쫄보 퇴사러 이야기, 이렇게 형편없는 방황이라니 - 1편
퇴사 후 처음으로 진지하게 결정했던 제 1진로는 세무사가 되는 것이었다. '갑자기 웬 세무사?'라는 의문이 드는 것은 당연하다. 여기서 잠시 나의 이력을 요약해본다.
[ 간단 이력서 ]
- 대학교 : OO대학교 전기전자공학 전공
- 사회경력 : OO대기업 11년 근무 (전기전자공학 관련 업무)
- 기타 재능 및 특기 : 없음
- 퇴사 후 포부 : 전공버리기 + 전공보다 적성에 조금이라도 더 맞는 일로 먹고살기.
사실은 퇴사까지 했으니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길, 새로운 길, 자유로운 길을 가고 싶었다. 이렇게 말하니까 거창해 보이는데 나는 아주 소박한 사람이어서 '작은 공방의 주인' 같은 소소하면서 평화로운 이미지의 직업을 추구했다. 손으로 무언가를 만드는 것을 좋아하고, 예쁜 것이라면 사족을 못쓰는 특성으로 보아 내 손으로 예쁜 것을 만들어서 그 일로 먹고 살 수 있다면 소소하지만 평화로워서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월수입'이라는 핵심조건을 생각하면 이 직업을 선뜻 선택하기가 자꾸 망설여졌다.
- 소상공인은 먹고 살기 어렵다, 특히 공방같이 큰 인기를 끌지 못하는 분야는 더 그렇다, 문을 닫는 공방들이 허다하다, 레드오션이라 경쟁률이 치열하다, 지금 진입하기에는 늦었다, 이미 자리잡기 어렵다, 굶어죽기 딱 좋다.
나는 쫄보인데다 이런 말들까지 계속 들으니 마음이 쫄쫄이가 되어 조금 더 현실적인 직업을 찾기 시작했다.
그렇게 결정한 것이 세무사다. 진입장벽이 적당히 높고, 대우도 적당히 좋고, 벌이도 적당히 높은, 전.문.직. 회계 관련 과목이 좀 걸리긴 했지만 법이나 경제학 등과 같은 문과 성향이 짙은 과목들이 많으니 '전공보다 적성에 조금이라도 더 맞는 일로 먹고살기' 라는 조건에도 부합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특기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는 내가 그나마 잘하는 거라고는 시험 잘보기였으니, 현실적인 목표하고 생각했다.
나는 주입식 교육을 받으며 자랐고, 그런 교육들은 최종 목표가 대개는 시험에서 좋은 점수를 받는 것이다. 보통은 객관식 시험이었으며, 그 객관식 시험에서 번호를 써내고 번호를 많이 맞추면 공부를 잘한다고 인정받았다. 엄청난 수재는 아니었지만 상위권을 유지했고, 늘 공부한 시간에 비해 성적이 잘 나왔다. 공부를 진득하게 못하는 체질에 노력파도 아니라서 설렁설렁 놀러 다니는 편에 속했는데, 성적은 잘 나왔으니 특기라면 특기다. 스스로 분석해보자면 확실히 실력은 아니고 '객관식 찍기운 + 요령'이 조합된 결과라고 생각한다.
분명 그날 밤은 정신이 살짝 가출했었을 것이다. 공방주인의 꿈을 접고 '나는 대체 퇴사하고 뭘 해야 하나' 고민하던 그 밤, 갑자기 세무사라는 직업이 떠오른 것이다. 아무 맥락도 없이 뜬금포로 떠올랐다. 전에 되고 싶다고 생각한 적도 없는데다가 친한 지인들 중에 세무사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 직업에 대해 전혀 알지도 못하면서 갑자기 마음의 결정을 내렸다.
- 맞아. 고시 수준으로 어렵지는 않으면서 전문직인 세무사가 있었지! 내가 마음잡고 열심히 하면 충분히 할 수 있을 거야. 세무사가 되자.
돌이켜보면 어이가 없다. 세무사 시험이 언제이고, 세부 과목으로는 무슨 과목들이 있고, 난이도가 어떻고, 시험 합격 후 어떤 과정을 거쳐 수익을 창출할 수 있는지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이런 생각을 했다니. 하지만 이 정신없는 사람은 갑자기 쓸데없을 정도로 폭발적인 행동력을 발동했다. 다음 날 아침 폭풍검색으로 세무사 시험에 대해 알아보고, 유명한 학원을 알아보고, 그 학원들이 종로에 있다기에 종로로 방문 상담을 갔다. 그 중 첫 학원 상담 때 했던 스스로 명언이 있다.
- 올해 동차 합격을 목표로 준비해 보려고 해요.
