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도 11년 동안이나 한 회사만 다녔다. 대학 졸업 후 취업해서 계속 다녔다. 회사를 다니는 것 말고는 무언가를 해 본 적 없는 사람이다. 여기서 무언가란 경제적인 활동을 말한다. 회사를 다녀서 버는 돈을 제외하고 수익을 창출해 본 적이 없다. 대학 시절에 했던 아르바이트도 성격이 비슷하다. 어딘가에 고용되어서 나의 시간과 노동력을 팔아서 고용주가 주는 돈을 받았다. 어딘가에 소속되어 있지 않으면 돈을 벌 수 없었다. 혼자만의 영역을 꾸며서, 스스로의 능력만으로 돈을 버는 일은 특별한 사람들에게나 허용된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구체적으로 이런 생각을 떠올렸던 기억조차 없다. 나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일이라고 생각해서 깊이 생각해보지도 않았던 것이리라.
그랬던 사람이 갑자기 퇴사했다. 어느 날 갑자기.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숨은 사연이야 길고 길겠지만 표면적으로는 그랬다. 입사했고, 다녔다. 잘 다녔다. 문제를 일으킨 적도, 분란을 일으킨 적도, 큰 실수를 한 적도 없다. 맡은 일은 잘했고, 사람들과도 잘 지냈다. 회사 밖의 다른 일을 기획하거나, 시도해서 기틀을 마련해 놓은 것도 아니었다. 정말 오로지 회사만 다녔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퇴사를 선언했다.
속사정을 좀 아는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다.
- 안은 힘들지만 밖은 추워. 여태 잘 버텼잖아. 조금만 더 있으면서 생각해봐.
- 다른 사람들은 다 살 길을 준비해놓고 나가는 거야. 다들 아닌척해도 그 사람들(앞서 퇴사한 사람들을 말한다) 다 준비해놓고 퇴사했어. 너처럼 그렇게 생짜로 나가는 사람 없어. 뭐라도 준비해서 나가.
- 고민이 깊었던 걸 아니까 잡을 수가 없다. 아쉽긴 한데 응원할게. 잘하는 거라고도 못하는 거라고도 말하기가 어렵네.
애정 어린 말이었고 마음에 힘이 됐다. 다 맞는 말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너무 잘 알고 있기에 여태 버틴 거니까. 그런데 11년 동안이나 다른 길을 준비하지 못했는데, 내가 여기서 조금 더 있는다고 준비할 수 있을까? 그러다가 나이만 더 먹어서 새로 시작할 용기조차 내지 못하고, 회사 안에서 조금씩 조금씩 말라 시들어버리면 어쩌지? 정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무간지옥에 빠지면 어쩌지? 너무 무서웠다.
속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다.
- 나가서 뭐하시려고요? 좋은 거 있으면 좀 알려주세요.
- 어디로 가기로 한 거야? 어떤 조건으로 가기로 한 거야?
- 진짜 부럽다. 에이. 말은 그렇게 해도 다 준비해놓고 나가는 거잖아. 숨기지 말고 공유 좀 해줘. 나도 나가고 싶어.
-...(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기대에 찬 눈으로 바라본다. 뭔가 좋은 길이 있는 줄 알고. 말해달라는 거지. )
정말 신기하게도 남의 속도 모르고 내가 더 좋은 곳으로 가거나, 대단한 시스템을 구축해놓고 퇴사하는 줄 아는 사람들이 많았다. 사실 그렇지 않으면 이 연차에 이 회사를(객관적으로 좋은 회사라고 할 만한 회사였다) 생뚱맞게 퇴사하는 사람이 흔하지는 않으니까. 누가 나가라고 하지도 않았고, 분란을 일으킨 적도 없었으니까. 거기다가 진급도 운 좋게 제때 했었으니 정말 무탈해 보였을 것이다.
그렇게 퇴사했다. 속사정을 아는 사람들의 걱정과 속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으면서.
그 이후의 이야기?
그 이후의 이야기는 많다. 벌써 1년이 넘었으니까. 나는 정확하게 2019년 2월 말일자로 퇴사했다. 퇴사 후 이야기라고 하면 시중에 출간된 책들이나 기사에 나오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떠오를 것이다.
- 퇴사해서 세계여행 다녔어요.
- 퇴사해서 자유롭게 여행 다니다가 나의 길을 발견했어요.
