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아, 내가 구해줄게.

쫄보 퇴사러 이야기, 이렇게 형편없는 방황이라니 - 3편

by 최작가




영원히 계속될 것 같은 고통의 시간.

탈출해야 한다.

어떻게?


구해달라고 소리쳐봐야 나를 구할 사람은 나밖에 없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방법을 모르겠어서 소리쳐본 것뿐이다. 생각만으로는 아무것도 되지 않기에 아무거나 해보기로 했다.


우선 앞날을 위해서 하려고 하던, 해야 한다고 생각하던 모든 것들을 멈췄다. 진로 찾기를 멈췄고, 돈 벌 궁리를 멈췄고, 앞으로 뭘 할지는 모르지만 무슨 지식이든 채워놓자는 생각으로 책이라도 읽어보려던 행위를 멈췄다.


- 내가 없어지면, 앞날을 준비해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 우선 나를 살려야 한다.


나에게 온전한 시간을 선물하기로 했다. 스스로에게 말해줬다.


- 지금부터 너의 마음을 즐겁게 할 수 있는 것들만 할 거야. 다른 건 생각 안 해도 돼. 괜찮아.


생각이라는 것이 마음먹는다고 딱 멈춰지는 것은 아니지만 의식적으로 노력하다 보면 되겠지 싶었다. 우선 하기 싫은 일은 아무것도 안 할 거니까. 좋아하는 것들만 하다 보면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기력이 없으니 하고 싶은 것도 별로 없었다. 잠을 많이 잤고, 햇빛을 쬐러 나갔고, 집 근처를 걸어 다녔다. 한동안 이 3가지만 했다. 하고 싶은대로 두면서 푹 쉬게해주면 나아질 거라고 생각했는데 생각처럼 잘 되지 않았다. 불안한 생각의 고리를 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괜찮아,괜찮아' 를 하루에 수십번씩 스스로에게 말해줬지만 불안의 고리는 끊임없이 뱅글뱅글 돌았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건 더 악화되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이지 더 나아질 수 있는 방법은 아닌 것 같다는 느낌이 왔다. 누군가의 조언이, 경험자의 경험담이 절실히 필요했는데 이런 류의 상담을 해 줄 사람이 내 주변에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새삼 알게되었다. 아, 나는 이럴 때 의지할 사람도 없구나. 나답지 않은 자조적인 말을 뱉었다. 마음이 약한 상태라 정말 서러운 마음이 들었다.


- 나는 직장도 없고, 사람도 없고, 돈도 곧 없어질 불쌍한 사람이다.


자기 연민의 늪에 한없이 가라앉으려는 나를 알아차리고 마음을 다시 잡았다.


- 아냐, 이거 아니야. 정신을 차려보자. 주변에 조언을 구할 사람은 없지만, 요즘은 참 좋은 시대잖아? 유튜브에 다양한 사람들이 많으니까 나에게 해당되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도 있을 거야. 유튜브를 보자.


나는 많이 아날로그적인 사람이라 그 전에는 유튜브를 거의 본 적이 없었다. 디지털 영상 매체와 별로 친하지 않다. 그 흔한 TV도 잘 안 보는 편이니까. 그런데 이 날부터는 밥먹는 시간, 잠자는 시간, 걸어다니는 시간을 제외하고 계속 유튜브를 보기 시작했다. 우울증, 불안장애 같은 증상들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관련 영상을 보고, 우울증 극복 경험담, 우울증을 겪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 정신과 의사들의 이야기 등을 정신없이 시청했다. 증상에 대한 이해도는 높아졌는데, 해결 방법은 여전히 모르겠다. 공통적으로 이야기하는 것들 중 당장 실행할 수 있는 것들만 추리면 다음과 같았다.


1. 운동을 해라.

2. 햇빛을 쬐라.

3. 마그네슘을 먹어라.


이미 다 하고 있는 것들이었다. 사실 운동은 하고 있지 않았지만 집 근처를 어슬렁거리는 일을 운동 카테고리에 억지로 욱여넣는다면 그랬다. 결국 병원에 가서 약을 먹어봐야 하는 걸까. 정신과에 대한 편견은 없었지만 가고 싶지 않았다. 병원에 가면 정말 환자가 되어버릴 것 같은 느낌이었다. 스스로 극복하고 싶은 마음. 이 마음을 들어주고 싶었다. 극복해서 칭찬해주고 싶었다.


그래서 소소한 몇 가지 시도를 엄청나게 힘들게 시작했다.



시도1. 명상


유튜브에서 정신과와 마음건강에 관한 영상을 계속해서 찾아보던 중 어떤 채널을 하나 발견했는데 갑자기 솔깃했다. 명상&마음건강에 관한 채널이었다. 명상에 관한 이야기는 그 전에도 들어본 적이 있다. 성공한 사람들 중 명상하는 습관이 있는 사람들이 많다는 이야기, 마음건강에 좋다는 이야기, 더 풍요로운 삶을 살게 해준다는 이야기 등등. 명상? 그냥 가만히 앉아서 생각하는 거 아닌가? 굳이 시간내서 할 필요가 있나? 저러고 앉아있으면 잠들기 십상이겠는데? 명상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은 전혀 해본 적 없었다. 오히려 명상의 효용에 관해 의구심만 가득한 명상회의론자에 가까웠다. 그런데 갑자기 솔깃했던 건 지푸라기라도 잡아보자는 심정이었을 것이다.


