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번역 대학원의 마무리, 졸업 시험

호환마마보다 더 무서운(?) 통대 대장정의 끝

by 언디 UnD

통대 생활 2년의 마침표이자 최종 목표는 졸업 시험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졸업시험의 무게감과 압박감은 매우 크다. 1학년 꼬꼬마 통대생들에게 '졸업 시험'이라는 단어는 멀지만 언젠가 닥쳐올 미지의 두려움이라면, 2학년들에게는 1학년 꼬리표를 떼자마자 바로 마주하게 되는 현실의 공포이자 스트레스 요인이다.


2학년부터는 동시통역 기술을 포함해서 현업을 향해 나아갈 실질적인 역량을 갖추는 시기이기도 하고, 교수님에 따라 편차는 있지만 대부분 수업 내용도 졸업시험에 초점을 맞춰서 진행된다.

일반적으로 학기가 초반/중간/기말 3등분으로 나눠진다면, 2학년 2학기의 수업은 초반~중간고사>졸업시험과 같은 시간 흐름으로 재편된다. 기말고사 시험은 졸업시험 직전에 치러지는데, 보통 졸업시험을 앞두고 점검하는 모의고사 느낌이기 때문에 따로 시험 준비를 하거나 할 겨를이 거의 없었다. 또 졸업시험 합불 여부가 관건이기 때문에 학기 중 시험 점수가 학점에 영향을 미치기는 하겠지만 이전 학기 대비 가중치가 훨씬 낮게 여겨지기도 했다. D-60, D-30, D-10... 훅훅 디데이가 다가오며 2학기는 순식간에 지나갔고, 어느덧 졸업시험 시즌이 다가왔다.

통번역 주제로 인스타툰을 그리는 통대견님 졸업시험 편 @thefirstandtheoldest

졸업시험은 우리 학교를 기준으로 3일 동안 진행되는데, 통역 4과목(한영 순차, 영한 순차, 한영 동시, 영한 동시), 번역 4과목(한영 일반 번역, 영한 일반 번역, 한영 전문 번역, 영한 전문 번역)으로 총 8과목을 친다. 첫 날 일반 번역 2개, 순차 통역 1개, 둘째 날 전문 번역 2개, 순차 통역 1개, 마지막 셋째 날 동시 통역 2과목을 한번에 치르며 시험이 마무리 된다. (지금 생각해봐도 꽤 살인적인 스케줄이다.)


이렇다보니 수많은 과목들을 벼락치기하는 것은 사실 거의 불가능하고, 시험이 임박할 수록 많은 걸 하기가 어려워진다. 시험 일주일 전까지는 매일 한영, 영한 X 순차, 동시 = 4개씩을 매일 해보고 여유가 되면 복습하거나 틀린 부분을 점검하는 정도로 루틴을 삼았고, 시험 3일 전부터는 여력이 없어서 정리해뒀던 단어집과 수업 자료 복습에 집중하고 너무 어려운 지문을 연습하는 것은 되도록 피했다. 평소에도 부스에 들어가는 것에 약간 스트레스와 긴장이 있는 편이었기 때문에 시험을 치기 전과 다음 시험 전까지는 최대한 멘탈 관리에 신경을 썼다.


졸업 시험이 난이도가 높은 건 전문 번역 시험은 주제만 키워드로 미리 알려주고, 다른 시험은 어떤 내용이 나올지 전혀 알 수가 없기 때문에 사실상 세상 모든 지식이 시험 문제로 출제될 수가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인지 첫 날 시험이 제일 긴장이 됐다. 그리고 내가 제일 어려워하는 한영 순차 시험이 첫 날이었다. 번역 시험은 하드카피로 문제지를 받고, 컴퓨터로 번역본을 작성하는 방식으로 60분의 제한 시간이 주어진다.


통번역대학원 시험 문제는 잘 공개되지 않는 기밀과 같은 내용이라 타 학교와 비교는 어렵겠지만, 우리 학교가 지향하는 통번역은 형식이 고정되어 있는 연설문보다는 실무적인 내용을 담은 강연이나, 자연발화에 가까운 텍스트에 가깝다는 생각이 든다. 실제로 졸업시험 평가에서도 "이 학생이 업계에 나가서 페이를 받고 통번역사 일을 할 수 있는 수준인가?"가 중요한 기준이라고 교수님들께서 이야기하실 정도다. 입학 시험을 봤을 때와 마찬가지로 번역은 상당히 철학적이거나 인문학적인 사유가 들어간 내용을 비중있게 다루었고, 통역 또한 특정 주제에 얽매이지 않고 사회, 경제, 경영, 교육 등 다양한 분야에서 비교적 깊이 있게 다뤄질 수 있는 어젠다들이 출제되었다.


시험을 치면서 당황했던 건 학기 중에 수업에서 주로 다루었던 텍스트가 아닌 예상하기 힘든 형식의 텍스트가 등장했을 때였다. 보통 수업에서 다루는 텍스트를 연설문, 강연, 자연발화 정도로 나눌 수 있는데 연설문이라고 하면 고위급 정치인들이 공식 석상에서 대표로 발언하는 내용에 대부분이기 때문에 상당히 격식이 있고, 글의 구조 또한 어느정도 정해져 있다고 보면 된다. 그 외의 발화의 형식은 누구든 말할 수 있고, 어디에서든 말할 수 있는 모든 내용, 말 그대로 무엇이든 될 수가 있다. 일반적인 개론 형식의 강연, 특정한 주제를 다루는 세부 발표, 토론이나 대담, 방송 프로그램 등이 포함될 것이다. 그래서 졸업 시험 문제를 예측하는 것이 상당히 어려웠고, 뭐가 나오든 통역은 해야하기 때문에 순발력과 집중력이 크게 요구되었다.


