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생처음 간 혼탕의 추억, 인간의 존재를 생각하다.
조금씩 서늘한 바람이 코에 닿기 시작하는 10월 초,
드디어, 드디어, 드디어!!!!!!!!!! 유럽 대륙으로 날아갔다.
프로젝트의 3번째 도시, 독일 비스바덴으로 떠나기 위해서였다. 비스바덴은 독일 중앙에서 약간 서쪽에 위치한, 프랑크푸르트에서 멀지 않은 중소도시이다. 11시간이 넘는 긴 비행 끝에 내린 프랑크푸르트 공항에서 출발해서 바로 비스바덴행 기차를 탔다. 1시간 조금 안되게 이동해서 예약해둔 호텔에 도착한 시간은 저녁이 한참 지나 있었고, 깊은 밤으로 향해가는 9시경이었다. 쉬지 않고 이동했던지라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을 정도로 피곤했고, 그저 친절한 리셉션과 포근한 침대가 있다는 사실에 안도와 감사를 느꼈던 밤.
10년 전의 나였다면 굳이 숙소 내 조식 같은 건 신청하지 않았겠지만, 이제는 눈뜨자마자 먹을 것을 찾아 헤매는 정도의 열정은 식어버렸는지 미리 신청해둔 아침밥이 너무나 다행스러웠고, 흐뭇했다. 나이가 들 수록, 남이 차려주는 밥은 그저 좋은 법이다.
'기록하지 않으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일념으로 텅 빈 호텔 식당에서 혼자 사진까지 찍어가며 난리법석을 떨었다. 위에 보이는 아침밥을 든든히 먹고 오늘의 목적지인 카이저 프리드리히 떼르메(Kaiser-Friedrich-Therme)로 직행했다.
이 비스바덴 도시는 로마가 지배하던 시절부터 온천물이 솟아 나왔다고 하고, 12세기경부터 이미 온천 마을로 유명했던 유서 깊은 온천 마을이다. 이름에서부터 'Baden=Bath', 나 목욕 마을이요 라고 외치고 있다. 비스바덴의 'Wies'는 '초원, 숲' 이런 뜻인데, 초원에서 온천 용천수가 났다는 것이 옛날 옛적 마을 이름이 지어질 때에도 희한하고 독특한 점이었나 보다. 이 도시에서 가장 유명한 카이저 프리드리히 온천은 440 평의 큰 규모의 목욕탕이며, 물에는 다량의 미네랄이 함유되어 있어서 신경통 등에 좋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 신경통이라는 단어에서 느껴지듯, 자연스럽게 연세가 지긋하신 분들이 많이 가는 곳임이 틀림없었다. 개인적으로, 이 시기의 탐방부터는 물의 치유효과에 대해서 좀 더 조사해보고 싶었고, 실제로 사람들의 행동을 좀 더 노골적으로(?) 관찰하고 연구하고자 하는 욕심도 생겼기에 이곳을 꼭 가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내 마음에 한 가지 걸렸던 문제는 이 목욕탕이 '혼탕'이라는 점이었다. 하... 혼탕은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었고, 그나마 비슷하게 가본 건 가족들과 혼성 노천 온천에 수영복을 입고 들어간 경험뿐이었다.
"후아 - "(괜찮아, 괜찮을 거야... 난 할 수 있어!)
큰 한숨을 들이쉬고 입구로 들어섰다. 목욕탕 입구에서 노련한 아주머니가 입장료 받는 거랑 락커 키를 손목이나 발목에 거는 거까지는 좀 비슷했는데, 왁...... 탈의실부터 남녀 구분이 없을 줄은 몰랐다. 사람이 없을 때는 누가 들어올까 봐 눈치 보느라 옷을 벗는 속도가 급속도로 빨라지고, 순간 인기척이 느껴지자 뭉기적뭉기적 속도가 느려졌다. 지금 생각해보니, 왼쪽 오른쪽 힐끔거리며 들킬세라 조심스럽게, 탈의에만 한 20분 걸린 것 같다. 수건으로 몸을 가리고 조심스럽게 계단으로 이동하는데, 왠지 나 빼고 모든 사람이 다 슬리퍼를 신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헐, '나 슬리퍼를 안 받은 건가.', '슬리퍼를 가져와서 신고 들어가야 되는 곳인 건가.'
순간적으로 별 생각이 다 들었다. 상황 파악이 안 된 외국인의 갖가지 상상.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나를 보고 갑자기 한 아저씨가 잔뜩 움츠린 내 발을 가리키며, 무어라고 말을 걸었다.
'뜨학!!!!!!!'
무슨 말인지도 잘 알아들을 수 없고 대답도 할 수 없거니와, 도망칠 수도 없었다. 멍한 표정으로 상황은 지나갔고, 나중에 생각해보니 "안이 미끄러우니 젊은 여성이여, 에지간하면 슬리퍼를 신고 들어가는 게 좋을걸?"이라는 뜻이었던 듯. 안 미끄럽게 조심조심 살살, 계단을 타고 목욕탕으로 입성했다.
-첫인상
1) 사람들: 그렇게 다양한 사람들이 다 벗고 있는 게 일단 신기했고, 마치 박물관에서 봤던 명화 속 이름 모를 나체의 사람들을 실물로 보는 기분이었다. 더 신기한 건, 나 빼고 전부 부끄러워하지도, 불편해하지도 않고, 엄청 자연스럽게 움직인다. 예상대로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많긴 하지만, 또 완전 노인들만 있는 건 아니다.
