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꿈을 현실로 빚어낸다
마우이를 떠나 오아후로 향했다. 한국으로 돌아가려면 호놀룰루 공항을 통해야만 하기 때문에 이웃섬을 먼저 둘러보고 오아후로 돌아오는 일정으로 계획했는데, 여행 당시만 해도 끝끝내 자가격리 면제가 재개되지 않아 귀국 후 격리 기간까지 고려하다 보니 오아후의 일정을 며칠 줄일 수밖에 없었다. 해서 오아후에서는 일정에 대한 큰 욕심 없이 소소한 즐거움들을 누려야지 하고 마음을 반쯤 비우고 시작했다.
하와이 전체 여정을 통틀어 오아후에 와서야 비로소 도시의 냄새를 오랜만에 맡을 수 있었는데, 식도락도 마찬가지였다. 빅아일랜드, 마우이에서 아무리 맛있다는 현지 맛집도 내 입에는 약간 허전한(?) 듯한 맛이거나 아쉬운 가성비였는데 오아후에서는 오히려 골라둔 곳을 주어진 끼니 수 안에 방문해보기도 힘들 정도로 많은 맛집들이 곳곳에 있었다.
그중에서도 비행기에서 내린 뒤 처음 맛 본 맛집다운 맛집, '키킨 케이준'은 기대 이상의 이상이었다. 커플, 가족 단위로 손님들이 꽤 있는 가게였는데, 다양한 해물을 선택한 소스에 맞게 볶아서 큰 투명 비닐에 서빙해주는 게 특징이었다. 나는 추천받은 대로 매운 갈릭소스에 밥까지 추가해서 한국 식으로 싹싹 비벼 먹었다. 소스가 꽤나 매콤해서 김가루 생각이 절로 났다. 고춧가루가 들어간 매콤 칼칼한 마늘 소스가 입안에 그득하니 여기가 천국인가 싶었다. 매운맛 때문인지 나도 모르게 입안과 비닐 속을 오가는 숟가락의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 랍스터는 쫄깃 담백했고, 새우와 조개도 까먹는 맛이 일품이었다. 첫 끼로서는 대성공이었다. 얼얼하게 부른 배를 두드리며 해가 지는 오아후와 함께 숙소로 달렸다.
오아후에서는 겨우 3일만 숙박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다른 섬에서 나름 절약한 비용으로 꽤 괜찮은 숙소들을 방문해 보고 싶었다. 그중 하나가 핑크 리조트로 유명한 1927년 오픈한 로열 하와이언 럭셔리 리조트다. 이름에 럭셔리가 들어가 있는 게 왠지 자기 자랑하는 것 같아 어색하지만 이름에 걸맞게 직원들이 입구에서부터 엄청 친절하고, 또 건물 자체가 고풍스럽고 멋있어서 룸 내부며 곳곳을 구경하는 재미가 있다. 좀 특별한 점은 요일별로 요가 수업. 레이(하와이식 꽃 목걸이) 만들기 수업 등 투숙객들을 위한 클래스를 운영한다는 것. 한국인들을 포함한 다국적의 여행객들이 묵는 인기 있는 숙소가 아닐까 하는 개인적인 평가를 내려본다.
오아후의 아침은 세 섬을 통틀어 가장 선선했다. 긴 팔을 입지 않으면 쌀쌀하다고 느껴질 정도의 체감 온도였다. 어떤 여행이든 아침에 일찍 나서는 산책을 좋아하는 나는 어김없이 걷기 편한 옷을 입고 무작정 길을 나섰다. 길이라곤 하나도 모르지만, 한적한 시간에 우연히 만나는 풍경들을 좋아한다. 어디까지 걸어갈 수 있을지 모르지만 마음껏 걸어도 될 것 같은 여유로움이 있어서 또 좋다.
오아후의 특징은 번화가인 도심과 해변이 맞붙어 있다는 점이다. 하와이의 다른 섬들도 바다가 매우 근접해있긴 했지만, 필요한 모든 것이 손 닿을 거리에 있는 '도시'의 스멜은 나지 않았었기 때문에 조금 더 특별하게 느껴졌다. 특히, 오아후는 밤늦게까지 펍이며 라이브 카페 등이 운영되며 꽤 많은 사람들이 가게 안에, 거리에 있다는 점이 신기했다. 서울의 밤이 길다고는 하지만 코로나 이후에는 밤에 사람들로 붐비는 거리를 경험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새삼스럽게 외국인들이 바라본 서울이 이러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코로나가 아직 가시지 않은 시기에도 이 정도인데, 코로나가 닥치기 전 와이키키 해변의 밤은 얼마나 뜨거웠을까 슬쩍 짐작이 가기도 했다.
