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규직은 필요없다. 아르바이트를 해야겠다. 시간을 고정적으로 빼앗기는 것은 이제 싫으니 일용직 아르바이트 같은 것이 좋겠다. 필요할 때만 신청해서 할 수 있는 일일 아르바이트를 찾던 중구인사이트에서 신기한 공고를 발견했다.
보조출연 아르바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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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오. 내가 찾던 아르바이트다. 새로운 경험도 하고, 용돈도 벌고. 재밌겠다.
또 잔뜩 들떠서 덜컥 신청할까봐 우선 스스로를 진정시켰다. 그리고 미심쩍은 부분을 물어볼 겸 전화를 걸었다. 본사에 한 번 들러서 사전 교육을 듣고 서류를 작성해서 제출하면 바로 할 수 있다고 한다. 신청 절차도 간편하고 수상한 부분도 없어보였다. 당장 다음날 교육을 신청했다.
교육장에는 사람들이 꽤 많이 있었다. 20명 정도? 모집 공고를 보면 하루에 3번씩 매일 교육이 있던데, 한 차수에 20명이나 온다고? 매 차수마다 20명이라고 가정하면 하루에 60명, 한 달이면 180명이다. 이런식이라면 엄청나게 많은 인원이 등록이 되어있을 텐데 과연 일할 기회는 있는 걸까?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잘 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는 속지않겠다, 손해보지 않겠다, 다짐하면서 교육에 집중했다.
교육담당자가 하는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매력적이었다. 하지만 순전히 교육담당자의 이야기니까 잘 걸러서 들어야한다고 생각했다. 유리한 부분은 자세히 설명하고 불리한 부분은 생략했을 것이 뻔한 설명에 속으면 안된다. 걸리적 거리는 부분이 있을 때마다 속으로 짚어놓았다가 설명이 끝난 후 줄줄이 질문했다. 생각보다 논리적이고 진솔한 답변에 의심은 사라졌다. 좋아, 해보는 거야.
그런데 걸리는 부분이 하나있었다. 보조출연자로 등록을 하려면 프로필 사진이 필요하다고 했다. 사진이야 찍으면 되지 싶었지만 문제는 스튜디오에서 정식으로 찍은 프로필 사진이어야 하며 핸드폰으로 찍은 사진은 인정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외부 스튜디오에서는 프로필사진 촬영비가 10만원 정도인데 본사에 딸려있는 스튜디오에서 촬영하면 3만5천원이니 사진이 없는 사람들은 여기서 촬영을 하면 좋을 거라고 했다. 여기서 촬영하면 바로 등록도 할 수 있으니 당장 내일 스케쥴도 신청이 가능하다고 했다.
보조출연은 성별이랑 연령대, 의상컨셉 정도만 맞추면 된다고 알고있다. 얼굴 생김새나 디테일한 분위기를 보지 않는데 대체 왜 프로필 사진이 필요한가에 대해서는 의문이었지만, 데이터 확보를 통해 숨은 인재를 발굴하고 싶은 회사의 욕심이라고 생각하고 넘어가기로 했다.
프로필 사진을 찍겠다고 남은 사람은 나 포함 고작 5명이었다. 보조출연알바 지망생은 이렇게 20명에서 5명으로 줄었다. 초상권을 침해받고 싶지 않은 사람, 사진 촬영비를 지출하고 싶지 않은 사람, 프로필사진이 필요한 이유에 대해 의심이 드는 사람 등등 이유는 다양할 것이라 생각한다. 그중 두 명은 단순 알바지망생이 아니라 배우나 모델 쪽 지망생 같아 보였다. 순수 알바지망생은 3명만 남은 것이다.
고민이 전혀 안되었던 것은 아니지만 사진촬영 시세를 알고 있었고 3만5천원이면 합리적인 가격이라고 생각했다. 아르바이트를 하루만 하더라도 남긴 남는다는 계산을 했다.
연장이나 추가 수당 없이 최저시급으로 8시간 치를 받는다고 하면,
일당 약 6만 8천원 - 사진촬영비 3만5천원 = 3만 3천원
일당이 계속 3만3천원이면 안되지만 그 다음부터는 사진비용이 빠지지 않으니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프로필 사진을 이번 기회에 찍어놓으면 나중에 필요할 일이 있을 때 유용하겠지,라고도 생각했다.
사진 촬영 순서를 기다리는 중에 교육 동기(?)들과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다. 동기들은 내가 교육담당자에게 자세하게 질문해줘서 굉장히 좋았다고 말했다. 본인들도 미심쩍은 부분이 많았는데 내 질문 덕에 궁금증이 다 해소되었다며 고마워했다. 왠지 좋은 일을 한 것 같아 뿌듯했다. 역시 난 합리적이야.
교육 동기들 중 2명과는 특히 마음이 맞아 카톡 단톡방을 개설했다. 50대 여성 H님, 20대 여성 S님, 그리고 30대 여성 나. 우리 3명은 보조출연알바 신청현황 및 경험 후기를 서로 공유하기로 했다. 시간과 조건이 맞으면 같이 하면 더 좋지만, 같이 못하더라도 서로 정보를 공유하면 도움도 되고 안심도 될 것 같았다.
보조출연 알바 신청절차는 다음과 같다.
1. 네이버 밴드에서 촬영 스케쥴을 확인한다.
2. 본인이 하고 싶은 스케쥴이 있으면 문자로 신청한다.
3. 출연 확정 회신을 기다린다.
