쫄보 퇴사러 이야기, 이렇게 형편없는 방황이라니 - 6편
< 사기꾼 없는 사기 사건의 연속 - 이번엔 취업사기? >
#. 2019년 11월 어느 날.
이미 홀렸다. 확정된 것처럼 들떴다.
- 만일 그렇게 되면 여기 있는 사람들에게 양갈비를 쏘겠습니다!
내가 신이나서 한 말이다. 갑자기 양갈비를 왜 쏘냐고? 왜냐하면 내가 원하던 일자리가 저절로 눈앞에 나타났으니까. 이야기 된 대로라면 나는 날로 먹듯이 취직할 예정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행운에 기분이 좋아져서 취직하게 되면 그 자리에 함께하던 사람들에게 양갈비를 쏘겠다고 말한 것이다. 뜬금없는 발언에 사람들이 살짝 당황했다. 가볍게 쏘기에는 양갈비가 꽤 비싸니까.
- 양갈비 비싼데! 괜찮겠어요?
- 이제 월급이 보장됐는데 뭐가 걱정이에요. 10퍼센트 정도 수수료라고 생각하죠. 정석대로면 수수료를 드려야되지만 제 마음대로 베풀어도 되죠?
아무말 대잔치의 향연. 대화의 절반은 장난섞인 아무말이었지만 양갈비를 쏘겠다는 말은 진심이었다. 누구와 무엇을 하고 있는 중이냐고?
멋없고 험난한 과정을 거쳐 내가 백수라는 사실을 겨우 즐길 수 있게 되었을 무렵 독서토론모임에 가입했다. 나는 책을 좋아한다. 책을 더 다양하고 깊게 읽고 싶기도 하고 다른 사람들과 생각을 나눠보고도 싶었다. 개설된지 얼마 안 된 모임이어서인지 규모가 단촐해서 좋았다. 낯선 사람들뿐인 모임을 굳이 찾아서 참석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았지만 막상 참석해보니 생각보다 재미있었고, 퇴사 후 거의 온종일 혼자만 생활하다가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니 신선한 생각들이 솟아올라서 유익하기도 했다. 그래서 모임이 열릴 때마다 참석하다 보니 가입한지 얼마지나지 않아 익숙해졌고, 토론 모임 이후 이어지는 친목 술자리에도 자연스럽게 참여하게 되었다. 그런 친목 술자리에서 있었던 일이다.
대화의 주제가 왜 이 방향으로 흘렀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도 각자의 직업에 대해 이야기 중이었던 것 같다. 사람들은 서른 중반에 돌연 백수가 된 내 이야기에 흥미를 보였다. 서른 중반의 나이에 기존 것을 다 버리고 온전히 새롭게 시작하는 것에 관한 이야기를 하던 중 K가 본인 이야기를 꺼냈다. 다른 일을 한참하다가 새로운 분야에 신입으로 입사해서 회사생활을 하고 있다고 했다. 그것도 전공과 전혀 다른 분야의 회사. 하물며 K는 나랑 동갑이었다. 귀가 번쩍 뜨였다. 여태 다른 일을 하다가, 내 나이에, 전공도 안살리고, 갑자기 새로운 분야에 신입으로 입사했다고? 관심이 동하여 꼬치꼬치 물어보았다. 업종, 회사위치, 입사경위, 담당업무, 급여 등등. 사람에 따라 무례하게 느낄 수도 있을 정도로 적나라하게 질문을 했는데 다행히도 K의 반응은 '불쾌'보다는 '흥미진진'에 가까웠다. 마침 지금 사람을 뽑는 중인데 지원해보라는 말까지 했다. 정말? 에이, 그냥 하는 말이겠지. 나는 처음에는 100% 장난이었다.
- 진짜 내가 지원하면 뽑아줘요?
- 네. 어차피 저랑 같이 일할 사람을 뽑는 거라서 제가 말하면 될 거예요.
K는 진지하게 답했다. 장난으로 던진 말을 진지하게 받는 통에 처음에는 당황스럽기도 하고 의심스럽기도 했다. 하지만 이야기하면 할수록 신빙성 있어 보였고 좋은 기회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본인의 업무가 너무 과중하여 사람을 추가로 뽑아주지 않으면 퇴사하겠다고 이미 말을 했고, 그 자리의 인력보강을 위해 사람을 모집하는 중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본인 마음에 맞는 사람을 뽑자고 하면 될 거라고. 일리가 있다. 이런 상황이라면 회사에서도 실무담당자의 의견을 존중해 줄 것이다.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간단히 작성해서 제출해 달라고 했다. 귀찮긴 하지만 제출만 하면 프리패스나 다름 없을테니 당연히 제출해야지. 경계심은 어느새 사라졌다. 하지만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건너라고 했으니 한 번 더 확인사살용 멘트를 날렸다.