길 위를 걷다 보니 7시가 채 되기도 전부터 이곳 사람들은 출근 준비를 하고 어디론가 향하고 있었다. 무심한 여행객의 모습과 대비되어 갑자기 현실의 투명한 막이 느껴졌다. 반대로 내가 서울에서 바쁘게 움직이고 있을 때에도 누군가는 여행처럼 그곳을 다녀가겠지. 내가 머무는 곳이 누군가에게는 세상 어딘가 일 거라는 어느 카페에서 읽은 글귀가 떠올랐다.
적당히 배가 고파졌을 때쯤 미리 예약해둔 레스토랑 'Hau tree'로 향했다. 이 레스토랑은 해변 리조트 1층에 자리 잡은 식당인데, 투숙객이 아니라도 예약을 통해 식사를 할 수 있다. 처음에는 뭐 얼마나 대단한 레스토랑이겠어~ 했지만 카페에 들어서는 순간 입이 떡 벌어졌다. 모던하고 따뜻한 색감의 인테리어에 테이블과 테이블 사이에 엄청나게 큰 나무가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다. (이 사진을 왜 내가 안 찍었던가!) 나무가 얼마나 큰지 레스토랑의 2/3는 덮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창가 테이블석 바로 옆은 해변의 모래사장이었고, 자리에 앉으면 보이는 시야는 모두 푸른 수평선 안이었다. 나무의 품에 안긴 것 마냥 포근하게 앉아 바다를 바라보며 아침 식사를 하는 내 모습이란, 1인칭으로도 3인칭으로도 뿌듯하고 감동적인 순간이다.
특이하게도 이곳은 내가 방문한 곳 중에 유일하게 커피 리필을 해주는 곳이었는데, 주문한 음식 메뉴들도 상당히 훌륭했다. 대충 이거 저거 얹어놓은 음식이 아니라 셰프가 정성 들여 만든 느낌적인 느낌이랄까. 뷰 값과 음식 퀄리티가 반영되어 가격은 당연하게도 조금 비쌌지만, 상당히 푸짐하고 만족스러운 식사였다. 오전 10시까지는 건물 뒤쪽 길에 무료 주차도 할 수 있어서 주차비 걱정 없이 편하게 아침 식사를 할 수 있는 곳이었다.
식사를 하고 나와 또 걷고 걸었다. 도심 산책이라는 말이 딱 맞는 한가로운 시간이었다. 개들은 주인의 줄에 매여 함께 쫄랑쫄랑 산보를 하고, 급하게 걷는 걸음은 아무도 없다.
갑자기 우스운 생각이 슥 들어온다. 지금까지 이웃섬 빅아일랜드, 마우이에서도 그렇게나 좋았다고 했으면서 왜 오아후에 오니 사람들의 머릿속에 자리 잡은 하와이 여행에 대한 이미지가 무엇인지 알 것만 같은지. 하와이의 시간들이 어느 한순간도 빼놓지 않고 정말 다 좋았는데, 왠지 일반적 정의로서 하와이 여행은 오아후에서 사람들이 경험하는 그 빛깔과 온도, 색감일 것 같은 오만한 예감이 들었다.
고급 리조트에서의 편안한 잠자리, 편리하게 잘 닦여진 도로, 유동 인구가 많은 번화한 거리, 실컷 돈을 써버릴 수 있는 쇼핑센터와 익숙한 체인점 가게들, 즐비한 명품샵들까지. 어쩌면 도시의 삶은 내 것이 아닐지라도 화려하고 잘 단장된 것들을 주변에 끼고 사는 것에 익숙해지는 것일까.
빅아일랜드와 마우이에서의 시간이 너무나 좋았지만, 내가 경험한 것들은 왠지 사람들이 말한 하와이 여행과는 조금 다른 결이라고 생각이 되어 위화감이 들었는데, 이제야 해답을 얻은 기분이 들었다. 신혼 여행지로서의 이미지와 함께 소비하면서 기쁨과 여유를 누리는 자본주의 도시 문화와 아름다운 낭만이 깃든 해변의 환경이 만나 마케팅이라는 명분으로 연출된 하와이의 오아후, 호놀룰루라는 왠지 콧노래가 날 것 같은 이름조차도 그 본질을 조금은 가려버리는 것은 아닌지 혼자 회의론자가 되어 생각에 꼬리를 물었다.
동시에 하와이는 그런 의미로서 존재할 수 있는 공간인 것도 같다. 누군가는 꿈을 꾸고 싶어 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그 꿈을 충족시켜 주겠다 약속한다. 꿈이 실제를 이끌어 가는지, 실제가 꿈을 향해 가는지는 결론지을 수 없지만, 그렇게 발전하고 만들어져 온 공간이 하와이 이곳이 아닐까. 한편으로 다행이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가슴이 서늘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우리가 꿈꾸는 모든 환상들은 어쩌면 누군가가 빚어낸 현실 속에 제약당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