쫄보의 '생계 안전장치' 탐색전

쫄보 퇴사러 이야기, 이렇게 형편없는 방황이라니 - 4편

by 최작가






본격적인 방황이 시작되었다.


세무사 플랜은 날려버리고, 우울의 동굴을 탈출하여 마침내 평온을 찾긴 했으나 먹고 살아야 하기에 마냥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마음의 평온을 즐기며 유유자적한 시간을 보내던 어느 날 다시 생계에 대한 생각이 피어올랐다.


- 그래. 이제 건강이 회복되었으니 먹고사니즘을 해결해야지. 뭐할래?


오랜만에 나와의 대화를 시도했지만 답이 없었다. 완전무결한 백지상태. 물결의 흐름조차 느껴지지 않는 망망대해에 떠있는 느낌. 도대체 어디에서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세무사 플랜처럼 망하지 않으려면 일단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에서부터 시작을 해야하는데, 하고 싶은게 전혀 없지는 않았지만 막연하게 창업을 하고 싶다는 생각만 있었지 시작하기 위한 행위를 구체화하지 못했고, 망하면 어쩌나하는 두려움도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에 하고 싶은게 없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렇게 바보같은 상태였으니 답을 할 수가 없는 것이 당연했다.


하릴없이 유튜브에서 다양한 방법으로 돈 번 사람들의 이야기를 찾아보고, 읽고 싶은 책을 읽으며 지내던 어느 날 소상공인지원센터에서 문자가 왔다.(전년도에 '온라인마케팅 교육'을 들은 적이 있어서 온 것 같다) '플로리스트 기본과정' 교육을 5일동안 진행하니 관심있는 사람들은 지원하라는 내용이었다. 10만원에 5일 과정을 들을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플라워 클래스는 단가가 좀 있는 편이다. 예전에 꽃다발제작 원데이 클래스를 5만원에 들은 적이 있었는데 기분이 저절로 좋아졌던 기억이 있었기에 꼭 신청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회복중인 기분을 완전히 끌어올릴 수 있는 계기가 될지도 몰랐다. 혹시 아나. 내가 플라워디자인에 엄청난 소질을 보일지.


늘 이런식이다. 뭔가 새로운 것을 배울때 기대감에 한껏 부푼다. 내가 엄청난 소질을 발견하여 그 길로 꽤나 잘되는 즐거운 상상을 펼친다. 아직도 이렇게 방황중이라는 건 그렇게 엄청났던 적이 한 번도 없었다는 뜻이지만, 지치지도 않고 기대에 부푸는 내 모습에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만다. 누가 말려, 정말.


5일간의 플라워 클래스는 꽤나 재미있었다. 스스로 꽃을 그다지 좋아하는 편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꽃이 주는 치유의 느낌을 제대로 느끼게 되어서 더 제대로 배워보고 싶었다. 정상범위로 돌아왔지만 전보다는 못하다고 느껴지던 마음상태가 플라워 클래스를 들으면서 한층 더 생기있어졌기 때문이다.


쓸데없이 벼락같은 깨달음이 왔다. 나는 백수가 체질이구나. 평온한 생활을 하면서 배우고 싶은 것을 발견하면 배워보고 즐거워하는 나날들이 너무 좋았다. 애초에 사회적 인정욕구가 별로 강하지 않은 나같은 유형은 돈만 있으면 지위는 없어도 될 것 같았다. 어디가서 백수라고 말하는 것이 아무렇지 않으니까. 돈을 못벌어서 먹고 살기 힘들까봐가 문제지, 백수라고 사람들이 혹여 안좋은 시선으로 볼까봐는 전혀 문제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 일이든 아무거나 시작해서 돈을 벌면서 하고 싶은 일도 천천히 찾으면 되는 것이 아닐까? 하고 싶은 일을 찾아서 돈을 벌려고 하니 자꾸 마음이 조급해지는 거잖아. 안전장치로 돈을 벌 수 있는 일을 아무거나 찾자!


이게 무슨 엉뚱하고 비합리적인 소리인가 싶을 수 있다. 이럴거면 퇴사를 하지 말고 회사를 다니면서 하고 싶은 일을 찾았으면 됐잖아! 좋은 회사라며! 라고 비난하는 목소리가 사방에서 들리는 것 같다. 너무도 타당한 비난이다. 변명해보자면 전에 다녔던 회사는 다니는 것만으로도 에너지를 다 써버려서 하고 싶은 일을 찾을 수가 없었다. 에너지를 많이 안쓰고 돈을 벌 수 있는 일을 찾고 싶은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또 누군가는 비난할 수 있다. 본인이 다녔던 회사만 힘든 회사인 줄 아나, 일이 다 힘들지! 알고 있다. 그저 전보다 조금이라도 덜 괴롭기만 하면 된다. 아니면 아주 새로운 일이라서 스트레스의 종류가 달라지면 또 한동안은 극복해가며 잘 지낼 수 있지 않을까? 나는 나의 기준이 소박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그 소박한 기준에 맞는 일자리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일단 어떤 일을 하든 돈을 벌고 나면 기분이 훨씬 나아질 것 같았다. 이전 회사에서 퇴사한 이후로 여태 돈을 벌지 못했으니, 나는 이제 돈을 벌 방법이 영 없을 것 같다는 말도 안되는 생각에 때때로 잠식당하곤 했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말해보자면 나는 '단순사무직'이 하고 싶었다. 단순한 파일 정리, 엑셀 정리, 복사 이런 것들. 흔히 '사무보조'라고 표현하는 직군에서 월급은 적어도 단순하게 일하고, 퇴근 후에 나의 꿈을 위한 일을 하면 생계 걱정없이 마음 편하게 꿈을 이룰 수 있게 될 것이라는 희망에 부풀었다. 그 날 부터 '벼룩시장' '사람인' '잡코리아' 등 구인 사이트에서 단순사무업무 및 그와 비슷한 업무들을 열심히 찾아보았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는데 믿고 싶지 않았던 현실과 마주해야 했다. 내가 가고 싶은 단순해 보이는 업무를 하는 자리들은 대부분 낮은 연령대를 필요로 했다. 하긴. 누구를 데려다가 시켜도 할 수 있는 일인데 굳이 사회경험 많아서 자기 생각/자기 고집/자기 스타일이 강할 것이 뻔하며 일을 시키기에도 대하기에도 불편할 수 있는 나이 많은 사람을 쓸 필요는 없겠지. 나도 사회초년생 같은 마음으로 밝고 해맑게 잘 할 자신 있는데.