- 이거 괜히 개인정보만 유출되는거 아닌가 몰라. 장난으로 하는 말이면 지금이라도 제대로 얘기해요. 나 오늘 집에 가서 진짜 이력서 씁니다? 괜히 헛고생하게 하는거 아니죠?
- 장난 아니에요. 회사에 말했는데 안 뽑아준다고 하면 어차피 저도 퇴사할거예요.
이건 진짜다. 회사에서 혼자하기 과중한 업무를 맡아 하다보면 동료가 절실히 필요해진다. 적절한 시기에 인력을 붙여주지 않으면 견디다 못해 전부 뒤집어 엎어버리고 싶어지기도 한다. 그렇다고 손발도 마음도 맞지 않는 사람을 붙여주면 더욱 미칠 지경이 된다. 지금 K가 그런 상황이라고 생각했다.
그렇단 말이지? 다음 날 바로 이력서를 썼다. 자기소개서도 썼다. 자유양식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쓰는 것이 정말 오랜만이라서 양식을 찾는 것에서부터 헤맸지만 제출만 하면 취직이라는 생각에 열일 제쳐두고 작성했다. 하지만 나는 이전 직장에서 근무했던 이력을 밝히고 싶지 않았다. 이전 직장같은 누구나 아는 대기업에 한참 다녔던 사람이 단순업무를 하겠다고 이력서를 제출하는 것이 이상하게 보일 것 같아서 괜히 민망했다. K에게 혹시 이전 직장 경력을 제외하고 이력서를 제출해도 되냐고 물어봤다. 그렇게 되면 11년이 통째로 날아가는데 그 동안 무엇을 했던 사람인지에 대한 의문이 생길 수 밖에 없으며, 회사 입장에서는 당연히 채용하기 찜찜할 것이라고 했다.
당연히 그럴 것이다. 알고 있으면서 괜한 질문을 했다. 그 정도로 밝히기 싫었지만 대안이 없었기에 드러내고 싶지 않은 경력을 썼다. 나 혼자 민감한 부분이고 어쩌면 자의식과잉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며 눈 딱감고 메일에 이력서를 첨부하여 보내버렸다. 제출완료. 이제 내가 바라던 단순업무에 취직할 수 있다. 단순 엑셀작업이 업무의 전부이고, 월 230만원, 칼출근/칼퇴근 보장, 바쁠 때만 바쁘고 여유시간 많음. 얼마나 좋은 조건인가! 에너지 소비를 최소화해서 일하면서 월급을 보장받고, 돈에 대한 걱정없이 나머지 시간에 진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생활을 할 수 있다. 그렇게 '나의 진짜 일'을 차곡차곡 쌓아서 나중에는 하고 싶은 일들만 하면서도 돈걱정 안할 수 있는 생활을 만드는 것. 내가 그리려 하는 작지만 큰 그림.
그런데 서류를 제출한지 일주일이 넘게 지나도록 소식이 없었다. 적어도 면접이라도 보러 오라고 해야하는 것 아닌가. 독서모임에서 마침 K를 만났기에 내심 기대했다. 무슨 말이라도 하겠지. 하지만 전혀 없던 일처럼 행동하는 K를 보면서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하고 싶은 말을 잘 참지 못하는 성격인 나는 아무렇지 않게 계속 기다릴 수가 없었다. 궁금한 건 물어봐야지.
- 회사에서 뭐라고 하던가요? 채용이 바로 되는 건 아닐테지만 면접 일정 정도는 나오지 않았어요?
- 아...... 그게... 사실은.....
말을 흐리더니 한참 망설이다가 말했다. 회사에서 내 이전 직장 경력때문에 부담스러워 한단다. 그럴 수 있다. 이 회사가 내 이전 직장에 납품을 하는 하청업체라는 것을 들어서 알고 있었기에 더욱 나의 경력을 숨기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 경력은 오히려 꺼릴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K의 생각은 달랐고 경력을 내세우면 더 좋아할 거라기에 그렇게 믿었다. 회사 내부 분위기나 성향은 나보다는 K가 훨씬 잘 알테니까. 그런데 이제와서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야?