- 혹시 이게 나를 살려줄지도 몰라. 해보자.


명상가이드에 따라 앉아서 호흡을 하고, 잡념을 비운다. 아니, 잡념을 비운다고 생각한다. 처음에는 당연히 잘 되지 않았다. 명상가이드는 허공에 떠돌 뿐이고, 나는 여전히 불안과 자기 연민에 사로잡힌 불쌍한 사람일 뿐이었다. 잘 안되지만 계속했다. 하루종일 연속적으로 한 것은 아니고 매일매일 아침저녁으로 시도했다. 공복에 하는 것이 집중이 잘 된다고 해서 꼭 지켜가면서 했다. 억지로 며칠째 명상 아닌 명상을 하고 있을 때 놀라운 일이 생겼다. 내가 꾸벅, 하고 졸아버린 것이다. 그러고 나서 잠이 쏟아졌다. 24시간 내내 불안에 시달려서 잠에 잘 못들던 시기였다. 한참이나 누워있어야 겨우 잠들 수 있던 시기였다. 그런데 잠이 쏟아지다니. 빙하가 녹아내리듯 쏟아지는 잠에 불안이 녹아버렸다.


심장이 조여오는 기이한 증상을 처음 경험했던 그 날 이후, 처음으로 편안하게 잠을 푹 잤다. 예전처럼. 그러고 일어났더니 전날보다 생기가 한스푼 정도는 더 생긴 것 같이 느껴졌다. 이 일을 계기로 명상회의론자였던 나는 명상중독자로 돌변했다. 정체모를 불안은 여전했지만 명상을 통해 잠시나마 불안의 고리를 끊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아침저녁으로 하던 명상을 불안이 심해질 때마다 했다. 원래 명상은 혼자 수시로 하면 된다고 하지만, 나는 가이드가 있어야 집중할 수 있는 명상 초보라 어디든 이어폰을 가지고 다녔다. 불안해지면 이어폰을 끼고 유튜브를 틀고 가이드에 따라 명상을 했다. 이렇게 조금씩 불안이 멈추는 시간을 늘려나갔다. 나중에는 명상을 하지 않고 있을 때에도 불안하지 않은 너무도 감사한 시간이 조금씩 생기기 시작했다.



시도2. 요가


쓰러지기 직전이었던 몸 상태는 명상을 하면서 많이 회복되었다. 잠을 잘 자니 컨디션이 급격히 좋아졌고, 불안이 가끔씩 멈추니 식욕도 돌아왔다. 그래도 아직 불안과 우울의 뭉치들이 나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이 뭉텅이들을 좀 더 적극적으로 몰아내야겠다고 생각했다. 몸을 많이 움직이는 것이 좋다고 하니 꾸준히 실행할 수 있도록 계획을 세웠다. 하루에 한 번씩 30분 동안 요가하기. 나는 격렬한 운동은 잘 못하는 체질이고 운동 체력이 약한 편이라 무리한 활동 계획을 세우면 지키지 못할 것이 뻔했다. 나에게 맞는 최적의 계획이었다.


첫날엔 강력한 저항이 있었다. 집 한 구석에 방치되어 있던 요가 매트를 꺼내어 거실에 깔았지만 너무 하기 싫어서 그 위에 한참 앉아있었다. 아무리 앉아있어도 움직이고 싶어지지 않았다. 또 어르고 달랠 시간이다.


- 봐봐, 처음엔 명상도 죽어라 하기 싫더니, 지금은 자연스럽게 하잖아? 요가도 그럴거야. 지금은 너무너무 움직이기 싫지만 온 힘을 다해 팔다리를 한 번만 움직여보자. 우선 동작 하나만 해보자.


이렇게 하기 싫을 땐 어떤 동작을 어떤 순서로 할지 생각하는 것도 스트레스다. 최대한 단순하게 하려면 전년도 여름에 아쉬탕가 요가원에서 배웠던 '수리야 나마스카라'가 제일 적합하다고 생각했다. 수리야 나마스카라는 몇가지 동작을 물 흐르듯 반복하는 것으로 순서가 몸에 익은 상태에서는 아무 생각없이도 할 수 있다. 몸을 끊임없이 움직이기에 운동효과도 상당하다. 한번만 더하자, 한번만 더하자는 생각으로 5톤은 되는 것 같은 몸을 움직이며 30분을 겨우 채워냈다. 다음날부터는 반복이었다. 내일 하루만 더하자, 내일 하루만 더하자. 이렇게 일주일이 지나자 놀랍게도 움직이는 일이 많이 괴롭지가 않았다. 몸이 가벼워지고 있는 느낌이었다. 어느새 불안이 멈추는 시간도 많이 길어졌다.



