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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욕 어디까지 해봤니, 일본 <유후인> 편

비 내리는 야외 온천에 몸을 담가 보았나요?

by 언디 UnD

여행을 할 때 항상 가장 중요하게 체크해야 하는 것은 뭐니 뭐니 해도 날씨인 것 같다. 날씨가 어떤지에 따라 내가 들고나가야 할 소지품, 그 날 이동할 수 있는 반경이나 동선 계획 등이 달라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나는 꽤나 선계획형 인간인지라, 여행을 가면 밤잠에 들기 전에 완벽히 예고될 수 없는 일기예보를 확인하며 노심초사, 고민에 빠지곤 했다. 그날 밤의 예보는 “비”였다. 아, 나는 여행 중 비 오는 날씨를 정말 싫어한다. 물건이 젖고, 사진에 담기는 빛깔도 흐리 멍덩하고, 기분도 처지고, 몸도 무겁다. 게다가 우산, 내가 정말로 들고 다니기 싫은 물건이 바로 우산이다. 하지만 비가 오면 어찌 되었건 쉼 없이 우산을 받치고 비를 막아내야 하지 않은가. 머릿속으로 생각만 해도 지쳐버리는 의무감을 우산이 준다는 게 싫다. 하지만 내가 아무리 싫어한들 예보는 빼박, “비”였다. 못 이기는 척 아주 조그마한 경량 우산을 챙겼다. 뭐, 비가 와봤자 얼마나 오겠어?


다음 날, 아침 일찍 버스 정류장으로 이동했다. ‘유후린’이라는 귀여운 이름의 갈색 버스에 올라탄 뒤, 기사님께 “유후인 가는 거 맞아요?”를 몇 번이나 물어보며, ‘안 지나치고 잘 내릴 수 있겠지.’하며 두근두근 버스에 탑승했다. 1시간이 조금 안되게 버스를 타고 가는데, 창밖으로 물방울, 아니 빗줄기가 굵어지고 있는 게 눈으로 보였다.

내 마음도 주룩주룩..

유후인을 가게 된 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였다. 20대 초반, 후쿠오카 자유여행으로 잠깐 들렀던 자그맣고 아기자기한 도시에 대한 인상이 꽤 좋았었고, 벳푸에서 당일로 다녀올 만한 가까운 거리에 있는 온천으로 유명한 마을이었기 때문이다. 유후인을 갈 수 있다는 생각에, 마치 오래 만나지 못했던 친구의 소식이 궁금한 것처럼 그때 그 풍경이 그대로 일지 궁금했고, 이번 기회에 내가 잘 모르고 있던 유후인의 또 다른 매력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감에 차 있었다. 그런데, 비라니.


싱숭생숭해하는 동안 금세 버스가 유후인에 도착하고, 버스 문에서 나오자마자 격한 환영 인사 대신 솟구쳐 몰아치는 비바람을 세차게 맞았다. (아마도 이때부터 남쪽 규슈가 점차 태풍의 사정권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던 것 같다.) 순식간에 뒤집어진 경량 우산에 너무 깜짝 놀라, 눈에 보이는 세븐일레븐으로 들어가 일단 2단 우산과 우비를 샀다. 왠지 심상치 않은 느낌이 들었다.

‘오늘은 상당히 젖겠군.’

마음을 내려놓고 나니 오히려 조금 편하기도 했다.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가 아닌, 내가 모르던 낯선 유후인을 새롭게 만나는 날이 시작되고 있었다.

모든 것이 푹 젖어버린 유후인은 어디에서도 보지 못한 처음 보는 광경처럼 보였다. 이미 오래전에 완전히 젖은 두 발과 샌들은 발을 디딜 때마다 푹- 푹 - 하며 숨 가쁜 소리를 내었고, 젖은 손으로 더듬더듬 스마트폰 구글 지도를 살펴가며 온천을 찾고 있는 내 모습이 좀 처량한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헛웃음이 나기도 했다. 길을 정확히 모르겠으니 그냥 방향만 확인한 채로 개울을 따라 마을을 올라가 보기로 했다.

