쫄보 퇴사러 이야기, 이렇게 형편없는 방황이라니 - 5편
* 본 글은 특정 직업군 전체의 특성을 다룬 것이 아니며 저자가 경험한 특정 기관/특정 지점/특정 케이스에 대해서 다룬 것일 뿐임을 미리 밝힙니다. 오해하지 마세요 : )
나는 기본적으로 스스로가 똑똑하다고 생각한다. 특출나게 뛰어난 능력이 있다는 뜻은 아니다. 그저 사리분별 잘 하고 합리적이고 잘못된 유혹에 쉽게 빠지지 않고 어이없이 손해보는 일은 하지 않을 정도? 늘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있기 때문에 신중하지는 않지만 냉정하게 판단할 줄 안다고 생각한다. 이건 순전히 내 생각이고 오르락 내리락하는 텐션과 허당끼 있는 행동때문인지 남들이 보는 시선은 조금 다르지만, 내 속은 내가 더 잘 알테니까 나는 일단 냉철한 사람인 걸로 치자.
이렇게 기본적으로 똑똑하고 냉정한 나는 지난 겨울 3번의 사기를 당했다. 물론 법적인 사기는 아니다. 멍청하게 혼자 속아넘어간 심리적인 사기사건들. 말하기에도 너무 사소한 아주 자잘한 사건들이다.
그 중 첫번째는 지난편에 이어서 이야기 할 학습지 교사 취직 사건의 결말이다.
< 희망에 부풀었던 새내기 학습지 교사의 말로(末路) >
훌륭한(?) 학습지 교사가 되겠다고 오랜만에 순수한 열정을 불태우던 나는 본격적으로 학생을 전담받아 수업을 시작하게 되자 돌변하게 된다. 이전 회사에서 한창 일할 무렵의 내 모습으로. 그 무렵 나에게 일은 당연히 잘해야 하는 것이었고, 프로세스는 합리적이어야 하는 것이었다. 부당한 것은 잘 참지 못했으며, 상황에 따라 말이 바뀌는 사람을 제일 싫어했다. '나는 해맑은 신입'이라는 생각으로 웃어넘겨 보려해도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일들이 계속해서 발생했다.
속았다1. 너무 멀잖아!
분명히 확인했었다. 내가 수업하게 될 지역이 어디냐고.
- 내부적으로 조율이 필요한 부분이라 아직 정해지지 않았어요.
안해도 그만 이라는 생각이 있었던 나는 처음부터 아주 솔직하게 말했다.
- 저는 너무 멀면 비효율적이라 싫어서요.
센터장은 너무 직설적인 나의 화법에 당황한 듯했지만 곧 물흐르듯 자연스럽게 답변했다.
- 아. 당연히 집과 최대한 가까운 곳으로 배정해 드릴거예요. 센터차원에서도 그 편이 효율적이니까요. 걱정하지 마세요.
믿었다. 안심했다. 하지만 내가 배정받은 지역은 내가 사는 곳과 거의 반대편인 동네였다. 우리 동네에도 아파트 단지는 수두룩빽빽인데 굳이 한시간씩 운전을 해서 이동하여 수업을 해야한다니. 따지지 않았냐고? 물론 항의했다. 결과는 나의 참패였다. 내가 입사한 지점의 담당구역자체가 우리 동네와 멀었던 것이다. 그 구역내에서는 더 가깝다고 해봐야 어차피 멀었기에 겸허히 받아들이기로 했다.
왜 전에 물어봤을 때 담당구역 중 가까운 곳은 없다고 이야기하지 않았냐고 따져묻지는 않았다. 이유야 뻔하다. 학습지 교사 업의 특성상 인력이 쉽게 빠지고, 신규 채용은 쉽지 않다. 채용까지는 쉽더라도 그 신입을 업무에 투입하기까지는 시간이 걸릴 수 밖에 없다. 인력난에 시달리던 센터장의 전략이었다고 생각한다. 가까운 지역에 채용할 만한 후보가 없으니 먼 지역까지 탐색한 것이다. 센터장의 말을 잘 살펴보면 거짓말은 아니다. 최대한 가까워봐야 멀다는 사실을 언급하지 않았을 뿐. 그리고 내가 원하면 가까운 지역을 담당하는 센터로 변경해서 근무할 수도 있다는 사실 또한 언급하지 않았을 뿐.(이건 시간이 더 흐른 후 알게 된 사실이다)
속았다2. 무너진 투잡의 꿈
분명히 확인했었다. 시간표를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냐고. 나에게 이 직업은 내 계획에 있는 몇가지 직업중 하나일 뿐이고, 그래서 일주일에 3일 월,수,금만 수업스케쥴을 잡을 것이며, 나머지 날에는 다른 일을 할 계획이라고.
- 충분히 가능해요. 시간표를 100% 만족스럽게 구성할 수는 없지만 어머님들한테 이야기하면 대부분 다 조율해주세요. 잘 안되면 센터 차원에서도 조율을 해 드리니 그 부분은 걱정하지 마세요. 미안해하지 말고 시간표는 선생님 마음대로 하셔도 돼요. 투잡으로 하기에 정말 좋은 일이죠.