시도3. 걷기


명상과 요가로 일상생활이 정상적이 되자 더 욕심이 났다. 더 건강해지자. 예전처럼 회복하자. 걷기가 좋다고 하니 좀 멀리까지 걸어나가 보기로 했다. 집에 있기 불안해서 집 밖에 빼꼼 나가서 몇걸음 걷다 들어오던 것 말고, 훨씬 더 멀리 한시간 정도 코스로 매일 걷기 시작했다.




명상, 요가, 걷기를 매일 반복하기를 얼마나 했을 때였는지는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는다. 아직 여름이었고, 햇살이 좋았고, 어김없이 걷고 있었다. 그런데 마음에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살랑. 기분좋은 느낌의 바람. 얼마만에 느껴보는 느낌인지. 너무 감사했다. 정말 너무 감사했다. 다시는 못 느낄 줄 알았던 내 소중한 감정. 불안할 때마다 '괜찮아'를 반복하면서도 정말로 괜찮아질 수 있다고 믿어지지는 않았었다. 그런데 진짜 괜찮았다. 이 살랑이는 기분좋은 감정 한 조각으로 내가 정말로 괜찮아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느꼈고, 기대감이 생겼고, 희망에 부풀었다. 불안과 우울이 아직 진하게 있지만 이제는 점점 좋아질 수 있을테니까.






뭔가 특별한 비법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했다면 실망스러울 수 있다. 죽을 것 같았던 사람이 '명상, 요가, 걷기' 만으로 괜찮아졌다니. 정확히 말하면 괜찮아진 것은 아니고, 괜찮아질 수 있는 실마리를 얻은 것뿐이다. 당연히 그 뒤로도 노력이 많이 필요했다. 하지만 실마리를 얻기 전까지는 노력조차 할 수 없는 상태였으니, 아주 중요한 실마리다. 살면서 그렇게 진심으로 감사해 본 적은 처음이었다. 아, 이제는 살았구나. 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대상이 없는 감사인사. 누구에게인지는 모르지만 너무 고마웠다.



사실 중요한 요소가 조금 더 있긴 하다.


명상, 요가, 걷기가 효과를 발휘하기까지 내가 놓지 않았던 스스로에 대한 애정과 믿음. 이 일을 계기로 확실하게 알게되었다. 스스로를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 마음이 충만한 나는 얼마나 강한 사람인지. 나는 잘하는 건 별로 없고 못하는게 많다. 약점은 많은데 강점은 별로 없다. 그래도 늘 괜찮았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고 진심으로 괜찮았는데 왜 그런건지는 잘 몰랐었다. 알고보니 스스로를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 내 중심을 단단하게 잡아주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하나 더, 나만 생각하기. 하려던 일을 모두 멈추고 나를 돌보는 일에만 집중하려니 알 수 없는 죄책감이 들었었다.


- 내가 이렇게 시간만 보내고 있으면 안되지 않나.

- 부모님이 계속 걱정하실 텐데 빨리 뭔가를 보여드려야지.

- 주변에 믿어주는 사람들의 기대치를 빨리 채워줘야 되지 않을까.


'나부터 행복한 건 이기주의가 아니다.'라는 말이 있다. 사람들은 스스로 이기주의자가 되는 것을 못견뎌서 자기의 행복을 긁어서 남들에게 나눠주려 한다. 없는 행복을 긁어봐야 나도 아프고 남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거 얼마나 된다고. 하지만 나 먼저 행복으로 가득해지면 주변에도 한덩이씩 뚝뚝 떼어서 나눠줄 수 있다. 물론 이 말은 남들이야 어찌되든 밟고 일어나서 나만 살려는 진짜 이기주의자들에게 하는 말은 아니다. 남들보다 나를 먼저 챙기면 이기주의자가 되는 것 같은 이상한 느낌에 빠지는 착한 사람들에게 하고싶은 말이다.


이런 착한 사람들에게 삶이 퍽퍽하다고 느껴진다면, 살아가기 버거워서 괴롭다면, 일단 나만 생각하자고 말해주고 싶다. 나만 생각하기에도 버거운데 주변까지 다 생각하니 병이 나는 것은 아닐까? 스스로 이기주의자가 되는 것 같은 치사한 느낌이 싫으면 주문을 외우자. 내가 살아야 다 살릴 수 있다. 나부터 행복한 건 이기주의가 아니다.


나는 이 말이 너무 도움이 됐다. 죄책감을 떨쳐버리고 나에게 온전히 집중했고, 나만 돌보려했고, 나를 어르고 달래고 기분좋게 해주려고 노력해서 괜찮아 질 수 있었다.



이건 탈출했으니 할 수 있는 말이지만, 어둡고 괴로웠던 고통의 시간도 의미는 있었다. 겪지 않았다면 몰랐을 커다란 깨달음, 가치, 의미, 이해의 마음. 나의 영역이 한뼘쯤은 넓어진 느낌.


아, 물론 선택하라면 망설이지 않고 겪지 않는 길을 선택할 것이다. 깨닫지 않아도 괜찮으니까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을 정도로 고통스러웠다. 깨달아서 좋다는 건 사실 지나고 난 다음의 합리화일 뿐이다. 어쨌든 지나간 일이니 이렇게 포장해 놓으면 마음이 조금은 더 따뜻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