넌, 누구니? 여긴 어디니?

유후인 버스 정류장에서부터 한참을 걸어 마을 끝 산 쪽에 붙은 긴린코 호수까지 걸었으나, 아무리 찾아보아도 그 근처일 거라고 한 온천이 나오지 않았다. 지도에 표시된 위치에 가보니 웬 기념품 상점이 있었고, 상점 아주머니에게 문의해보니 여기에 그런 온천은 없다고 했다. 이럴 수가. 분명히 충분히 조사하고 알아본 곳이라고 생각했는데, 존재조차 없다니 허탈했다. 당초의 계획대로 잘 되지 않으니, 괜히 빗속에서 고생하러 온 것 같아 맥이 풀렸다. 물에서 밀키스 빛이 나는 석회수 탕을 체험하고 어마 무시한 인사이트를 얻으려고 했건만.... 결국 기념품 점 아주머니가 추천해준 조그만 가족탕 온천을 다음 행선지로 정하고,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다행히 멀지 않은 곳에 온천이 위치해 있었고, 가게는 외부에서 볼 때는 그다지 특별할 게 없는 일반적인 가정집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이미 좀 지쳐 있었고, 목욕 자체에 큰 기대감은 없었다. 그냥 차갑게 식은 몸을 조금이라도 데워주기를 바랐다.


‘이렇게 일반 주택가에서 온천물이 나오나?’ 미심쩍어하며 환복 후 안으로 들어섰는데, 우와. 문지방 하나만 넘어서니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져 있었다. 탕의 구조가 좀 특이했는데, 건물 내-외부가 자연스럽게 연결되어 있어서 건물 쪽에는 샤워 시설이 간단하게 설치되어 있었고, 탕 쪽은 야외 노천온천 같은 느낌이 들도록 외부와 맞닿아져 있었다. 비가 내려서인지 탕 안에는 아무도 없었고, 혼자 야외 정원 겸 온천탕을 전세 낸 것 같은 기분에 갑자기 신바람이 났다. 촉촉하게 젖은 바위도, 풀도, 나무도, 처마에서 떨어지는 물방울까지, 탕에 앉아 전부 그대로 감상할 수 있었다. 물은 투명하게 맑고 따끈했다. 내리는 비가 그대로 물 위에 떨어질 정도로 천장에 개방감이 있는 구조였는데, 비가 내리다가 잦아들다를 반복하는 역동적인 탕에 몸을 담가보았다. 기분이 부드럽게 상쾌해졌다. 갑자기 주변이 조용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바삐 움직이던 몸을 멈추고 가만히 있다 보니, 내 주변의 모든 것이 한적하고 차분하다는 것이 의식되기 시작했다. 머릿속 생각을 잠시 멈춰보았다.

...

...

...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좋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서 좋았다. 내가 주인공이 아니라, 멀찍이 서서 그저 바라보는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이 모든 것이 처음 마주하는 장면인데도, 너무나 자연스럽고 편안한 시간으로 느껴진다는 게 묘했다.

나는 뭔가를 하러 오기에 바빴구나.

내게 주어진 시간을 빼곡히 채우기에 급급했구나.

목적을 잠시 잊고 즐긴다는 게 무엇인지를 잊어버렸구나를 깨닫게 된 순간이었다.

그때 비가 세차게 다시 내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빛나는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난 비로소 알게 되었다. 내가 싫어했던 건 비가 아니라 우산이었고, 우산은 비를 막으려고 사용해서 번거로웠던 것 뿐이다. 나는 온 몸으로 비를 맞는 즐거움을 이 날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아마도 이전보다 비가 조금은 좋아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몸을 씻으며 피로로 찌든 마음과 생각을 씻었던, 아름다운 풍경과 움직임을 보면서 눈을 씻었던, 그런 멋진 날의 잊을 수 없는 유후인이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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