정말 믿음직스러운 답변이었다. 하지만 나의 시간표는 월, 화, 수, 목. 하물며 중간에 비는 시간도 많고, 동선도 효율적이지 않았다. 화요일에는 수업이 두개 밖에 없어서 고작 한시간 수업을 위해서 왕복 두시간을 이동해야 했다. 그 수업 두개라도 다른 요일로 변경하려고 시도해 봤지만 전혀 조율이 되지 않았다. 주 4일, 그것도 원하지 않는 요일까지 시간을 다 빼앗기는데 정작 수업진행하는 시간은 많지가 않아서 급여도 얼마 되지 않았고, 중간에 비는 시간이 많아 시간 활용도 효율적으로 할 수가 없었다. 이건 따지지 않았냐고? 정식으로 항의하지는 않았다. 항의해도 해결을 못해주는 영역이라는 것을 눈치챘으니까. 알고보니 센터장은 학부모에게 전혀 의견을 내지 못하는 타입이었다. 항의는 소용없을테니 감정해소를 위해 불만이라도 표출해야겠어서 투덜거려 보았다.
- 거의 다 조율된다더니 제 경우만 유난히 조율이 하나도 안되는 느낌이네요.
예의바르게, 그렇지만 일부러 가시를 담아 말했다. 그런 가시쯤은 아프지도 않다는 듯이 센터장이 답했다.
- 그러게요. 그런데 원래 회사일이라는게 다 그런거잖아요? 다 내 마음 같을수는 없죠.
세상에. 이렇게 성의없는 답변이라니. '일단 수업을 넘겼으니 이제는 니가 알아서 해라. 내 알 바 아니다.' 라는 느낌.(나는 센터장이 담당하던 수업들을 이관받았다) 전에 말했던 센터 차원의 조율이라는 것은 대체 어디있는 것인가. 결국 순진하게 다 믿은 내 잘못이다. 내가 왜 믿었을까. 믿고 싶으니 믿었겠지.
속았다3. 소박해도 너무 소박해서
분명히 확인했었다. 급여가 많지 않은 것은 알지만 어느정도 수준인지를. 노동량 대비 급여 수준이 어느정도인지는 대충 파악하고 할지말지 결정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대놓고 돈을 밝히고 돈이야기를 스스럼 없이 하는 사람이라 입사 전부터 집요하게 물어봤던 부분이다. 이렇게 대놓고 물어보는 사람이 거의 없었던지 답변을 흐리는 경우가 많았지만 종합해보면 다음과 같았다.
- 잘 버는 사람은 300~400도 벌어요. 널럴하게 수업해서는 달성할 수 없지만 일반 직장인들처럼 주5일 일일 8시간을 꽉채워서 수업하면 충분히 가능하죠. 과목마다 금액 편차가 있어 정확하지는 않고요.
하지만 내부에 들어와서 관찰한 결과 그럴 수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수입 구조 자체를 정확히 밝힐 수는 없지만 수업료 중 회사 자체에서 가져가는 비중이 너무 크고, 휴회 회원 발생시 페널티가 담당교사에게 주어지기 때문이다. 거기에 이동시간, 수업 사이사이 비는 시간, 교육 준비 시간 등에 대해서는 전혀 보상이 없었고, 주 3일 있는 오전 회의시간이나 본사에서 진행하는 교육에 참석하는 시간 등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무상으로 빼앗기는 시간들이 너무 많았다. 이건 노동력 착취 수준인데? 이쪽 업계에서는 당연하다고 여겨질지 모르겠지만 다른 세계에서 온 나의 눈에는 부당함 천지였다. 효율성을 따져보면 최저시급에도 못미친다는 결론이 나왔다. 초임 교사라 그런거고 시간이 지날수록 수업수가 많아지고 각종 수당이 붙으면 급여가 높아진다는 말은 설득력이 없었다. 아마 주5일 일일 8시간씩을 할애하여 벌 수 있는 돈은 앞서 말했던 금액의 절반도 안될 것이다.
그래. 다 좋다고 치기로 했다. 최저시급 받고 단순작업 알바를 하는 것보다는 역량 향상 측면에서는 좋을 수 있으니까. 돈을 번다기 보다는 배운다고 생각하고 몇개월만 해보자고 다짐했다. 교재 분석을 계속했고 해설집의 부족한 내용에 대해 물어봤고, 센터에 구비되어 있지 않은 커리큘럼 설명자료/홍보자료 등을 센터장에게 요청했다.
