면담을 하다가 또 울었다. 이미 많이 했던 이야기라 이젠 안 울 줄 알았는데 힘들었던 과거를 떠올리니 다시 눈물이 터져 나오고 말았다. 저녁 면담 때도 울었다. 나는 면담 때마다 우는 것 같다.

환경, 유전 등에 기반하여 내가 형성된다는, 그래서 이러한 환경을 겪고 이러한 유전자를 타고난 나는 이런 행동 패턴을 보일 수밖에 없고 우울증에 걸릴 수밖에 없다는 나의 세계관을 가지고 주치의 선생님과 토론(?)을 벌였다. 유전자가 완전히 같고 비슷한 환경에서 자라도 전혀 다른 성격이 형성될 수 있다는 주치의 선생님의 말에 나는 할 말을 잃었지만 그래도 환경과 유전적 요인 말고도 성격에 영향을 줄 만한 요소가 있었을 거라 생각하며 내 세계관을 고집했다. 누가 맞는지는 알 수 없지만 내가 가진 사고가 우울증 치료에는 크게 도움이 안 될 것 같다는 말에는 동의가 되었다.

그리고 내가 가혹한 초자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 스스로에게 너무 엄격하지 않기를!


피천득의 <나의 사랑하는 생활> 연보라 버전

나는 우선 내 마음대로 쓸 수 있는 돈이 (갑자기 분에 넘치도록) 생기기도 하는 생활을 사랑한다. 그러면 그 돈으로 (나의 삶을 기록할 카메라를 사고) 싶다. 그리고 (우리 가족에게는 적당한 집을 사주고), (나에게는 북카페를 사주고 싶다).

나는 (이제 막 쌓인 새하얀 눈) 밟기를 좋아한다. (맨발로 바닷가 걷기를) 좋아한다. (보드라운 털 만지기를) 좋아한다. 나는 (웃는 얼굴을) 좋아한다. 나는 (행복 넘치게 웃는 얼굴을) 더 좋아한다. (우는 얼굴)도 좋아한다.

나는 (창가로 스며들어오는 햇빛을) 사랑한다. (보라 색깔을) 사랑한다. 나는 (밖에서 들리는 새)소리를 좋아하며, (흥얼거리는 노래) 소리를 즐긴다. 나는 (막 끝난 빨래) 냄새, (엄마품) 냄새를 좋아한다. 나는 (친구와 수다 떠는 것을) 좋아한다.

나는 (평범하고 화목해질) 나의 집을 좋아한다.

나는 하늘이 푸른날 아침에는 (훌쩍 떠나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여러 사람을) 좋아하며 아무도 미워하지 하니하며 (나와 주변 사람들을) 끔찍이 사랑하며 살고 싶다.

그리고 나는 (나란 존재를 알아가며 행복하게) 늙어가고 싶다.


면담내용:

우울증이 괜찮아진다면
1. 사회로 돌아가야 할 텐데 그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특히 학교생활과 인간관계에 대해 자신이 없다.

2. 실수에 대한 두려움이 생긴다. 현재로써는 우울증이 나의 보호막이 되어 어떤 실수도 용납되지만 우울증이 낫는다면 다시 뭐든지 잘해 내야 할 것만 같은 생각이 든다.

3. 내 원래 모습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그 원래의 모습은 그대로 너무 힘들었고 돌아가고 싶지 않다. 또한 돌아갈 원래의 모습이 없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내가 원하는 나의 모습은 하고 싶은 일들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지금은 공부를 하려고 해도 잘 안되고 인간관계도 하고 싶지 않다. 예전에 내가 하고 싶었던 일이 엄마 아빠가 좋아하는 일이라면 앞으로는 내가 좋아하는 일로 전환할 필요가 있는 것 같다.


내가 원하는 모습: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게 되는것

- 예전에는 하고 싶었던 일이 엄마, 아빠가 좋아하는 일이었다면 이제는 내가 좋아하는 일로 전환할 필요가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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