- 그럼 안되는 거네요? 안되면 안된다고 말을 바로 해주지 그랬어요. 기다리고 있었잖아요. 아, 오라고 하는데 있었는데 일부러 안갔는데!
아직 친밀도가 떨어지는 사이였기에 장난기를 섞어서 말했지만 사실 짜증이 났다. 사람은 당연히 생각을 잘못 할 수 있고, 예상과 다르게 일이 잘 안 풀릴 수 있다. 그런 걸로 나무랄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잘 안되었다는 말정도는 먼저 해주는 것이 예의아닌가? 아마 내가 물어보지 않았으면 계속 모른척 하고 지냈을 것이다.
- 아니에요. 기다려봐요. 다시 잘 말해보고 있는 중이에요.
이해할 수 없었다. 본인 생각과는 다르게 진행되어 채용은 안될 것 같다는 정직한 한마디면 충분했는데, 자꾸만 다시 이야기하면 될 거라며 사건을 질질 끌었다. 체면 때문인가? 왜 제대로 말을 못하니. 인사권이 있는 상사가 해외출장 중이니 돌아오면 다시 강력하게 이야기해 본다나 어쩐다나. 하지만 그 상사라는 사람은 해외출장에서 영영 돌아오지 않을 듯 했다.(사실 그런 사람은 존재하지조차 않을지도 모른다.) 다음 모임때도 말이 없었고 다다음 모임때도 말이 없었다. 당연히 안되는 쪽으로 결론이 났을 것이고 말해봐야 입만 아프겠지만 성질이 성질인지라 속이 근질근질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 결국 잘 안된 것 같네요. 그럼 K님도 퇴사하시는 건가요?
나를 안뽑아주면 본인도 퇴사하겠다고 했던 말이 생각나서 물어봤다.
- 아... 저도 먹고 살아야죠....... 저 월세내야죠.
어느 정도 예상했던 답변이었지만 막상 직접 들으면 배신감이 들 줄 알았는데, 그저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왔다. 굳이 월세까지 들먹일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K는 퇴사할 생각같은 건 처음부터 없었던 것이다. 진심인 줄 알았는데, 그냥 술자리의 객기였구나. 내가 너무 열렬히 호응하는 바람에 분위기에 취해 스스로가 권한있는 사람이라는 착각에 빠졌었던 걸까? 취업 제안이 진심이라고 생각하게 된 것은 나를 안뽑아주면 본인도 그만둔다는 말 때문이었다. 그만큼 회사내의 본인 입지에 자신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그런 사람의 의견은 회사에서도 어느 정도 수용해 줄 테니 면접을 봐서 큰 결격사유가 없으면 채용될거라고 생각했다. 개인정보를 제공하는 것이 엄청 조심스러웠지만, 이 정도의 확률이라면 시도했다가 실패해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처음부터 아무 권한도 영향력도 없는 사람의 객기였다면 억울했다.
안다. 실질적으로 피해입은 것은 없다. 내 개인정보를 받아 악용하려는 의도가 아니었다는 것도 안다. 그런데 내 시간은? 내 노동력은? 내 감정소모는? 면접이라도 봤으면 억울하지도 않지. 얼마나 얼토당토않으면 면접조차 보러오라고 하지 않을까. 이건 그냥 농락당한거다.
화가 났지만 탓할 수는 없었다. 멍청하게 말린 건 나니까. 생각해보니 고작 몇번 본 사람을 어떻게 믿고 내 개인정보가 고스란히 들어있는 서류를 전달해 준 것인가. 그것도 시간과 노력을 담아 작성하면서까지. K는 인사담당자도 아니고, 한없이 의심하자면 정말 그 회사에 다니는지도 확인할 길이 없었는데. 생각해보면 억울하게 말린 게 아니라 그냥 멍청한 짓을 한 거다.
'의심도 많고 경계심도 많은 내가 왜 그랬을까?'에 대한 답을 해보자면, 이번에도 역시나 '월급을 향한 관성이 멈추지 않아서'이다. 노력하고 싶지는 않고 눈앞에 보이면 혹하는, 사기당하기 딱 좋은 상태. 늘 스스로 똑똑하다고 생각했던 것에 회의감이 들었다. 똑똑한 사람들 다 죽었군. 그러면 안되니까 나는 더 이상 안똑똑한 걸로. (슬프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어느 '30대 중반 돈미 백수 처자'는 이 말을 정말이지 너무도 야무지게 실천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