공개이력서를 올려봐야 연락이 오는 곳은 내가 버린 경력/전공을 다시 주워서 가야하는 분야이거나 대기업 인맥을 탐내는 영업 분야었다. 전공만 아니면 된다더니 영업은 왜 싫으냐고? 영업이 체질에 맞지 않는다는 사실은 잠시 묻어두더라도, 이런 직군은 특성상 기본급이 없다. 철저한 성과주의라 영업을 잘 못해서 거래를 성사시키지 못하면 돈을 벌 수 없다. 간혹 기본급이 있는 경우도 있는데 그런 곳에서도 몇달 동안 성과를 내지 못하면 결과야 뻔하다. 스트레스만 받다가 다시 방황하는 백수가 되겠지. 아, 일하고 싶다. 차라리 아르바이트를 찾아볼까? 라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핸드폰이 울렸다. 모르는 핸드폰 번호였다.


- 네. ( 나는 전화를 이렇게 받는다. )


- 안녕하세요? 이력서 보고 연락드렸습니다. 여기는 OOO인데요, 아이들 영어/중국어를 가르칠 수 있는 선생님을 모집하고 있어요. 이번에 TO가 났는데 이력서 보니 잘 하실 것 같아서 연락드렸습니다. 같이 일하면 좋을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당황스러웠다. 교육/어학쪽 경력과 경험이 전혀 없는데 대체 뭘보고 나한테 연락을 한 것인지 의아했다. 기재된 어학 점수라고는 토익이 겨우 775점 (세무사 준비한다고 급조한 점수), 중국어 TSC 5급(회사다닐때 강제취득)인데? 그래도 내가 흥미를 느끼는 어학 분야였기에 관심이 갔다.


- 저는 경험이 전혀 없고 어학 실력도 별로 없는데 솔직히 당황스럽네요. 관심이 가긴 하는데 좀 더 자세히 들어볼 수 있을까요?


상대방은 포지션에 대해 더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학원 같은 교육기관이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방문학습지 교사를 모집하는 것이었다. 방문학습지는 영업 성격이 강하다고 하던데 결국 영업이잖아? 실망스럽긴 했지만 보험이나 부동산 영업이랑은 다르게 '교육자'의 역할도 있긴 있으니 한 번 해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방문학습지 교사는 처우 및 급여가 열악하기로 유명하다. 그런데 사실 해보지 않고는 모르는 것이고 또 하기 나름이지 않을까 싶은 생각에 면접 일정을 잡았다. 나는 또 희망에 부풀었다. 안그래도 어학 공부 좀 하려고 했는데 가르치는 일을 하려면 공부를 많이 해야 할테니 강제공부도 되고 돈도 벌고 새로운 경험도 쌓을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갑자기 학구열도 불타올라 한참동안 쳐다보지도 않던 영어를 미리 공부하기 시작했다.


면접은 형식일 뿐 하겠다고 하면 바로 시작하면 되었다. 본사 교육 5일과 지점 교육 3일을 거쳐 근로 계약을 체결했고 사원증도 받았다. 특별한 기능(근태관리나 출입기능)이 없는 형식적인 사원증이었지만 사원증을 받았다는 사실이 너무 재미있었다. 퇴사하면서 내 평생에 이제 사원증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신입교사라 진행해야 할 수업은 없었지만 교육 프로그램들을 파악하고, 가르치는 방법을 배우고, 업무가 돌아가는 방식에 대해 알아갔다. 지역이랑 시간은 최대한 교사 편의에 맞게 배려해 준다고 하니 교육 스케쥴을 잘 짜면 시간 활용 측면에서 아주 효율적일 것 같았다. 일주일에 3일만 수업을 잡고 나머지 날에는 창업준비나 다른 공부를 하면 완벽하게 균형잡힌 일정이 될 것이다. 우선 돈을 버니 안정적이고, 어학 실력에도 도움되고, 티칭 스킬도 늘리고, 다른 길도 준비하고! 너무 신이 났다.


기본적으로는 스케쥴에 맞게 각자 일을 하는 것이지만 일주일에 3일은 회의가 있었다. 센터장을 중심으로 사무실에서 오전회의를 했다. 회의가 끝나면 기존 교사들은 각자 수업을 위해 흩어졌다. 나는 신입이라 퇴근해도 되지만 사무실에 몇시간동안 남아 교재파악도 하고 영어공부도 했다. 신입이지만 열심히 준비해서 베테랑같이 시작하려는 의욕에 불타올랐다. 혹시 아나. 내가 교육에 엄청난 재능을 보일지. 멋있고 돈도 많이 버는 학습지 교사가 되어서 '방문학습지 교사'라는 직업에 대한 인식을 뒤집어 놓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희망이 끝도 없이 부풀어올랐다.


그렇지만 나의 ''과 '희망'은 그렇게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아. 속았구나.' 라는 생각이 짙어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