- 경제적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하고 퇴사했어요.
- 회사만 다녀서는 한계가 있어서 한계를 깨기 위해 퇴사했어요.
- 퇴사 후 그동안 쌓은 능력을 살려서 1인 기업 해요.
- 회사를 나와서 회사에서 그동안 쌓은 실력으로 프리랜서해요.
- 진정한 꿈을 찾아 퇴사했어요.
아, 식상하다. 다들 비슷비슷하다. 나는 전혀 다르다. 내 이야기는 독보적으로 멋이 없으니까. 퇴사해서 세계여행을 떠날 용기도, 퇴사 후 혼자 기업을 시작할 능력도, 다른 분야의 업을 시작할 경험치도, 회사에 갇혀서 펼치지 못했던 퇴사 후 자유롭게 펼치고 싶은 원대한 포부도, 다 버리고 도전하고 싶은 나만의 열정적인 꿈도 없었기에.
퇴사는 그저 현실이었다. 쫄보에게 자유를 즐길 여유따위 없었다. 갑자기 끊긴 월급은 날 불안하게 만들었고, 하루라도 빨리 먹고살 길을 찾아야 한다는 강박만 있었다. 여기서 절대 무너뜨릴 수 없는 전제조건은 딱 하나. 절대 전공과 경력은 살리지 않는다. 11년 동안 일해온 분야의 경력, 대학교에서 공부했던 전공을 살리지 않고 새로 시작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안다. 더군다나 그 어떤 방향 설정도, 조금의 준비도 되어있지 않은 상태라면 훨씬. 그 어려운 걸 하려 하니 그 어려운 것에만 신경 쓰기에도 버거웠다. 정말 멋없는 퇴사다.
궁금할 수 있다. 이렇게 멋없게 굴 거 대체 왜 퇴사했냐고. 초반부에 이미 쓰여있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서. 다르게 표현하자면 적성에 맞지 않아서. 깊이 들어가보면 퇴사의 이유가 한가지는 아니겠지만 한마디로 표현하기에 가장 정확한 표현이다. 하지만 오해의 소지가 다분한 표현이기도 하다. 적성에 맞지 않는다는 말을 가볍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기에.
- 왜 퇴사했어요?
에 대한 대답을
- 적성에 맞지 않아서요.
라고 하면서 깨달은 사실이다. 이 대답을 들은 사람들은 보통 이렇게 반응했다.
- 저도 적성에 안 맞는데 그냥 다녀요.
- 회사가 적성에 맞고 안맞고가 어딨어. 다들 안맞는데 그냥 다니는거지.
- 안맞아도 하다보면 적응하는 거죠 뭐.
하하. 그저 웃지요. 이게 얼마나 심각한 말인지 진짜 적성에 맞지 않는 일을 해보지 않고는 모르는 것이리라. 이해는 한다. 정말로 적성에 맞지 않는 일은 오래 할 수가 없다. 나는 요즘 말로 표현하면 '돈미새'라서 11년을 한 거지. 아니, 대학 전공까지 하면 15년? 고등학교 이과 시절까지 하면 17년?
그렇다. 나는 고등학교 때부터 수학은 쳐다보지도 않을 정도로 싫어했고, 이공계 대학 전공이 적성에 맞을 리 없었다. 체질을 따지자면 국어를 좋아하는 전형적인 문과 체질이다. 이 모든 것을 예전부터 아주 잘 알고 있으면서도 스스로 선택했고 심지어 전공을 살려서 취업했고 무려 11년을 다녔다. 이공계를 선택한 이유는 순전히 돈 때문이다. 취업이 잘된다고 하니까 빨리 취업해서 돈 벌라고.
- 그래서 먹고 살길 찾았어요?
아직이다. 이럴 거면 멋지게 세계여행이라도 다녀오지 그랬어?라는 생각이 스멀스멀 들 정도로 아직이다. 그래도 후회는 없다. 나는 먹고 살길 찾은 다음에 세계여행 갈 거니까. 그러는 편이 훨씬 적성에 맞으니까. 아직 막막하지만 느려도 꾸준히 조금씩 조금씩 무언가 계속하다 보면 어느 쪽으로든 트이겠지. 대책 없는 희망과 아주 유연한 자기 합리화가 내 특기니까. 이거 하나 믿고 오늘도 혼자 일을 시작한다. 회사는 없지만 출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