열심히 하면 할수록 실망감이 커졌다. 물어봐서 배울 수 있는 것은 없었다. 해설집에 없는 내용은 아무도 몰랐다. 요청했던 자료들 중 본사에서 받을 수 있는 것은 거의 없었다. 너무 황당했다. 그렇게 영업활동/홍보활동/고객유치를 강조하면서 좋은 결과를 이끌어내는데 필요한 자료들은 갖추고 있지 않다니. 무엇을 근거로 학부모와 학생의 마음을 잡을 수 있을까? 회사내에 없는 커리큘럼은 시중 교재를 구입하여 교육을 진행하는 식이었다. 기업 브랜드를 내세워서 고객을 모으지만 사실 이 브랜드와는 전혀 관련없는 교육을 하는 것이다. 이런 체계없는 진행방식에 놀랐다. 어떻게든 수업수를 채워서 센터목표치를 달성하기만 하면 된다는 식이었다. 고객의 만족도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어 보였다. 그러니 휴회가 자주 발생하지.
개선을 위해서 직언을 몇차례 해보기도 했지만 이제 시작하는 신입 교사가 뭘 안다고 저러나, 저러다 말겠지 싶은 반응만 돌아왔고 내 속만 끓어오를 뿐이었다. 어느날 문득 '내 아이가 있다면 절대로 학습지는 시키지 말아야겠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정말로 그만두고 싶어졌다. 내가 별로라고 생각하는 것을 좋아보이게 포장해서 남에게 파는 것은 스트레스다.
사람 성격 잘 안바뀐다더니 여전했다. 걷어붙이고 투철하게 변화를 주도할 만큼의 열정은 없고, 그러려니 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넘어갈만큼 무던하지도 못하다. 적당한 투쟁으로 적당히 합리적인 결과를 원하는 나에게 어쩌면 조직이란 늘 스트레스일지도.
어떻게 하면 잘 도망칠지 고민에 휩싸였다. 피해를 주고 싶지는 않았다. 내가 맡은 아이들한테도 미안했다. 교사가 자주 바뀌는게 좋지는 않다던데. 하지만 착한 척 해봐야 달라지는 건 없다. 그만둘 거라면 빠르게 그만두는 편이 피해를 적게 주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성격같아서는 솔직한 이유를 다 말하고 나오고 싶었지만 그건 서로에게 상처만 될 뿐이겠지. 본인의 위치에서 조직을 이어나가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센터장에게도, 독한 말을 하는 나에게도, 그 직업군에 종사하고 있는 동료교사들에게도. 선의의 거짓말 같은건 별로지만 거짓말을 했다. 고향에 내려가봐야 하는 사정이 생겼다고. 이럴 땐 부모님을 파는 것이 제일 효율적이다. 웬만해선 잡을 수가 없으니까. 나는 아빠를 살짝 팔았고 겉보기에는 아주 자연스럽고 서로 마음 상하지 않게 그만 두는데에 성공했다. 속으로 무슨 생각들을 했는지는 알 길이 없다.
말 나온 김에 사과를 좀 해본다.
(아버지께) 아빠, 팔아서 미안!
(동료 모선생님께) 제가 갑자기 선수치는 바람에 그만둘 타이밍 밀려버리게 해서 미안해요!
(귀여운 담당 학생들에게) 오래오래 같이 할 것처럼 해놓고 인사도 못하고 그만둬서 미안해.
(센터장님께) 자꾸 톡톡 쏘아대고 피곤하게 굴어서 죄송했어요.
아무도 속이지는 않았다. 편의에 맞게 좋은 점만 최대치로 말하거나 불리한 점을 말하지 않았을 뿐. 제대로 알아보지 않았고 멋대로 희망적으로 생각한건 나였으니 만족스럽지 못한 결과는 전부 내 탓이다. 하지만 속은 기분이 들어서 억울한 것도 사실이니까 내가 '속았다'라고 표현하는 것이 과하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처음부터 솔직하게 말해줬으면 시작하지 않았을 것이다. 퇴사 후 나의 시간은 금이었고, 아주 잠깐의 학습지 교사 경험은 금과 바꾸기에 썩 값진 경험은 아니었다. 당연히 어떤 경험이든 배울 점은 있지만 경험에도 기회비용이라는 것이 존재하니까.
나의 상황자체가 별로였을 뿐 학습지 교사 직군 전체나 방문학습교육 계열의 기관들 전부를 별로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조직이든 어떻게 운영하는가에 따라 좋은 결과를 낼 수 있고, 그 안에서 열심히 하는 사람과 의미를 발견해나가는 사람과 시스템을 효율적으로 활용하며 만족하는 사람들이 있다. 조직이 조금씩 더 바람직한 방향으로 운영된다면 다들 조금 더 행복해질 수 있을 텐데.
이렇게 경험만 하나 더 쌓고 나는 다시 100프로 백수 상태로 돌아갔다. 생각보다 더 홀가분했고, 예상보다 훨씬 더 해방감이 느껴졌다. 그리고 교훈을 얻었다. 돈벌이가 되더라도 그다지 하고 싶지 않은 일에 말려들지 말아야지. 당장 돈 안벌어도 되니까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나의 길을 찾는 데에 집중하자.
하지만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법.
월급에 집착하는 관성을 끊을 수 없어 자꾸자꾸 속게 된다.
* 다양한 직군과 다양한 직업의 세계를 존중하며, 각각의 가치를 충실히 실현하는 사람들을 존경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