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너는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게 뭐야? 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
돈이 없는 것.
내가 생각도 안하고 바로 떠올린 대답이다.
'너는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게 뭐야?'
처음에 누가 물어봤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혼자 사색하다가 갑자기 떠오른 질문일까? 남의 질문인지 나의 질문인지조차 기억나지 않지만 대답이 바로 나오는 나와 그 대답이 '돈이 없는 것'이라는 사실에 대한 당혹스러움은 생생하게 기억난다.
알고는 있었다. 나는 경제적인 부분에 대한 불편함을 싫어하고 그런 불편함이 없도록 하기 위해 늘 노력하고 늘 염두에 두고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 하지만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게 돈이 없는 거라니. 속물같기도 하고 냉혈한 같기도 한 이상한 대답. 생각해보면 세상에 무서운 일은 엄청 많다. 소중한 사람을 잃는다거나 어떤 치명적인 사고가 발생한다거나 하는 등 자세히 묘사하고 싶지도 않은 다양한 일들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왜 하필 '돈이 없는 것' 이라는 대답이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나왔을까. 아마 진짜 제일 무서운 건 따로 있겠지만 그만큼 피부에 많이 와 닿은 무서움이 돈이 없는 상황이 주는 무서운 불편함이기 때문일 것이다.
아이러니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지금 백수다. 그것도 1년 넘도록 백수다. 2019년 2월 퇴사한 이후로 벌써 시간이 많이 흘렀다. 지금의 평온한 상태가 되기까지 험난한 시간들이 있었다. 돈이 없는 게 제일 무섭다는 사람이 감히 백수생활을 이렇게 오래하다니. 퇴사 직후의 내 상태를 생각하면 지금의 상태는 신기할 정도다. 돈이 없는게 무섭다면 벌어놓은 돈이 점점 떨어져가니 점점 불안하고 무서워져야 하는데 점점 평온해지고 있다. 월급이 없는 상태에 적응해가고 있는 것일 수도 있고 월급만 바라보고 살던 사람이 월급이 아닌 돈에 눈을 뜨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여태 딱히 소득원이랄만한 것이 없는 걸 보면 아직 눈을 뜨지는 못한 것 같지만 지금의 내 상태에 감사한다. 회사생활 말년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불안의 감옥에 갇혀있었던 느낌을 떠올리면 지금이 훨씬 낫다. '영영 소득이 0은 아닐까?' 라는 불안에 가끔 시달리긴 하지만, 적어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면서 스스로를 긁고 있지는 않으니까.
- 그 회사를 왜 그만둬?
너무 많이 들었던 말이다.
- 회사생활이 다 힘들지. 그래도 넌 좋은 회사 다니잖아. 그냥 다녀.
- 요즘 20대들 취업난이 장난 아니래. 남들은 들어가고 싶어서 난리인 회사를 왜 나오려고 애를 쓰니.
나를 너무 괴롭혔던 말들이다.
알고 있다. 정작 저 말들을 나한테 한 사람보다 내가 더 잘 알고 있었다. 정말 좋은 회사다. 안좋은 회사라서 그만두고 싶었던 것이 아니다. 좋은 회사라서 너무 괴로웠다. 11년을 참고 다녔던 건 좋은 회사였기 때문이다. 무려 11년이다. 연차만큼 연봉은 계속 올랐고, 회사 제도나 복지는 점점 좋아졌다. 운 좋게 진급도 제때 했기에 주변 사람들은 더욱 이해를 못했다. 신입사원때의 생고생과 선임시절의 고군분투를 알기에 더더욱 그랬다. 겉보기에는 퇴사시점의 내 상태가 제일 안정적으로 보였을 수도 있다. 그 시점에는 복지도 연봉도 정말 좋은 수준이었기 때문에 그만두기 위해서 아주 큰 용기가 필요했다. 퇴사 후에 나를 괴롭혔던 것도 이 부분이다. 나가서 빨리 제대로 뭔가를 이루지도 못할 거면서 그렇게 좋은 조건인 곳을 왜 그만둔거야? 남들이 나에게 하던 질문을 내가 나에게 하고 있었다. 나는 나만 믿고 퇴사했는데, 어느 순간 내가 나를 의심하고 있었다. 그래서 퇴사 후 몇달을 인생에 남을 만큼 괴롭게 보내야했다. 그 시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는 사실에 지금은 너무 감사하지만.
회사를 못견뎌서 그만두려고 애쓴 것이 아니다. 애초에 나와 너무 맞지 않는 길로 들어섰다. 그 이유도 어이없을 정도로 일관성있게 돈 때문이다. 그러니 당연하게도 회사를 떠날 생각을 오래전부터 하면서 생각한 진로는 경력을 살려서 다른 회사에 가는 것이 아니었다.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일을 하는 것이었다. 회사를 다니면서 괴로웠던 이유는 내가 하고 있는 일들, 그 일들을 하면서 쌓이는 경력, 실력 등이 앞으로의 인생에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곧 회사를 떠날 것이고, 회사를 떠나면 지금 하는 일과는 전혀 다른 일을 할 것이니까. 그 새로운 전혀 다른 일을 하기 위해 시간과 노력과 마음을 쏟아야 하는데, 계속 하던 일만 하고 있는 내가 너무 답답했다. 그만두고 새롭게 시작할 용기도 회사를 다니면서 다른 진로에 진지하게 도전할 에너지도 부족한 내가 너무 못나보였다. 돈돈돈. 오로지 돈 하나만 보고 회사를 꾸역꾸역 다녔다. 애초부터 잘못 들어선 길이었다. 빨리 빠져나와서 다른 길을 가는 것이 나를 위하는 길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못했다. 무서우니까. 나는 돈이 없는 게 제일 무서우니까.
돈이 없는 것이 무서워서 이렇게 애매하고도 특이한 무늬만 경력자인 장기 백수가 되었다. 남들은 퇴사하고 그 동안 못누린 자유를 멋지게 누리다가 잊고 있던 진정한 자신의 적성을 찾아 멋지게 정착하던데. 세상에 그런 이야기들만 잔뜩 나와있던데. 이렇게 찌질하고 못난이 같지만 그래도 어딘가를 향해 가고는 있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의 지극히 평범한 이야기도 한 번 해보면 어떨까?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에게 위로를 받으려고 검색을 열심히 해봐도 나와는 다르게 무언가 한가지씩은 갖추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만 나온다면, 비슷한 경험을 하고 훌륭하게 정착한 사람들의 비법을 배우고 싶은데 알고 보면 비슷하지 않은 사람들의 이야기만 나온다면,(퇴사 후 내가 그랬다. 위로와 용기가 필요해서 열심히 검색했는데 다들 한가지씩은 특별해 보였다) 지극히 평범한데 미련하기까지해서 정말 맨손으로 다시 시작하려 하는 나의 이야기가 조금은 도움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아직 성공하지 못해서, 정착하지 못해서 도움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
끝까지 재미없고 멋없는 이야기로 남을 수도 있다.
이런 사람이 어딘가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위로가 될지도 모르니까 일단 썼다.
그리고 계속 쓰려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