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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서히 죽어가는 사람

~단지 숨을 쉰다고 삶인가~

by 강신옥

이 가을에는 시를 읽고 싶었다.

도서관에서 류시화작가님의 ‘시로 납치하다’라는 책을 골랐다.

하루 일과를 끝내고 음악을 들으며 시를 읽는 시간이 가을만큼이나 좋았다. 이 가을, 시로 마음을 물들이고 싶었다. 오래된 친구를 만난 듯 한 편 한 편 시가 내 마음에 내려와 앉았다. 잔잔한 감동의 물결에 마음도 일렁이고 세상도 조금씩 열리는 듯했다. 그러다 나를 당황하게 만든 시가 있었다. 바로 마샤 메데이로스의 ‘서서히 죽어가는 사람’이라는 시였다.



서서히 죽어가는 사람

-마샤 메데이로스-


습관의 노예가 된 사람.

매일 똑같은 길로만 다니는 사람.

결코 일상을 바꾸지 않는 사람.

위험을 무릅쓰고 옷 색깔을 바꾸지 않는 사람,

모르는 이에게 말을 걸지 않는 사람은

서서히 죽어 가는 사람이다.



열정을 피하는 사람 흑백의 구분을 좋아하는 사람,

눈을 반짝이게 하고 하품을 미소로 바꾸고

실수와 슬픔 앞에서도 심장을 뛰게 하는

감정의 소용돌이보다

분명히 구분하는 걸 더 좋아하는 사람은

서서히 죽어 가는 사람이다.



자신의 일과 사랑에 행복하지 않을 때

상황을 역전시키지 않는 사람,

꿈을 따르기 위해 확실성을 불확실성과 바꾸지 않는 사람

일생에 적어도 한 번은 합리적인 조언으로부터 달아나지 않는 사람은

서서히 죽어가는 사람이다



여행을 하지 않는 사람,

책을 읽지 않는 사람,

삶의 음악을 듣지 않는 사람

자기 안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지 않는 사람은

서서히 죽어가는 사람이다



자신의 자존감을 파괴하고 그곳을 에고로 채운 사람

타인의 도움을 거부하는 사람

자신의 나쁜 운과

그치지 않고 내리는 비에 대해

불평하면서 하루를 보내는 사람은

서서히 죽어가는 사람이다



시작도 하기 전에 포기하는 사람

알지 못하는 주제에 대해 묻지도 않고 ,

아는 것에 대해 물어도 대답하지 않는 사람은 ,

서서히 죽어 가는 사람이다.



우리 서서히 죽는 죽음을 경계하자.

살아있다는 것은 단지 숨을 쉬는 행위보다

훨씬 더 큰 노력을 필요로 함을 기억하면서...




'서서히 죽어가는 사람'이라는 제목에 섬뜩했다.

연상했던 공포의 시가 아니었다. 진정 살아있는 삶이 무엇인지 각성시키는 시였다. 작가의 말처럼 나는 숨 쉬고 있다고 살아있는 줄 알았다. 내 삶을 시에 비춰보며 나도 서서히 죽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시 한 줄 한 줄을 곱씹어 보았다.



시의 대부분은 나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나도 하루 일과의 기본은 습관적으로 살아가고 있다. 나이 들어도 낯가림은 여전해서 모르는 이에게 말 걸기 주저한다. 이제 눈을 반짝일 정도로 어떤 일에 호기심도 관심도 점점 사라지고 있다.


더 젊었을 때와 달리 실수와 슬픔 앞에서도 어떤 영화 제목처럼 ‘어쩔 수 없다’라며 은근슬쩍 무덤덤하게 넘어가고자 한다. 일과 사랑에 행복하지 않아도 역전시킬 엄두도 내지 않는다. 어차피 세상은 내가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음을 알았기 때문이라고 합리화를 하기도 한다.


여행하고 돌아와서도 대문 열고 집에 들어서는 순간 늘 ‘집이 최고야’라고 소리친다. 여행에서 돌아올 집이 있어 행복하다고까지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니 나도 어쩔 수 없이 서서히 죽어가고 있었다.



구구절절 나도 서서히 죽어가고 있었다는 사실에 내심 두려웠는데 내가 아직은 살아있었다는 사실에 가슴을 쓸어내리게 한 구절이 있었다. 그나마 아직 도서관을 졸업하지 않아서 책은 조금씩이라도 읽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 구절에서 나도 모르게 ‘휴, 다행이다’라고 읊조렸다. 평생 쓰지는 못 해도 살아있는 동안은 뭔가 늘 읽고 싶다


글을 읽고 쓸 때나 일을 할 때 늘 삶의 음악도 동행을 해주었다. 시에서 음악 때문에 내가 살아있었다 것을 깨우쳐 주었다.

성경을 읽을 때는 가사 없이 찬송연주를, 시나 수필을 읽을 때는 오랜 세월 변함없는 클래식을, 정보를 주는 글을 읽을 때는 아이들처럼 배우는 마음으로 동요를 들을 때가 많다. 때로는 긴장을 풀고 좋아하는 대중가요에 빠지기도 한다. 내 삶 곁에 음악의 선율이 함께 있어 내가 더 살아날 수 있었다니 알고 보니 음악도 내 삶의 동반자였다.


그치지 않고 내리는 비를 불평까지 하지는 않아도 반가워하지는 않았던 마음이 들켜서 뜨끔 했다. 이제부터라도 그치지 않고 내리는 비에도 메마른 마음 적시면서 초록들처럼 다시 살아나고 싶어진다.


궁금한 것은 아직도 물어보고 싶어 하지만 이제 새로운 일은 해보지도 않고 자신감이 없고 두려워서 포기하고 싶어 지니 나이 탓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그저 숨만 쉰다고 살아있음이 아니라는 사실에 숙연해졌다.

훨씬 더 큰 노력을 해야 진정 삶이라 할 수 있다는 말이 점점 게을러져 가는 내 가슴을 두드린다. 어느새 서서히 죽어가고 있었던 나를 흔들어 깨운 시였다.

시의 마지막 구절 ‘살아있다는 것은 단지 숨을 쉬는 행위보다

훨씬 더 큰 노력을 필요로 함을 기억하면서...’라는 말.

단지 숨만 쉰다고 삶이라 할 수 없으니 더 큰 노력을 해야 함을 평생 명심하고 싶다.



류시화작가는 ‘서서히 죽어가는 사람’ 시에 대해 이렇게 해설을 덧붙였다.


폐는 계속 숨을 쉰다고 해서 강해지거나 폐활량이 커지지 않는다.

단지 조금 숨을 쉬면서 그것을 삶이라 부르는 것은 자기 합리화이다.

디에이치 로렌스는 말했다.

그저 좋아하는 것을 하고 있다고 해서 자유로운 것이 아니다.

인간은 내면 가장 깊은 곳에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할 때만 자유롭다.

그 자유에 도달하는 길이 있다.

뛰어드는 것이다.

그때 얼마나 많은 기쁜 순간들이 찾아오는지 놀라울 따름이다.

그 기쁨은 성취의 기쁨만이 아니라 나를 만난 기쁨이다.

안전한 거리를 두고 삶을 살아가는 것,

어중간한 경계인으로 인생 대부분을 보내는 것은

서서히 죽는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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