3번에서 답장이 오면 그 답장의 내용(의상컨셉 등)대로 준비하면 되고, 답장이 오지 않으면 스케쥴 배정이 되지 않은 것이니 쉬면 된다. 마냥 기다려야 하는 방식이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별 수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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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몇 주 후. 보조출연 교육 동기 단톡방 )
S(20대) : 언니들, 데뷔하셨어요?ㅋㅋ
H(50대) : 나는 조건에 맞는 공고가 뜨지 않네.ㅠㅠ
나 : 교육 이후로 매일 신청하고 있는데 한 번도 답장이 안와요 ㅋㅋㅋㅋ 이제는 오기가 생겨서 일정 안되는 날도 막 신청하고 있음.
S(20대) : 저도 그래요!!! 주변에 얘기했더니 다들 거기 사진비로 먹고사는 곳 아니냐고, 3만5천원 왜 버렸냐고 놀려요 ㅋㅋㅋㅋㅋ
나 : ㅋㅋㅋㅋ 맞아요. 계속 신청해도 계속 안되니까 그런 생각이 들긴 들더라고요. 심지어 채용공고는 아직도 진행 중. 지금 인원도 수용 못하는데 왜 계속 채용하는거지.....
H(50대) : 가족들이 뭐라고 할까봐 얘기도 못하겠어. 아들한테 얘기하면 분명 잔소리 들을거야. 하지 말라고 했는데 괜한 짓 했다고.
S(20대) : 우리 진짜 사기당했나 봐요.ㅋㅋㅋㅋㅋㅋ 다른 알바를 찾아봐야겠어요.
우리는 자체적으로 결론 내렸다. 그곳은 사진비로 먹고사는 곳이다. 기대를 내려놓자.
야심차게 도전했던 보조출연 알바 지망생 3명은 이렇게 영영 지망생으로 머물게 되었다. 20대 S는 어떻게든 손해 본 것 같은 느낌을 줄이겠다고 마음에 들지도 않는 프로필사진을 포토샵으로 자체 보정해서 카톡 프사로 활용했다. 50대 H님은 보조출연 알바를 신청했었다는 사실을 가족들에게 영영 말하지 않기로 했다. 나는?나는 뛰어봐야 또 여전히 백수인거지.
이렇게 쫄보 퇴사러의 형편없는 방황이야기는 막을 내린다.
보조출연 알바를 마지막으로 어딘가에 고용되려는 노력을 멈췄다. 생계 걱정을 덜기 위한 임시 취업은 부차적인 목표일 뿐인데, 어느새 너무 비중 높은 목표가 된 것 같아서였다.
주객전도. 뭔가 잘못됐다는 느낌이 물씬들었다. 목표를 다시 세워야했다. 그래서 다시 세운 목표는 고용되지 않기.
회사를 그만두고 하고 싶었던 것은 취업이 아니라 창업이었다. 거창한 창업이 아니라 회사라는 시스템이 없어도 나의 능력으로 먹고살 수 있는 일을 찾아서 하는 것. 돌이켜보면 회사를 그만두고 제일 먼저 생각했던 것도 '공방창업'이었다. 쫄보 기질이 한껏 발휘되어 접었을 뿐. 해보지 않은 것에 대한 두려움, 막막함. 해봄으로써 발생할 기회비용에 대한 걱정. 망하고 싶지 않다, 손해보고 싶지 않다는 불안을 동반한 생각.
어차피 회사를 다니지 않을 거라면 해보지 않은 일을 할 수밖에 없다. 나는 뭐가 그렇게 무서웠던 걸까? 새롭게 살아보겠다면서 새로운 상황을 견디지 못하고 다시 전처럼 돌아가고 싶어서 안달 난 사람처럼 행동했다. 생계대비라는 핑계를 대면서.
사실은 생계가 불안했던 것이 아니라 회사를 나와서 회사를 다니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제대로 할 수 없을 것 같은 나 자신이 불안했던 것은 아닐까? 그렇게 스스로를 아끼고 믿는다면서 전혀 믿어주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 그랬다. 전혀 기회를 주지 않았다. 현명하고 성숙한 사람이라면 당연히 확실한 생계 대비책부터 마련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생각만하면서 아무것도 못하는 것이 더 손해라는 것도 모르고 현명한 척, 성숙한 척 스스로를 잡아맸다.
도전-포기-방황-도전-중단-도전-탈락-도전-탈락. 형편없는 행보의 반복. 어쩌면 당연했다. 자유롭고 즐거운 생활을 하고 싶어서 퇴사해놓고 자유로움과 가능성을 즐기지 못했으니까. 가던 방향대로 가려고 하는 관성의 법칙에 철저히 지배당했으니까. 마음이 없는 곳에 좋은 결과가 있을리 없다. 한참 돌고돌아서야 깨달았다. 한참 돌고돌아서야 관성이 멈췄다. 어쨌든, 멈췄다.
결국 돌아돌아 제자리다. 퇴사 후 뭐했어?라고 물으면 그냥 놀았어.라고 대답한다. 이룬 것이 없으니까.
시간이 아깝지 않냐고? 괜찮다. 이룬 것은 없지만 얻은 것도 많아서. 마음가짐도, 생각하는 방식도, 세상을 보는 시야도 달라졌다. 단기간에 운좋게 무언가를 이룬 것보다 앞으로 더 잘 살 수 있는 단단한 나를 만든 것이 더 가치있다고 생각한다. 단단해졌기에 오래오래 많은 것들을 이루어 나갈 수 있을 테니까.
변명처럼 들릴지도 모르겠다.
내 마음은 변명이 아니라고 말한다. 이제야 자유로워졌다고 말한다. 이제는 무엇을 하더라도 잘 살 수 있을 거라고 말한다. 더 이상 무섭지 않다고 말한다. 그저 믿고 천천히 움직이면 된다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