현장에서는 시험 대기실에서 배정받는 팀의 순서에 따라 대기 시간이 상당히 길어질 수도 있고, 바로 시험을 치러 들어가게 될 수도 있는 시스템이었는데, 처음에는 준비해온 자료를 살펴보기도 했지만 거의 마지막 팀에 배정이 되면 딱히 할 일이 없어서 무료해지는(?) 기이한 현상이 나타났다. 빠른 팀에 배정받는 것이 유리할지 뒷 팀에 배정받는 것이 유리할지는 모르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체력이 소진되는 사람이라면 확실히 기다림이 길어질 수록 힘들어질 수 있겠다 싶었다. 팀 순서는 매일 골고루 돌아가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유불리가 있지는 않았다.


원래 통역보다는 번역이 마음이 편한 편이라 첫날 번역 시간은 큰 어려움 없이 지나갔다. 사실 시간이 넉넉하게 주어지는 것은 아니라서, 닥치는 대로 빠짐없이 완전히 엇나가는 내용 없이 작성하는 것에 초점을 맞췄다. (나는 할 일을 했고, 결과는 채점자에게 달린 셈..^^) 통역은 글로서리(통역시 참고로 활용하는 표현 목록) 자료를 받고 20분 정도 필기도 하면서 준비를 하는데, 이 때가 정말 많이 긴장이 됐다. 글로서리를 보면 대충 내용을 예측해보고 필요한 걸 더 준비할 수도 있지만, 예측이 틀려서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내용이 흘러갈 수도 있기 때문에 항상 여러 가능성을 대비해야 한다. 음성 파일을 듣고, 노트테이킹을 하고, 통역 시작부터 끝날 때까지의 시간이 너무 짧게만 느껴졌다. 내가 뭐라고 말했는지도 모를 정도로!


둘째 날은 훨씬 더 편하게 느껴졌다. 현장의 분위기에도 비슷해졌고, 함께 같은 팀에 배정되는 사람들과도 좀 익숙해졌기 때문일까. 시험 일주일 전 주제가 공개되었던 전문 번역 시험은 한영은 디지털 경제 규제, 영한은 모빌리티로 번역을 해야 했다. 한두 번쯤 접해봤던 내용이라 역시 큰 어려움은 없었다. (^^) 영한 순차 통역의 경우에는 음성 파일 속도가 만만치 않게 빠를 거라는 예고가 있었는데, 예상대로 빨랐고, 또 텍스트 내용도 굉장히 뜻밖의 내용이었는데 놀랄 틈도 없이 모든 것이 빠르게 진행되었다. 영한 순차에 (그나마) 자신이 있었던 나는 시험에 대한 기대가 컸었는데 생각보다 잘 보지는 못한 것 같아 아쉬웠다. 돌아오는 길에, 잠들기 전에도, 더 잘 할 수 있었던 부분이 자꾸자꾸 생각이 났다. 마지막 날이 동시 시험이기 때문에 텍스트 하나 씩을 연습하고 일찍 잤다.


셋째 날은 이미 시험을 3일째 치르고 있기 때문에 체력이 너무 달리는 게 실시간으로 느껴졌다. 시험 과목이 동시 통역 두 개밖에 없었기 때문에 대기 순서가 관건이었다. 한영 동시는 앞쪽, 영한 동시는 마지막 팀이었다. ㅎㅎ 긴 대기시간에 질리지 말자 다짐하며 옆자리 학우들과 예상 주제를 나눠보기도 하고 이런 저런 생각 정리를 하면서 준비를 했다. 무난한 주제로 크게 어려운 표현 없이 흘러갔던 한영 동시가 지나고, 극한의 속도와 전쟁을 치른 영한동시도 잘 마무리했다.(과연..?)


졸업 시험이 끝나고 난 소감은 뭔가 꽉 채워놨던 것을 다 쏟아낸 '공허함'이다. 막연히 어두운 마음이 들거나, 후회스럽거나 허무한 느낌은 아닌데 텅 빈 느낌이다. 연사 준비를 하느라 텍스트와 글로서리를 준비하고, 유투브 영상에서 좋은 강연을 선별하고, 매일 전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센싱하면서 빼곡히 할 일이 있던 삶에서 컴퓨터를 켜도 할 일이 없는 삶으로 한 순간에 바뀌어버린 게 놀랍고 이상한 기분이 든다. 시험이 끝나고 뒤를 돌아볼 여유를 가져보니 이제서야 지난 2년이 참 짧았다는 생각이 든다. 매일 매일은 참 고되고 힘겨웠는데, 한 단위를 매듭지었다고 생각하니 스스로 뿌듯한 마음도 든다. 간단하게만 기록했지만 통번역대학원 졸업시험 합격률은 생각보다 굉장히 낮은 수준이다. (평균 50% 이하인 것으로 추측됨)

한 달 뒤 졸업시험 결과를 받아들고나면 어떻게 달라질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스스로 참 잘했다. 고생했다. 위로, 격려하고 또 새로운 꿈을 꾸기 위한 시간을 만들어나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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