이 말을 들은 학원 상담원의 황당한 표정이 아직도 생각난다. 그 당시에는 전혀 느끼지 못했지만 지금 생각하면 스스로도 너무 황당해서 나의 그 뻔뻔함에 웃음이 난다. 때는 2019년 1월이었다. 세무사 시험은 4~5월에 1차 시험이 있고, 1차 합격자를 대상으로 8월에 2차 시험이 있다. 고시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공부량이 방대하여 준고시로 불리며 수험 준비기간은 평균 3년이라고들 한다. 학원 수업은 보통 3~4월에 개강하고 그 해가 아닌 그다음 해 시험을 대비하기 위한 커리큘럼으로 짜여있다. 그다음 해에 1,2차를 한꺼번에 붙는 것도 어려워서 1차 먼저 합격하고 1년을 더 준비해서 다시 그다음 해에 2차 합격을 하는 것이 일반적이라고도 한다.(1차 객관식/2차 서술형. 2차 시험은 서술형이라 상당히 어렵다) 그런 곳에 1월에 가서 그 해에 1,2차를 다 합격하겠다고 선언했으니. 그것도 비전공자에 관련성이 전혀 없는 일을 해 오던 사람이.
주변의 반응에도 불구하고 정신이 돌아오기 전까지 나는 진지했다. 1월에는 세무사 시험정보 및 합격 노하우, 세무사 합격 후의 진로정보 등을 모으고, 2월엔 토익 공부를 해서 토익 점수를 만들고 (토익 700점 이상이 되어야 세무사 시험 접수가 가능), 3월부터 본격적으로 세무사 공부를 시작해서 올해 1,2차 합격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게 해도 2차 합격 발표가 11월인데 너무 늦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집체교육 2개월에 수습기간도 6개월 거쳐야 하니 제대로 된 월급을 벌려면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는 느낌이었다. 세무사는 수습기간에 돈을 거의 못 번다. (최저시급 미만) 합격 가능성이 제로라는 사실을 혼자만 모른 채 마음만 급했다.
유명 학원 4군데에 모두 상담을 마치고, 인터넷으로 정보를 한참 찾아본 후에야 겨우 아주 조금 정신이 돌아왔다.
- 올해는 안 되겠다. 내년도 합격을 목표로 해야겠다. 오프라인 강의가 좋긴 하지만 왔다갔다 시간을 너무 잡아먹을 것 같으니까 인강으로 듣자. 나는 합격할 거니까 조금 비싸더라도 100프로 환급반으로 듣자.(정신이 덜 돌아옴)
그렇게 인강을 결제했다.
2월에 벼락치기로 토익시험을 보고 3월부터 세무사 공부를 제대로 시작하려고 도서관에 다녔다. 그런데 정말 그냥 다녔다. 정신이 나가서 간과한 사실이 있다. 나는 공부를 열심히 못하는 사람이다. 재미가 없으면 더더욱. 학교 다닐 때도 수업시간에 자는 걸로 유명했는데, 갑자기 하려니 될 리가 없었다. 1시간 인강 듣고, 1시간 잠을 잤다. 또 1시간 인강을 듣고 1시간 산책을 갔다. 그다음엔 1시간 밥을 먹고, 1시간 인강 듣다 자고, 1시간 커피 마시고, 1시간 인강 듣고, 지쳐서 집에 돌아간다. 이런 식으로 하루에 4시간도 공부를 못했다. '안 하던 걸 하려니까 그런 거야.'라고 두 달 동안 합리화만 시켰다. '점점 나아지겠지.'라고 헛된 희망도 품었다.
결론적으로 전혀 나아지지 않았고, 두 달만에 답이 나왔다. 하기 싫다고. 너무. 너무. 너무. 하기 싫었다. 싫다는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것을 꾹 눌러담고 도서관에 앉아있던 어느 날 내가 이걸 왜 하려고 했는지 별안간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특별히 관심 있거나 흥미를 느꼈던 분야의 공부도 아니었고, 이렇게 방대한 양의 공부는 해본적도 없고 하기도 싫다고 생각해왔었고, 회계나 세법처럼 계산기 두드려야 되는 공부는 더욱 싫었다. 싫다는 생각이 한 번 들기 시작하자 꾸역꾸역 공부해서 합격한다 해도 이렇게 싫은 느낌으로 일을 해야할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전개됐다. 어차피 싫을거면 그냥 다니던 회사다니지 왜 나왔나하는 회의감이 휘몰아쳤다.
이 날 깨달았다. 아, 내가 공부 체질이 아니라서 공부가 그토록 안되던 것이 아니었구나. 내 내면이 소리치고 있었던 거다. 아니라고. 이 길이 아니라고. 억지로 걸어온 길을 바로 잡으려고 퇴사해놓고, 왜 또 억지로 가야하는 길을 가고 있냐고. 가지말라고 가지말라고 그렇게 소리치고 있었던 거다.
손을 놓고 이틀정도 곰곰이 생각하다 인강을 환불했고(50%밖에 못받음), 책들은 중고로 팔려다가 귀찮아서 책장 깊숙이 넣어버렸다. 도서관에 틀어박혀 있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일단 기뻤다. 마음이 상쾌했다. 잘못된 길로 가려던 것을 바로 잡은 것 같아서 기분이 뿌듯했다.
- 그래. 나는 점점 나에게 맞는 길에 가까워지고 있는 중이야. 그 과정이라고 생각하자. 좋은 경험이었잖아?
몇 달을 헛삽질만 한 셈이지만 막 갖다붙이는 아주 유연한 합리화와 대책없는 희망이 있어 괜찮았다.
다음 고비가 오기 전까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