2) 공간: 천장이 높고, 전부 아이보리빛 돌바닥에 돌벽, 타일이 깔려있다. (아마도 비싼 돌). 대중목욕탕이라기엔 고풍스럽고 고급진 인테리어. 나는 건축은 잘 모르지만, 갑자기 다른 세상에 와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3) 욕탕 및 사우나 방들: 물이 엄청나게 뜨겁진 않은데(최고가 39도), 종류가 꽤 다양하다. 물은 유황온천처럼 냄새가 나거나 그렇지 않고 되게 맑은 물, 입술에 느껴지는 맛은 단짠. 한국으로 치면 큰 찜질방에 있는 다양한 사우나 방들이 큰 규모로 여러 개 배치되어 있는 구조이다. 찜통 같이 습기가 많이 나오는 습식 사우나 방(여기는 좋았던 게 안이 어두컴컴하고, 운무가 자욱해서 눈 앞이 흐려져 사람들이 안 보인다, 얄루!), 뜨겁게 달군 돌 위에 물을 끼얹어 발생하는 뜨거운 기운과 연기로 몸을 뎁히고 지져주는 러시아식 구들방, 일반 온천수가 채워져 있는 여러 온도의 탕, 사람들이 주로 수영하고 노는 냉탕, 또 잠시 휴식을 취하며 공기를 쐴 수 있는 누운 안마의자들이 있는 시원한 방 등.
-반칙(?)
목욕 가운을 입은 사람들이 종종 있었다. 알고 보니, 탕/방마다 입구 쪽에 가운을 걸어놓을 수 있게 큰 고리 같은 것들이 있어서 방과 방 사이 이동할 때는 가운을 입어도 될 듯했다.
-인상 깊었던 것
(약간 나이가 있긴 했지만) 부부가 손 잡고 사이좋게 탕을 오가며 목욕을 즐기는 모습이 되게 사이좋아 보였다. 방에 누군가 혼자 들어앉아 있는데, 다른 사람이 들어오거나 하면 모르는 사이라도 "챠오!" 하면서 가볍게 인사도 하는 쿨함을 보았다.
입구에서 받은 종이 쪼가리 같은 게 있었는데, 거기 적힌 내용을 보면 처음 목욕을 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도록 나름 체계적으로 위에서 설명한 방들을 방문하는 순서를 가이드해주고 있다. 몸을 데우고 적절한 온도로 식히고, 또 데워주고, 식히고 그런 과정을 반복하는 것 같은 순환 방식이었다. 나는 그걸 외울 수도, 종이를 가지고 들어올 수도 없어서 심적으로 조금 더 친밀한 여성들, 옆에 계신 할머님들을 곁눈질하며, 그들이 어떻게 하는지를 보고 좀 따라 해 봤다. 아무래도 여성분들이 좀 덜(!) 거침없었고, 우아하게 목욕을 잘하고 계신 것 같아 롤모델로 삼을만했다.
역시, 사람 감각이란 금세 무뎌진다는 것을 새삼 알게 되었다. 처음에 어디에 둘 줄 몰라 방황하던 내 눈길은 어느덧 편안하게 주변을 둘러볼 수 있게 되었고, 불필요한 쑥스러움도 점차 사라져 갔다. 그냥 눈앞에 있는 그대로를 보게 되었달까. 그냥, 사람이고, 각자 몸을 쉬러 이 곳에 와 같은 공간에서 만난 것뿐이었다. 적당히 따땃한 물에 몸을 담그고 반쯤 누워 기대 있으니, 긴 비행의 피로가 조금씩 느슨하게 풀어지는 게 느껴졌다. 수많은 얼굴도 보이지 않는 사람들 사이에 앉아, 한민족의 자존심으로 뜨거운 기운과 습기를 더 오래 견뎌보기도 하고, 구들장에 몸을 일자로 펴고 맘대로 누워있기도 하면서 든 생각은 엉뚱하게도 인간 존재의 근원성이었다.
왜, 이 완전히 새로운 모습이 낯설고 이상하지 않을까. 어쩌면 이 모습은 우리 모두가 이 세상에 나타날 때의 모습, 그리고 돌아갈 때의 모습이 아닐까. 우리가 바깥세상에서 걸치고 있는 화려한 옷들, 명품들, 소유하고 있는 값나가는 것들, 옷만 벗어버리면 지금처럼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 않은가. 아니, 어쩌면 이게 진짜 모습이고, 가렸던 모든 것은 가짜였다. 그때가 지금까지의 내 모든 여행에서 인생의 '공수래공수거'가 피부로 진실되게 와 닿은 순간이었다. 혼탕은 야하고 비밀스럽기만 한 공간이 아니라, 이런 진실을 마주하기 위한 용기가 필요한 공간이었다.
"어, 여기가 진짜 유명한 목욕탕이야 여기서"
갑자기 귓등을 찌르고 한국말이 들려왔다.
'헉.........'
한국 남자로 들리는 두 사람이 꽤, 큰 목소리로 대화를 나누며 목욕탕을 가로질러 나에게로 가까이 다가올 것이 예상되었다. 나는 황급히 수건으로 몸을 가리고 다른 동선으로 목욕탕에서 재빨리 퇴장했다. 인생의 깊은 깨달음을 음미할 시간도 길지 않았고, 여행에서 한국인을 안 만나기도 쉽지 않구나, 생각했다.
몸도 머리도 한결 상쾌해진 기분으로 문을 나서며 조그맣게 작별인사를 나누었다.
"챠오, 카이저 프리드리히 떼르메!"
관련 링크:
목욕, 어디까지 해봤니 <유후인>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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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왜 목욕탕을 찾아다니고 있을까요?
https://brunch.co.kr/@uniqueme/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