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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홈나이 Oct 30. 2022

향기로 기억하겠습니다

대학교 1학년, 꼭 수강하고 싶었던 교양 과목이 있었습니다. ‘인간 심리의 이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우리의 자신을 바라보고 객관화하고자 했던 고민은 어느덧 머리가 커버린 저에게도 똑같은 질문을 던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대부분의 수업은 인간의 ‘심리’를 다루기보다, 인간의 심리에 영향을 미치는 ‘뇌’를 다뤘습니다. 그렇지만 그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강의 내용을 언급한다면 다음과 같습니다. 인간의 5가지 감각은 뇌에 일정한 영역을 차지하며 독립적으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만일 하나의 감각 영역의 크기가 작아진다면 그 부분을 인접한 다른 감각이 잠식하고 크기를 키웁니다. 예를 들어 만약 한 사람이 후천적으로 청력이 약해진다면, 인접한 후각이 강해지는 경우를 볼 수 있습니다.


네. 이렇게 길게 설명한 이유는 바로 제 얘기이기 때문입니다. 경도 난청으로 빠져나간 청각의 자리를 후각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정말 운이 좋게도, 운치 있게, 저는 장소와 사람 그리고 분위기를 향기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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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과 함께한 여행이었습니다. 지중해의 푸른 바다가 넘실 거리는 그곳으로 말이죠. 당신과 함께한 그곳으로의 여행은 제 젊은 날의 소망이자 지난한 저의 역사에 대한 사죄였습니다. 왜 하필 이곳이냐고 묻는다면, 십여 년 전 방문한 이곳의 햇살은 포근했으며, 설레게 불어오는 바람과 넘쳐나는 수많은 역사의 전율을 나의 당신의 역사에도 얹어드리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 섬을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지중해의 일렁이는 푸르고 투명한 바다. 그 깊은 바다 어딘가에 춤추고 있을 붉은 산호. 카프리섬 한 바퀴 휘감고 난 후 전해진 형형색색의 아름다운 꽃들과 싱그러운 레몬 내음. 수 천년 동안 뱃사람들의 종착지를 안내했던 희망의 태양.


또 있습니다. 무엇보다 장엄한 지중해의 일출 앞에서 품었던 당신의 비밀스러운 가족에 대한 소망. 버팔로 치즈향 가득한 피자를 한입 베어 물며 어렸을 적엔 버터와 치즈를 좋아했다던 당신의 추억. 섬 전체를 수놓은 형형색색의 꽃 앞에 서서 포즈를 취하던 소녀와 같던 당신. 그리고 친구들과 골프를 쳐야 한다며 뜨거운 태양 아래 휴대폰으로 예약 시간을 기다리던 당신의 기쁨.


그래서 향수를 갖고 싶었습니다. 당신과 함께한 이 순간을 함축한 향을 품는다면 언제든 끄집어 내 그곳으로 여행을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마침 그 섬을 품고 있는 800년도 더 된 오래된 향수 가게가 있었습니다. 단 하나의 향으로는 모든 기억을 다 담아갈 수 없을 것 같아 욕심 많게도 여러 향을 집어 들었습니다. 그리곤 당신과 함께 향수를 고르던 추억도 덧붙여야겠습니다.


저는 당신과 함께한 그 섬이 그리울 때면, 언제든 추억하겠습니다. 그리고 이 향이 다하는 날 그때 곁에 있을 누군가와 다시 한번 이곳을 찾아와 ‘오래오래 추억하겠다’는 당신의 문자에 눈물을 글성거렸던 어린아이 같던 저를 소개하겠습니다. 그렇게 향기로 기억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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